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 인문학 행사에서 화성 과 정조와 사도세자능 탐방

조선일보사중앙도서관교보문고가합동으로주관하는길위에인문학행사가이번에는’정조의마음을따라가다’란행사로수원의장안문애서부터탐방울사작하여화성서장대화성행궁방화수류정을거쳐용주사와융건릉을탐방하고건국대신병주교수와성균관대안대희교수의해설강의가있었다.

정조의화성건설에대하여

현재화성(華城:수원성)은조선시대성중에서도가장복원이잘되어있다.그리고화성을구성하는각각의건축물은저마다의특정을지니면서화성의가치를높여주고있다.화성은그것이지니는역사상과건축물로서의가치를인정받아199712세계의문화유산으로지정되었다.그런데화성이이처럼완벽한복원을할수있었던데에는화성건축의시말을완벽하게정리한공사보고서화성성역의궤가있었기때문에가능하였다.

1794년,정조는수도권의남쪽요충지인수원에화성(華城)을건설하기시작했다.공사기간이2년여,공사에투입된인원은70여만명,공사비가80만냥에이르는거대한공사였다.정조가화성에깊은관심을가진것은사도세자의묘소인현륭원(顯隆園)을조성한1789년부터였다.사도세자의묘소는원래양주의배봉산(拜峰山현재서울시립대학교자리)에영우원(永祐園)이란이름으로조성되어있었다.그러나그터가좋지않아정조는늘마음이편치않다가마침내천하의명당이라는화산(花山)아래로옮겼다.그러나현륭원이조성된자리는원래수원부의읍치(邑治)가있던자리였으므로수원부의백성을지금의화으로겨살게하고화성건설을시작하였다.1793정조는수원이란이름을’화성(華城)’으로고쳤다.

정조는화성을축조한후그내용을정확히기록보관하기위해화성성역의궤를작성하게했다.이화성의궤는정조가화성의성곽을축조한뒤에그공사에관한일체의내용을기록한의궤이다.화성의축조공사는1794년(정조1)1월에시작하여17969월까지계속되었다.

화성성역의궤는공사가끝난17969월부터의궤를편찬하는작업에들어갔다.국가의주요행사가끝나면이내의궤청(儀軌廳)을설치하고의궤를편찬했던기왕의관례를따른조치였다.화성성역의궤는일단그해119일에초고가완성되었다.이것은80만냥이란거금을투입한대공사의종합보고서였으므로,다른의궤에비해분량이많은편이다.또한조선왕조의문예부흥기인정조대그중에서도가장전성기에속하는1790년대에만들어진책이므로그내용이상세하고치밀한것이특정이다.화성성역의궤는권수(卷首)1권,본문6권,부록3권을합하여총109책으로구성되어다.권수에는화성성역의궤의체제를설명한범례,화성을건설하고의궤를편찬하며인쇄하는데참여한인원명단그리고도설(圖說)즉그림이들어있다.여기에는화성의전체모습을그린화성전도(華城全圖),화성의4대문비밀통로인암문(暗門)햇불을올려호를주고받았던봉돈(隆徵)등성벽에설치된모든시설물들의세부도가그림으로남아있다.또한화성행궁사직단문선왕묘(文宣王l공자의위패를모신사당을말함)영화역(迎華繹)등화성주변의건물이나시설의그림도함께수록되어있다.1975년에정부에서화성성곽의복원공사를시작하여불과3년만에원형에가깝게복원할수있었던것도이그림의설명에힘입은바컸다.

현재우리가200여년이전에벌어졌던정조의화성건설이나화성행차의모습을생생히접할수있는것도바로이의궤때문이다.의궤라는것은의식과궤범’이라는뜻으로.모범적인전례를만들어놓고이를참고함으로써후대에잘못을범할가능성을미연에방지하고자하려는것이의궤를만든주요한목적이었다.의궤는조선시대에국가에서중요한행사가있을때이것을기록과그림으로남긴보고서형식의책으로서,특히의궤에표현된그림들은당시사회의생생한현장모습들을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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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수원시에서는화성행궁의복원공사를시작하여현재행궁건물대부분의복원사업을마친것도역시화성성역의궤에서그려진「행궁전도」와같은그림이있었기때문에가능했다.

