[과거의 오늘] “말하기도 힘든 20명이 영혼의 소리로 부르죠” (2000.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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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만 다시 한번 ‘에델바이스’, 못 외운 사람들 집중하고…. ”

지난 12일 일산 홀트복지타운 교회에 장애인합창단 ‘영혼의 소리로’ 단원 20명이 모였다.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한껏 소리를 높여보지만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박자를 따라가면 발음이 샜고, 음정 맞추기는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연습 2시간 뒤, 남녀 3도 화음이 조화된 아름다운 선율이 흘렀다.

합창단 지휘자 박제응(박제응·36)씨는 그제서야 지휘봉을 놓았다. 한 소절, 한 소절 불러주며 따라하도록 반복한 게 수십 차례, 목이 쉴 정도였다. 단원 가운데 악보 볼 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정신지체장애인들이 지시에 따라주는 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박씨가 이 곳을 찾는 건 일주일에 세 차례. 자원봉사로 합창단을 맡았지만, 이젠 본업처럼 돼버렸다. 사실 박씨는 이탈리아 베르디국립음악원을 마친 ‘잘 나가는’ 음악도였다. 성악과 지휘를 전공하며 현지 타란토(Taranto) 국제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런 박씨가 98년 귀국 후 개인연주회까지 미룬 채 합창단에 매달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대학 봉사동아리 활동으로 홀트복지타운을 드나들던 85년쯤. 머리가 점점 커지는 대두증으로 고생하는 혜경이(당시 8세)를 알게 됐다. 12살을 못 넘긴다는 ‘최후 판정’을 받고, 휠체어에서 식물인간처럼 지내는 아이였다.

유학생활로 10여년이 훌쩍 지난 뒤 박씨는 다시 홀트복지타운을 찾았다. 뜻밖에도 혜경이는 여전히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박씨는 당장 합창단 조직에 박차를 가했다. 장애인 260여명 중 말을 하는 아이들 50명을 추렸고, 면접을 통해 최종 20명을 뽑았다. 교회에 있는 피아노를 빌리고, 보육사에게 임시로 반주도 맡겼다. 수십차례 반복해 간신히 한 소절을 완성하는 강행군을 계속했다. 자폐증 지표(25)씨가 말문을 열었고, 숫기없는 경진이(9)는 독창까지 맡았다.

박씨와 단원들의 노력은 작년 10월 창단연주회 개최로 이어졌다. 1000여명의 관객들은 모두 ‘인간승리’라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교회 10여곳에서 초청공연도 했다. 올 가을 미뤄 둔 귀국연주회를 개최할 박씨의 꿈은 개인 합창단 창단이다. “두 합창단이 자매결연을 하고 함께 무대에 서는 상상만 하면 가슴이 떨립니다. 장애인과 일반인이 함께하면 더 아름다운 영혼의 소리를 낼 겁니다. ”

/이종혁기자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2000&M=02&D=16&ID=000216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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