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첫시각장애인박사인강영우백악관정책차관보의아내석은옥여사의감동수기
강강영우박사와의운명적만남우리의만남은어쩌면숙명적이었다.그가평생단한번걸스카우트를방문한그때,나는걸스카우트신입회원으로그를돕는프로그램에동참하게되었다.아마그때하느님께서내게,저불쌍하고초라해보이는맹인중학생이10년후나의신랑이된다는사실을미리알려주셨다면나는그대로도망쳤을것이다.
그때그는맹학교중등부1학년생이었고,나는여대생이었다.가난과실명의고통에찌든모습을상상했는데문을열고들어서는학생은외모만봐서는전혀맹인같지않았다.프로그램이진행되는동안나는그학생만힐금힐금쳐다보았다.
누군가그를버스정류장까지데려다주고오라고했을때어디서그런용기가나왔는지"내가다녀오겠다”며허락이떨어지기도전에그학생의손을덥석잡고광화문사거리로나섰다.그때처음으로"숙대영문과1학년석은옥이에요"라며나를소개했다.그순간부터나는그의지팡이가되어오늘에이르렀다.
그는열네살때아버지를여의고중학교1학년때인열다섯살때축구을하다가공에눈이맞아실명했다.그의어머니가아들의실명때문에?麗鳧?받아뇌일혈로세상을뜨자고아가된형제들은뿔뿔이흩어졌다.
그는장애인재활원으로,여동생은고아원으로,남동생은철물점으로.재활원을전전하며남편은수년간방황했다.자살도여러차례기도했다.그러나어느목사님의도움을받은뒤"갖지못한한가지를불평하기보다가진열가지를감사하자"며마음을고쳐먹었다고한다.
처음만날때는완전히시력을잃은게아니어서남편은어렴풋이나마내젊은날의모습을기억하고있다.그러나지금은불빛조차도구별할수없는완전맹인이다.그때부터주말이면맹학교기숙사에찾아가책도읽어주고안내도해주는동안(1년정도봉사하다보니)정이들어,그를동생으로삼고싶은생각이들었다.무남독녀외동딸로동생이하나있었으면했는데,잘됐다싶어그생각을실천에옮겼다.당시나는그가투병과방황으로여러해학교에다니지못했다는것을몰랐다.그저대학생과중학생이라는것만생각해부담없이그의누나가되겠다고했을지도모른다.2년정도지나그의성적표에있는생년월일을보고한살반밖에차이가나지않는다는사실을알게되었지만,그때는그것이문제가되지않았다.
양친이안계신동생이생기니누나로서할일이정말많았다.학교에서소풍을갈때면도시락을싸들고따라가야했고빨래,장보기부터대학진학준비에이르기까지온갖뒷바라지를해야했지만,동생을도와준다는것자체가내게기쁨이었다.
누나동생으로6년,우리는너무나아름다운사랑을했다.물론아가페사랑이다.당시엔맹인에대한편견이심했다.맹인이버스를타려고하면차장이밀어내기일쑤고,가게에서는재수가없다며오후에오라하고,식당에서는구석자리에앉으라고했다.
주변!의완강한반대에도불구하고결혼그와만난지5년째되던해,그동안혼자만생각해온유학계획을그에게털어놓았다.나와헤어지는것이싫었는지,그는생각해보지도않고안된다며반대했다.나는좀당혹스러웠지만,차분히그를설득했다.결혼을해서도시각장애인교육과재활을천직으로알고계속할텐데더늦기전에유학을다녀와야겠다는말에결국그도동의했다.
나는1967년9월,미국으로유학을떠났다.그동안정이든그와의이별은큰아픔이었다.게다가처음으로가보는세계에대한두려움과걱정이겹쳤다.그에게도마찬가지였다.그때까지그림자처럼따라다니던누나를보내고혼자힘으로다가오는대입을준비해야하는부담과불안이겹쳐이별의고통은가중되었다.
내가떠난뒤동생영우는마음을독하게고쳐먹고대학입시에전념했다.그리고1968년연세대문과대교육학과에입학원서를제출했다.그런데청천벽력같은소식이들려왔다.맹인이라는이유로입학원서자체를접수하지않는다는것이었다.입학원서조차낼수없다니,그소식을들은나는미국땅에서그를위해아무것도할수없어발만동동굴렀다.