정조의화성행차는

1795년윤29일새벽창덕궁을출발하여화성으로향했다.정조가화성을방문하는것은이때가처음이아니었다.정조는1789년에자신의생부사도세자의묘소를수원부(水原府)가있던화산(花山)아래에모시고현륭원(顯隆園)이라명명한이후매년이곳을방문한있었다.그러나1795년은정조에게있어특별한의미가있는해였다.어머니혜경궁홍씨가회갑을맞는해였던것이다.게다가사도세자와혜경궁홍씨는동갑이었으니사도세자가살아있었더라면함께회갑잔치를올려야하는해이기도했다.


정조의화성행차는자신의효심과자기의정치적능력을과시하고싶은마음도있었을것이다.정조는사도세자를모신화성을자주방문하여어버이에대한효심을표현하였다.그러나정조의능행길은현륭원에참배로끝나는것이아니었다.그는화성을오가는길에백성들의민원을살피고이를해결하는기회로활용하였으며지방에숨겨진인재를발탁하여관리로등용했다.또한경기도일대를직접방문하여수도권의방위체제를점검하고수시로군사들을동원하여단체훈련을시켰다.1795년의화성행차는정조가그동안이룩했던자신의위업을과시하고신하와백성들의충성을결집시켜자신이추진하는개혁에더욱박차를기하기위한조선후기최대의정치적이벤트였다.


정조의화성행차는179412월부터준비가시작되었다.제일먼저행시를주관할정리소(整理所)를설치하고행사경비로10만냥을마련하였는데모두정부의환곡을이용한이자수입이었다.환갑을맞이한혜경궁홍씨가장거리여행을할수있도록특별하게설계된가마가2개제작되었고1.800여명의행렬이동할수있는시흥로(오늘날1국도)를새로건설하고,한강을안전하면서도적은비용으로건널수있도록고안한배다리가건설되었다.


이행사에동행한인원은1779명이나현지에미리가있거나도로변에대기하면서근무한자를포함하면6000여명에이르는엄청난인원이었다.그행사는1795년윤29일,창덕궁을출발한정조의행렬은78일간의공식일정에들어갔다.러면이때의행사에는과연떠한것이있었을까?당시화성에서있었던주요행사를날짜별로살펴보면.


새벽에창덕궁을출발한일행은노량진을통해배다리를건너노량행궁(용양봉저정)에서점심을먹었고저녁에시흥행궁에도착하여하룻밤을었다.둘째날에는시흥을출발하여청천평(맑은내들)에서휴식을하였고사근참행궁에서점심을먹었다.점심무렵비가리기시작하였는데정조는길을재촉하였고,이날저녁화성행궁에도착하였다.행렬화성의장안문을들어갈때에정조는갑옷으로갈입고군문(軍門)에들어가는절차를취하였다.셋째날에는아침에화성향교의대성전에가서참배를하고,오전에는낙남헌으로돌와수원과인근의거주자를대상으로한문무과별시를거행하여문과5인,무과56인을선발하였다.오후에는봉수당에서회갑잔치를예행연습하였다.넷째날에는아침에현륭원에참배를하였다.남편의무덤을처음방문한혜경궁홍씨의픔이너무큰것을보고정조는조급하고당황해하였다.오후에정조는화성의서장대에라주간및야간군사훈련을직접주관하였다.화성에주둔시킨5천명의친위부대가동원된이날의훈련은서울에있는반대세력에게엄청난시위효과를보이는것이기도하였다.


