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隨想>朴正熙가10년만더살았더라면
歷史에假定이란있을수없는일이라지만,매년이맘때면나는홀연히생각나는사람이있다.바로朴正熙前대통령이다.
사람마다朴正熙대통령에대한視角이다르고,또생각나게하는모멘트도각각이겠지만,필자는언제나陽曆설(新正)을지나고얼마있다가또陰曆설(舊正)을맞을때마다,그가幽明을달리한지어언30년이흐른지금에도이맘때면어김없이그를생각하게됨은왜일까.
朴正熙라는사람이한10년만이라도더살았더라면,아니그자리에10년만더있었더라면,지금우리주변에서아무렇지도않게벌어지고있는일들가운데적어도다음몇가지는이미오래전에우리곁을떠나자취를감추었을것이란생각때문이다.자취를감추게될대표적인경우가바로양력설다음에음력설을연달아쉬는소위‘二重過歲’의弊習(폐습)이아닐까싶다.
둘째로는시도때도없이마구잡이로날라드는‘結婚請牒狀’도틀림없이자취를감추었을것임은물론,
셋째로는이건좀자신이없는일이긴하지만,그래도책이고신문이고거리간판이고간에‘한글’로도배를한이런식의‘한글專用主義’가완전히뿌리내리지는못했을것이란사실이그것이다.그가‘10년만더살았더라면’하는필자의강렬한아쉬움은바로이런데연유한다.
1961년5월,소위‘5.16政變’(혁명인지쿠데타인지잘몰라이렇게부르기로한다)이일어나고,당시朴正熙를首班으로하는軍部가제일먼저들고나온改革조치가바로陰曆을陽曆으로,檀紀를西紀로뜯어고치는일이었다.반만년역사상이얼마나위대한革命的課業이라아니할수있겠는가.
오랜세월우물안개구리격으로살아온한국인의전통적삶의儀式을세계공통의公準에맞추고자한이런개혁조치는5.16과같은혁명정부가아니고서는처음부터엄두도낼수없는일이었다.그후軍政에서民政으로넘어온이후에도朴正熙정부는改革드라이브를늦추지않았다.그의逝去당시인1979년경에는이미都市지역을중심으로해서는陽曆過歲가굳건히자리잡아가고있었다.다만傳統을重視하는農村지역에서는쉽사리그렇게변해가지못하고있을뿐이었다(필자는1970년대중반本人및가족의生日을모두陽曆으로바꾸고陽曆過歲를하기시작하여지금에이르고있다).
그러던것이1980년대초全斗煥新軍部는‘民意’라는허울좋은파퓰리즘에떠밀려잘나가고있는기존의양력과세를다시음력과세로되돌려는어처구니없는過誤를저질렀다.아마도朴正熙가10년만더살았더라도陽曆過歲는이미탄탄히뿌리를내린다음이었을것이고,그랬더라면그후에는그어떤사람이와도다시는陰曆過歲로되돌아가는反動的인일은없었을터인데말이다.
하루의시작은아침(起床)이요1週日의시작은월요일이며1년의시작은正月초하루다.1년의시작을알리는正月초하루가한해에두번씩이나존재해서야되겠는가?2009년(新正)正初를기리는年賀狀에버젓이“己丑元旦”이란舊正日附를적어보내는경우가茶飯事로된세상이다.己丑元旦을맞으려면아직한달이나남았음에도말이다.
어디그것뿐인가.지금火葬비율이절반을넘어선마당에아직도그옛날埋葬文化시절의風俗이라할祖上에대한祭祀(차례)지냄이설날행사의주된내용으로되고있음도모두음력과세전통과무관하지않을터인데,이역시양력과세로돌아섰더라면지금쯤상당히자취를감추지않았을까!
2009년과己丑年을구분하지못하는이정신상태,이것이야말로오늘을살아가는한국인의二重的의식구조,다시말해精神錯亂현상을가져오는主犯이아닐까?말과행동이다르고,겉다르고속다르며,오나가나義理不同한짓거리를밥먹듯하는이런二重人格的인한국인의행동양식은年初부터사람들의머리를헷갈리게하는이二重過歲의보이지않는弊端때문이아닐까?아무튼지구상에서양력/음력으로二重過歲를하고있는나라는영광스런(?)大韓民國밖에없다는사실을명심할지어다.