그런데4주정도지나!또한장의편지를받았다.영문과교수한분이대필해주어입학시험을무사히치르고교육과에10등으로합격했다는것이다.순간나도모르게감격과감사의눈물이흘러내렸다.
그는1968년3월,서울맹학교고등부에서연세대에입학해그동안박박깎은머리를기른채교복대신신사복을입고찍은사진도보내주었다.정상인들과같이공부하며잘적응할수있을까,하고걱정했는데첫학기부터장학생이되었다는편지가날아왔다.
나는15개월만에귀국했다.그동안의이별은우리두사람의관계에도변화를가져왔다.더이상누나동생이아닌,사랑하는사람으로서로를바라보게된것이다.
1968년12월22일,학기말시험을마치고함께연세대백양로를걷던중영우가내게사랑을고백했다.나도그를무척좋아한데다남은생을시각장애인교육에헌신하려고준비해왔는데그를반려자로맞으면남편에게맹인동생을이해해달라고할필요도없으니잘됐다고생각했다.나는영우의사랑을받아주었다.아무에게도알리지않은채장래를약속한우리두사람은너무나행복했다.
우리두사람은비밀리!에약혼식을올렸다.무남독녀외동딸을둔홀어머니가애지중지기른딸을맹인에게준다는것은청천벽력과같은소식이었을것이다.어머니는"절대로안된다!"며반대하셨지만결국딸의고집을꺾지못했다.
친구들은더심했다.어떤친구는다시한번내얼굴을쳐다보며관상을보면팔자가그렇게센것같지는않은데하느님이해도너무하셨다".아무리공부를잘하고학벌이좋으면뭐하니?너는좋아서결혼한다해도그사이에서태어나는자식들을생각해봐.아버지가장님인데”하고말렸다.
주위의반대에도불구하고1972년2월26일,대학생이던약혼자를졸업하기까지만3년이나기다린끝에드디어나이서른이다되어결혼식을올리게되었다.난다른친구들에비해결혼이늦은편이었고,모두판사,의사,약사,대기업간부의부인이되어있을때연하인맹인학사를신랑으로맞은것이다.그래도어찌나행복하고감격스러웠는지,얼굴에서미소가떠나지않아하객들의놀림을받을정도였다.
맹인아내로서내가겪은고통1972년8월,우리부부는가슴에큰뜻을품고LA로가는비행기에올랐다.당시에는장애가해외유학!결격사유에속했다.그항목을삭제하고한국장애인최초정규유학생이될때까지반년동안겪은마음고생은말로표현할수없을정도다.결국피츠버그대학교9월학기개강을일주일정도앞두고한미재단총재와연세대총장이공동으로제안한청원서에문교부장관이서명함으로써미국유학의가장큰장벽을무너뜨릴수있었다.
LA에도착해여러해동안그의학비와생활비를지원해주신양부모님을만나일주일을보내고피츠버그에는개강전날도착했다.당시나는정신적,육체적으로많이지쳐있었다.서울을떠나기직전까지맹인재활센터에서일했고,입덧도심했다.그러나그를그림자처럼따라다니면서돕지않으면강의실에도갈수없어편하게쉴수도없었다.
하루는남편을강의실에들여보낸뒤도서관에서책을녹음하다깜빡잠이들었다.정신을차리고보니이미강의가끝난지30분이상지난시간이었다.온힘을다해강의실로뛰어가보니불안한모습으로나를기다리고있었다.“여보!"하고부르자안도의한숨을내쉬면서도어디갔다가이제왔느냐며화를버럭냈다.
나는미안하기도했지만,항상잘하다가한번실수했는데그것도이해하지못하나싶어섭섭한마음에말다툼을하게되었다.그것이미국에와서처음한부부싸움이었다.
그일을계기로남편은보행훈련을받았다.아기가태어나면혼자강의를받으러다녀야하는데엄두를못내고미루던차에결단의기회가된것이다.하지만아무리보행훈련을받아도자주다니지않은곳이나생소한지역을갈때는여전히정안인의도움이필요하다.그러니까보행훈련을받아나에대한의존도가다소줄어들기는했지만,여전히나는그를안내해주어야했다.
어린두아들을남에게맡긴채남편의대학원강의실을향해떠날때,아이들이안쓰럽기도했지만,남편의강의가먼저였다.맹인아빠에게젖먹이아기를맡기고도서관에자료심부름을갈때면혹시불이라도날까불안했지만그의눈이되고지팡이가되는것이먼저였다.
