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콜 내인생 (2011년 10월 27일자 조선일보)

제가투고한글을조선일보신동흔기자님이인터뷰를하고최종정리작성한글입니다.

한전퇴직후해외봉사로제2의인생찾은양병택(69)씨

지난21일자원봉사자로일하고있는서울청계천문화관에서급하게나를찾는전화가걸려왔다.원예기술을배우고자우리나라를찾은아프가니스탄영농인들이문화관을방문하는데,통역과설명을해줄사람이필요하다는것이었다.내가일하는날(월·수요일)은아니었지만흔쾌히요청에응했다.그분들은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초청으로방한했는데,나는KOICA해외봉사단원으로스리랑카에서일한적이있었다.KOICA초청이라고하니반가운마음이먼저앞섰다.벌써6년이지났지만,당시경험은내인생에서아주큰전환점이되었다.


1998년12월나는30년가까이다닌한국전력에서명예퇴직했다.세상은뒤숭숭했다.IMF외환위기이후’폐업”구조조정”명퇴’같은단어들이연일신문지상을도배했다.당시나는전산업무를담당하는정보처리처의처장으로일하고있었다.아니나다를까우리부서의업무도통째로’아웃소싱'(외부위탁)이결정됐다.명색이부서의장(長)으로서책임을느꼈고,후배들에게조금이라도도움이되겠거니하는생각에명예퇴직을결정했다.


아쉬운마음도컸지만,되돌아보면쉬지않고달려온인생이었다.나는경기도용인에서서울로올라와국립체신고등학교에입학했다.국가에서전액장학금을주는대신졸업후일정기간체신부에근무해야하는특수목적학교였다.모두가가난했던시절이라내가들어갈때입시경쟁률은50대1이넘었다.국립체신고등학교를졸업한후서울중앙전화국에배치됐다.그곳에서야간대학에다녔고,군대도다녀왔다.그리고의무근무기간을채운뒤1969년2월한전에대졸공채사원으로입사했다.그후27년간전산관련부서에서만근무했다.1970~80년대남들보다일찍전산을접한터라지금도IT에는밝은편이다.얼마전에는명함뒷면에’QR코드’도넣었다.


회사를퇴직하고몇달간마음의갈피를잡지못했다.아침에눈을떠도별다른할일이없는상황을처음겪었다.’할일’이필요했다.그래서처음1년은영어공부에빠져지냈다.내가다닐때체신고등학교는기능교육위주여서체계적으로영어를공부하지못했다.마음한구석에늘"제대로영어공부한번하리라"는생각을품고평생을미뤄왔다.늦게시작한대신정말열심히공부했다.학원에다녔고,1년만에미국대학진학이가능한수준까지도달했다.


그때쯤KOICA에서해외봉사단원을뽑는다는공고를보았다.지원자격은21~61세였고,나는만61세까지6개월여가남아있었다.전공과영어·적성검사를거쳤고,외국에서발생할지도모르는사고에대비해가족동의서까지제출했다.그렇게나는KOICA의최고령봉사단원이되어2002~2004년스리랑카에가서’한국·스리랑카직업훈련원’에서컴퓨터를가르쳤다.


KOICA는한국인봉사자끼리어울리는것을금지하고철저히현지에동화할것을요구했다.젊었을때화려함만생각한다면엄두도못낼생활이었다.나는2년을꼬박현지인집에방을얻어자취했다.대학다닐때도해보지않은것을환갑지나서한셈이었다.쌀을사려면수도인콜롬보까지갔다오는데하루를꼬박들여야했다.마을사람들마음을열기위해집집이찾아다니며"한국에서왔다"고알리고,설이면가족사진도찍어줬다.강의를하면서"알아들었느냐"고해도고개만가로저을뿐인학생들을보며답답했는데,그나라에선’예스’나’노’나모두고개를젓고다만거절이나부정할때는고개를더빨리젓는다는사실을뒤늦게알게됐다.그들과생활하면서행복은물질적풍요만이아니라는것을절실하게느꼈다.그리고봉사는남을위하는마음에서출발하지만결국은자기자신을위한것으로귀결된다는깨달음도얻었다.


귀국후지금까지일주일에2~3차례씩자원봉사를핑계로청계천에나가외국인들에게서울을소개하고있다.틈틈이크고작은’새로운도전’도시도하고있다.퇴직후취미를붙인마라톤은몇차례완주에성공했다.지난2007년에는안나푸르나등반을시도,베이스캠프(해발4130m)까지다녀왔다.어린시절아버지가우리형제의손을잡고걸어다녔던서울~용인의160리길을한번뛰어보자는생각에혼자100㎞를쉬지않고달려보기도했다.요즘은외발자전거타기에흥미를느끼고있다.


젊은이들에게’내삶은어떤가’라고묻고싶다.나이는중요하지않다.무엇으로그삶을채우고,무엇에도전하고있는가가더중요하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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