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食씨, 밥 먹읍시다”

항상밝은표정으로사람을잘웃기던K여사가언제부터인지점점표정이어두워지고말수가줄어들더니우울증으로인해정신과치료를받기에이르렀다.10여년간지방근무를하던남편이정년퇴직과함께집으로돌아오면서부터다.병의원인은하루세끼를모두집에서먹는’삼식(三食)이’남편의밥시중을들면서생긴스트레스로판명났다.

K여사남편은그동안의고생을보상받으려는듯"이젠마나님수발을받으며여생을느긋하게즐기고싶다"며은근히압박했다.K여사는남편의마음을어느정도이해하지못하는바는아니지만,막상당해보니하루세번밥상을차려올리는것이간단치않더란다.아이들을다키워서떠나보내고홀가분한노년을즐기려던참에발목을잡힌것이다.수십년간’일식(一食)이’나’이식(二食)이’와사이좋게지내다어느날갑자기나타난’삼식이’남편이어색하고불편해서상당한스트레스를안겨주는것같았다.

옛날어머니들이들으시면’호강에넘쳐서벼락맞을소리’라고불호령을내릴만하지만실제오늘을사는우리60대여성들에겐’삼식이’남편이심각한문제다.어떤재혼(再婚)부부는"그놈의밥때문에멀미가나서곧이혼해버렸다"는얘기도들렸다.’삼식이’남편을어떻게지혜롭게다독거려가정의평화를유지하느냐가정년후남편을맞는주부들의최대고민거리이다.

내가마흔넘어서뒤늦게공부를더한다며감리교신학대학원에입학했을때의일이었다.집에서살림하고아이들기르면서신문과여성잡지,베스트셀러책몇권을읽는게고작이었던내가대학원수업을따라가기는역부족이었다.그때까지듣도보도못한생소한학문인조직신학,성서신학,실천신학개론서에영어로된원서(原書),그리고그리스어까지배워야했을때의아찔함은지금생각해도등에서진땀이흐른다.겁없이덜컥입학은했지만,갓대학을졸업한젊은이들과의힘겨루기는매번KO패로끝나는어이없는싸움이었다.그러자니밤10시가넘어야도서관자리에서일어나는날이다반사였다.늦은밤에내실력부족을뼈아프게절감하면서귀가하는날은유난히더배가고팠다.

그날도바로그런날이었다.현관문을여는순간,밥타는냄새가사정없이콧속으로들어왔다.모른체하며방으로들어와책가방을던지니,남편이아랫목에묻어둔밥그릇을꺼내고밥상을차렸다."배고프겠다.빨리먹어,나이들어공부하려니기운이달리지?"그한마디에기어이눈물한방울이떨어지고말았다.한참밥을먹고있는데,큰아이가다가와소곤거렸다."엄마,오늘은아빠가회사에서늦게오셔서빨리밥을짓느라고다태웠지뭐예요.그래서우리는노란밥을먹었고,아빠는물부어서누룽지를잡수시고,엄마밥만겨우하얗게뜬거라고요."그렇게남편이차려주는밥상을몇번받은일은지금까지도소중한기억으로남아있다.

며칠전,저녁무렵에남편으로부터전화가걸려왔다.남편은10년전쯤퇴직하고소일삼아시내사무실에나간다.

"나지금집에들어가려는데,당신은뭐해?"

"뭘하기는…."

"저녁짓기싫겠지?"

"말이라고요?"

"그럼,’○○보리밥’집으로내려와."

총알같이나가서남편과오붓한데이트를즐겼다.

‘간큰남자’시리즈에밤늦게들어와밥달라고소리치는남자가있다.그런데요즘은가끔씩(늘그런것은물론아니다)그런’간큰남자’를보고싶다.칠남매의맏이로지금까지형제들을보살피고,직장에서의어려움도내색하지않고꾹꾹참으며열심히일하다가양쪽눈에백내장으로실명(失明)의위기까지겪었던남편이다.이나이가되고보니,마음깊은곳에서존경심까지생기려고한다.어찌내남편뿐이랴.더어려운환경속에서도묵묵히가정을지켜온수많은우리의갸륵한남편들도마찬가지다.

젊은이들에게밀려나점점어깨가처지는것도안쓰러운데하루종일집에같이있는날이면"점심은밖에서시켜먹자"며오히려내눈치를보는것같다.남편과함께하는식사가아니라면주부인내가점심상을제대로보겠는가.혼자라면그냥냄비를들고와서비벼먹든지,김치도썰지않고쭉찢어먹든지했을것이다.평생솜씨없이차리는밥상일망정군소리없이먹어주는남편이고마울따름이다.덕분에나도덩달아갖춰먹게되니말이다.

오늘점심에는멸치와다시마국물에국수말아서김치송송썰어얹고,며칠전에먹다남은양념불고기를고명으로올려서밥상을차려야겠다.그리고목소리도명랑하게남편을부르리라."삼식씨,밥먹읍시다."

전신현개포감리교회협력목사(2011년11월23일자조선일보에서발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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