몸이아플겨를도없이매일동분서주하는고달프고바쁜나날을보냈다.그후새로운위기가찾아왔다.수업료는문제가없었는데,생활비로나오던장학금이만료된것이다.닥치는대로막일이라도해서생활비를벌어야했기에일자리를찾아나섰다.병원청소원으로겨우취업이되었는데이민국에서노동허가가나지않았다.
이때문에고민하던어느날,캠퍼스근처공원에서그네를타는한맹인여성을우연히보게되었다.남편과함께다가가한국에서유학온맹인학생이라고소개하면서말을걸었다.그랬더니그네를밀어주던남자가자신이남편이라고했다.
과부가과부사정을안다고,우리사정을이해할것같아서초면에우리형편을털어놓았다.그부부는우리에게자기집3층을내줄테니와서함께지내자고했다.대신식사후설거지를해주고,두내외가외출할때어린두자녀를돌봐달라고했다.남편이박사학위를받을때까지가족의생계가해결될수있을것같아,생각할것도없이제안을받아들였다.
그집에살면서매일설거지하고아이들을돌봐주는일을해도행복하기만했다.남의집에서식모살이한다고생각하지않고머지않아박사가될남편을내조한다고!생각했으며,그러한기회를주신하느님께감사했기때문이다.
행복은주관적인느낌이라고생각한다.객관적으로볼때남의식모살이나하는처지가행복해보이지는않았을것이다.그러나나는그때가오히려아파트에살때보다더행복했다.우리와처지도같고동년배라아주좋은친구가되었을뿐만아니라미국문화를배우는계기도되었다.
또두살된진석이도네살,다섯살이던그집아이들과친구가되어많은것을배울수있었다.그때둘째아이진영이가생겨더욱감사한마음이었을것이다.
“고통속에서도절대좌절하거나울지않았다"
나는남편이맹인이기때문에불행하다고생각해본적이한번도없다.우리내외는출세지향적이아닌,성취지향적가치관을가지고있어맹인이기때문에넘어야할물리적,심리적,법적,제도적장벽을넘을때마다오히려성취감을느꼈다.또쾌락보다는보람을추구했기때문에어려움을극복할때마다승리감과보람을느끼며감사할수있었다.
1976년4월25일,남편이드디어피츠버그대학교에서박사학위를받았다.대학당국의배려로박사복을입은남편을총장앞으로안내하면서느낀보람과!행복이란….
“마음껏사랑하고즐긴것은결코잊히지않으며,자신의일부분으로남게된다"는헬렌켈러의말이생각났다.
물론아무나맹인의아내가되어어려운내조를하면서보람을느낄수있는것은아닐것이다.그러나나는그의지팡이가되어,때로는희생을요하는힘겨운내조를할때도그일을사랑하고즐길수있었다.그래서그의성취를나의성취로,그의성공을나의성공으로느낄수있었을것이다.
나는비록학사복을입었지만,남편이받은박사학위가나자신의성취인것처럼느껴져더행복했다.어려움이닥치고고난이겹칠때도마찬가지였다.그렇게도고대하던박사학위를받고도남편은고국에돌아가대학강단에설기회를얻지못해무직자로8개월을보내기도했다.
맹인이어떻게눈뜬대학생이나대학원생을가르치고논문지도를할수있겠느냐며,어디에서도남편을채용하지않았다.무직자인박사남편,아직어린진석이,갓태어난진영이,그리고나.이렇게네식구가당장길거리에나앉을형편이었다.장학금으로지급되던생활비가졸업과동시에끊긴것이다.하지만나는!절망하지않았다.
졸업과동시에만료된유학생비자를다시살리기위해남편이포스트닥터럴프로그램에들어갈때의일이다.오도가도못하고막다른골목에배수진을친남편의고통을너무나잘알기에나는오히려담대하게말할수있었다.
“여기까지인도하신하느님께서는반드시현재의고난을성공의조건으로바꿔주실테니인내하며좀더기다려봐요.부디아무걱정말고연구에몰두하고직장찾는노력이나계속하세요."
지금도남편은당시자신의고통을함께하면서그러한위로와격려의말을해줄때가가장고마웠다고말한다.하루는나의격려가통했는지남편이면접을다녀오더니취직이되었다고했다.기적이었다.그동안여러차례면접을보았지만번번이영주권이없어채용되지못했는데,이번에는일단학생비자로취직이된것이다.남편은인디애나주정부교육부에근무하게되었다.