朴正熙가10년만더살아있었더라면우리눈앞에서사라졌을두번째현상은그가생전에힘주어추진하던“家庭儀禮準則”과관련된다.1973년당시朴正熙정부는家庭儀禮準則을공포하고,虛禮虛飾을없애고자冠婚喪祭간소화조치를단행했다.婚禮의경우約婚式이나함잽이(?)등의절차를없애고특히중요한것은請牒狀발부를금지시켰는가하면,喪禮의경우에는屈巾祭服의착용이나喪輿(상여)사용등을금지시킨일,그리고祭禮의경우에는祭主기준으로2代奉祭祀만허용한일등이다.
이것도1980년대全斗煥정권에와서유야무야되었지만,만약박정희가10년만더살았더라면오늘날시도때도없이날라드는‘請牒狀’―요즘에는‘삼가모시나이다’라든가,‘weddinginvitation’등의이름으로둔갑―홍수에덜시달리게되었을것이고,또밥술깨나먹는사람들喪家에가보면흔히부딪치는일이지만,좌/우양편으로늘어선수백개의弔花터널을통과해야하는아니꼬움을맛보지않아도되었을것이아닌가.한국인은언제까지이처럼산사람이죽은사람을위해봉사해야만되는가.朴正熙생각이절로나는所以가바로이런데있다.
朴正熙가10년만더살았더라면하는아쉬움의세번째이유는지금과같은‘한글전용’의잘못된문자생활과관련해서이다.1968년에그는주위간사한사람들의꼬임에빠졌다고할까,歷史에길이이름을남기고싶은小英雄主義의발로였다고나할까,아무튼朴正熙답지않게한가지중차대한過誤를범하고말았다.즉모든政府公文書에漢字를추방하고‘한글專用’으로한다는語文政策의일대改惡이그것이다.
그후10여년이지나고한글전용의폐단이백일하에들어나자자신의조치가크게잘못된것임을뒤늦게나마깨닫고,다시이를한글/漢字混用으로되돌리기위한適期를탐색하고있던차에不歸의客이되고말았다는傳聞이다.그의최측근으로부터들은얘기라신뢰성이상당히높다고하겠으나,이어찌나라의語文政策을바로세운다는시각에서痛嘆할일이아니겠는가.
漢字敎育에남다른정열을쏟아온필자로서는,이일만생각하면언제나가슴이저려옴을어찌할수없다.박정희통치18년에가장잘못된治績으로기록될이한글전용주의를結者解之의원칙에서스스로바로잡아놓지못하고떠난것은本人을위해서나나라의장래를위해서나정말안타까운일이아닐수없다.
이밖에도朴正熙가10년만더살았더라면우리주변에서이미자취를감추었을일들은얼마든지더있을것이다.예컨대음식메뉴별로‘食單制’가정착되어선진국처럼‘메인디시’(maindish)중심으로간편하고실속있는食單으로우리네음식문화가바뀌었을것이다.韓定食’이란이름아래상다리가부러지게온갖반찬으로백화점식밥상을차린다든가,손님이음식을반도안먹고내다버리는경우가비일비재하다든가,食堂이란곳이손님을홀의테이블로맞지를않고무조건방구석으로끌어들여방석깔고퍼질러앉아식사하게만드는등의후진적行態는아마자취를감추지않았었을까싶다.
또한都市거리의무질서한상점看板이나장식물,각종廣告板등으로온통누더기가되다시피한오늘의都市風景도일찍암치자취를감추고지금쯤에는깨끗하고질서있는도시모습으로바뀌지않았을까하는생각이다.
끝으로또한가지지적해두고싶은것이있다.朴正熙가10년만더살았더라면,아마도오늘의골치덩어리,北韓의核開發문제도사전에그것을막았거나,아니면南韓도덩달아‘對抗核開發’에성공하여지금처럼북한에질질끌려다니는추잡한일은벌어나지않았을것이란推論을가능케한다는점이다.
(09/01/12李大根ㆍ成均館大名譽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