다섯째날에는행차의하인어머니회갑연거행되었다.연회장소의좌석배치와가구들의식의진행절차,잔치참가한자손님13명과남손님69명의명소개되었고잔치에쓰여질춤과음악손님게제공되는상의숫자와음식준비었다.여섯째날에는화성의곤궁한주민들게쌀을눠주고오전낙남헌로연을풀었다.서울에서정조와같온관료15명과화성의노인384참가하였는데정조인들의밥상에오른음식이모두같았다국왕의밥상을노인들도함께받은셈이다.양로연을끝으로공식행사는끝났다.이후정조는휴식으로들어갔는데,한낮에는화성의축성상황을확인하기위해방화수류정을시찰하고오후에는득중정에서활쏘기시범을보였다.다음날은서울로출발하는날이었다.정조는오던길을돌아서시흥에도착하여하룻밤을갔고,마지막날에는노량을거쳐서울로돌아왔다.돌아오는길에아버지의묘소가마지막으로보이는고갯길에서정조는계속걸음을멈추며부친과의이별을아쉬워하였다.이후이고개는지지대(遲遲選臺:걸음이더뎌지고머뭇거리게된다는뜻)고개라불렸다.


정조의화성행차에는여러가지뜻이담겨져있었다.먼저동갑인어머니와아버지의회갑이라는뜻깊은해를맞아정조는어머니에대한지극한효성을표시하였다.어머니를모시고아버지사도세자의무덤이있는화성의현륭원(顯隆園)을다녀오기로결심하고대대적인국가행사를준비한것이다.그리고묘소참배와더불어화성의행궁(行宮:국왕이임시로머무르는궁궐)에서어머니의회갑연을성대히치루었다.


이제껏응어리진삶을살아온어머니에게지극한정성을보인것이다.그러나이행차는어머니와아버지에대한효심에그친것이아니었다.정조는이행차를통해왕권을대내외에과시하고자신의친위군대를중심으로군사훈련을실시하고자했으며행차와연계하여과거시험을치루어인재를뽑고가난한백성들에게쌀을나누어주었다.또한직접활쏘기시범을보이는가하면어머니와같은노인들을위해서는성대한양로연잔치를베풀어주었다.그리고무엇보다화성을정치군사경제의중심도시로키워나가려는그의꿈과야망이담겨있었다.그리고행차도중에격쟁(擊錚:꽹과리를두드리며억울함을호소함)상언을통하여백성들의생생한현장목소리를들으며이것을적극적으로수용하였다.


정조는세손시절항시불안감을느끼며갑옷차림으로잠자리에들었을정도로사도세의죽음에깊이관여한노론벽파들에게심한압박을받았다.정조가자신과학문정치를함께인재양성을목적으로규장각을건립한것이나친위부대인장용영(壯)을세운것도독자적인정치기반을갖추기위한노력의일환이었다.그리고마침내화성건설과화성행차를통해자신의정치적야망을실현하고자하였다.

정조는1795년의대규모화성행치를통해자신을짓눌러오던죄인의아들이라는굴레를훌떨쳐버리고자신이구상한개혁정치의완성을보고자했던것이었다.

융릉과건릉(사도세자능과정조의능)에대하여는정조위후,그의아버지인도세자에게생전에다하지못한효를실천하기위해온갖정성을기울였다.그래서우선아버지의묘를옮기는것부터시작하였다.본래경기도양주군배웅산(현재서울동대문구휘경동시립대)있던아버묘를볕이드는지금의자리로옮겨,현륭원(顯隆園)이라이름하였다.리고현에서오리쯤떨어진곳에절하나를지어버지의넋을위로하게했는그곳이바로용주사(龍珠寺)이다.


현릉원에는사도세자와함께그의부인혜경궁홍씨도같이합장되어있다.1815년81세에생을마감한그분을같이합장하고1899년에사도세자가장조로추존될때함께헌경왕후(獻敬王后)로추존되었고묘호도융릉(隆陵)으로정해저그때부터융릉으로부르고있다.


정조가아버지를생각하는마음은여기에서그치지않았다.아버지에대한효성이지극했던정조는죽어서까지도아버지곁에있기를소망하였고그의유대로아버지의무덤옆에정조의묘가축조되었다.그것이건릉(健陵)이다.이두개의왕릉을합쳐’융건릉’이라고부른다.


융건릉은화성의아름답다8개의경치중에서도첫번째로손꼽힌다.양지바른곳에자리해있을뿐만아니라,두개왕릉을감싼기품있는솔숲이있어산책로로도인기다.2009에는유네스코가정한세계문화유산으로인정받았다

<신교수님의글중에서일부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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