1월3일첫출근을하게되어서둘러인디애나로이사를가야했다.인디애나에도착해남편의첫출근과함께나는운전을시작했다.그리고벌써30년이흘렀다.무엇보다감사한것은,그동안무사고운전으로남편을도울수있었다는것이다.남편은인디애나주정부교육?!恝?근무하면서,저녁에는노스이스턴대학원에출강하기도했다.그뿐만이아니다.로터리클럽회원으로매주주회에참석하는것을비롯해왕성한사회활동을했다.그때마다나는운전사역할을해야만했다.어쩌다병이라도나서내가누워버리면일상생활의리듬이깨질텐데,다행히도그런기억은없다.아마도내조하는기쁨과학생들을가르치면서느끼는보람이엔도르핀을나오게하지않았나싶다.
나는그대의지팡이,그대는나의등대
남편이인디애나에서직장생활을한지2년가까이되던1987년9월,유학을떠난지6년만에처음으로고국을방문하게되었다.그때한국언론은’우리나라최초장님박사탄생’,"한국최초맹인박사금의환향’등의제목으로남편의귀국을대서특필했다.
그때그기사를본연세대윤형섭교수가"조선일보"에’평균점수’라는제하의칼럼을썼다.내용인즉슨,앞못보는장님이박사가되었다기에기사를읽어보니그뒤에는남편의유학뒷바라지를하며석사학위교사까지된부인의희생적인사랑과내조가있었음을알게되었으며,이는한국여성의평균점수를올려주었다는것이다.
1983년6월5일은남편이최초로국제무대에등단한날이다.캐나다토론토에서열린국제로터리세계대회에서그가연설을한것이다.23년이지난오늘도나는그때의감격을잊을수가없다.1만6000명의세계민간지도자가모인단상으로남편을안내하는데,연설자도아닌내가극도로긴장해떨기까지했다.그런데그는수많은군중의시선을볼수없어서인지,그다지긴장하지않고연설했다.그리고남편은열광적인기립박수를받았다.
미국연방정부공무원은450만명에달한다.그중2500명이대통령의임명을받으며,그중500명은상원인준까지받아이름앞에’Honorable’이붙는다.먼이국땅에유학와서이민자로정착한지사반세기만에남편은’Honorable’이라는경칭이붙는연방정부최고공직자가되었다.대통령직속국가장애위원회정책차관보자리에오른것이다.그의지팡이가되어부시대통령앞으로그를안내할때느낀감회는지금도잊지못한다.불쌍한맹인중학생을안내하기시작한지40년,이젠명예로운자리에서게되는자랑스러운남편을안내하면서느끼는감회를어떻게말로표현할수있을까?
이렇게우리부부는서로의강점으로약점을보완하는하나의팀으로서아메리칸드림을이루게되었다.1972년신혼부부로미국땅에도착할때태중에있던진석이는링컨대통령의장남로버트토드와필립스엑서터아카데미,하버드대동문이되었다.그리고안과의사의꿈을이루어듀크대학병원에근무중이며,산부인과의사인아내를맞았다.
작은아들진영이는필립스앤도버아카데미출신으로부시대통령부자와동문이다.약관27세의나이로연방상원법사위원회에서리처드더빈상원의원입법활동을보좌하는고문변호사이며,아내역시하버드법대를졸업하고변호사로활동중이다.
그리고나는이처럼이민자로미국땅에와서교육자의꿈을이루었을뿐만아니라,미국교육인명사전,미국여성명사인명사전에올라역사속에작은흔적을남기게되었다.
지난2003년5월29일,내생일에아들며느리가한자리에모였다.케이크를앞에두고축하노래를부르려는순간남편이말했다.“아들,며느리네명의박사가생일축하노래를부르니당신정말행복하겠소."진영이가웃으며덧붙였다.“네명이아니라다섯명이잖아요."
그렇다.한집에다섯명의박사가있는것이다.그러고보니그의지팡이가되어헌신적인아내로,두아들을잘키워훌륭한며느리들까지본어머니로살아온나자신이자랑스러웠다.이처럼선명한비전으로내인생을인도해신앙안에서명문가를만드는동반자가되게해준남편에게경의를표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