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희망으로 쏘아올린 그녀, 김해영 님의 이야기

김해영(46)씨의키는145㎝다.그가난쟁이가된것은여자라고아버지가내동댕이처서척추장애가생긴탓이란다.

그런신체적약점속에서도83년전국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금메달을땄다.2년뒤엔미국에서열린세계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기계편물부문세계1위를했다.


사회봉사에눈을돌리게되어그는90년한선교단체를따라아프리카보츠와나에있는’굿호프직업학교’편물교사로자원봉사를시작했고그리고전문성을갖춘사회봉사를해보겠다는욕심하나로2004년9월미국뉴욕의나약칼리지에입학해사회복지학을전공했다.2009년8월엔컬럼비아대사회복지대학원석사과정에입학해지난해5월졸업했다.그에대한인터뷰기사가오늘조선일보에있기에스크랩하여올린다.———————


첫아이가딸이라화가난아버지는만취해아이를방바닥에내던졌다.척추를다친갓난아기의키는더디자랐다.공부는초등학교가끝이었다.아버지의자살,정신질환을앓는엄마대신동생넷을키우기위해남의집살이를시작했다.겨우열네살이었다.

"세상은내게좌절을권했지만나는희망을찾고싶었다"고김해영(47)은말했다."대학가기위해공부한게아니라,살기위해공부했다"는그녀다.직업훈련원에들어갔다.배움에목마른소녀는뭐든악착같이배웠다.편물기술로전국기능대회를휩쓸었다.1985년에는세계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기계편물부문1위를차지했다.아프리카남부의작은나라보츠와나로간게스물여섯살때다.어린시절의자신처럼아무희망도없는아이들에게기술을가르쳐주며꿈꾸게하고싶었다.14년동안보츠와나직업학교에헌신한그녀는,미국나약(Nyack)대학을거쳐2009년미국컬럼비아대학국제사회복지대학원에입학한다.주인집창문너머교복입고지나가는아이들만보면눈물이솟았던’열네살식모’는이제세계를무대로활약하는국제사회복지사가됐다.

5일서울한남직업전문학교(현중부기술교육원)에서김해영을만났다.그녀가처음편물기술을배운학교다.김해영이책한권을내밀었다.’청춘아,가슴뛰는일을찾아라'(서울문화사).스승인컬럼비아대학교모이라커튼교수의권유로그간의살아온이야기를책으로엮었다고했다.커튼교수는추천사에이렇게썼다.’그녀는장애를부정적인방식으로정의하지않고오히려많은사람들에게공감을불러일으키는의미있는인생으로창조해냈다.’134㎝에서성장을멈춘그녀는굽높이가10㎝가량되는구두를신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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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굽이굉장히높다.

"포바이포(4×4)사륜구동이다.(웃음)이신발을신고세상을누볐다."

―다리가길어보인다.

"멋때문은아니다.다리가10㎝만더길었으면하는게내소원이었다.의자에앉으면다리가허공에떠서몸이균형을잡지못한다.구두가그10㎝를채워준다."

―몸이얼마나불편한건가.

"오른쪽다리가왼쪽보다1인치짧아서늘기울어진채로서있다.척추가왼쪽으로휘어져있어허리가아프고,20~30m걸어가려면서너번쉬어야한다.통증을줄이려고허리복대를13년동안감고다녔다.앉아있는게힘들다.공부는엎드려서하거나누워서한다."

―책을냈다.

"절망하는20대를위해썼다.자기앞에놓인무수한장애물들을뛰어넘지못할때마다누구의탓으로돌리지말고가장나답게뛰어넘길바라는마음에서썼다.좌절하지말고자기만의인생을만들어가라고말해주고싶었다.20대인그들이’지금’을놓고절망한다면그건공짜심보아닐까.자신의인생에게말도걸어보지않고,살아보지도않고,제값만받으려고하는거니까."

―파란만장한삶이었다.

"쓸모없는딸로태어나시작된시련이었다.(웃음)엄마가정신질환으로운신을못하니아홉살때부터내가집안살림을했다.고물상을하시던아버지는당신이짊어진삶의무게가너무버거워스스로세상을버리셨다.가난,고생다견딜수있었지만엄마가나를미워하는건이해할수없더라.우리집이불행해진게다내탓이라고하시면서때리고구박했다.날낳은친엄마가맞나의심했을정도니까.그런데나이드니알겠더라.엄마는나를핍박함으로써장애인딸을구하려고하셨던거다.갖다버리라는집안어른들로부터엄마는그녀의방식으로나를보호한거였다."

―엄마와화해하셨나.

"어느해명절인가.편물기술자가되어직장생활할때인데,명절음식을담아계속내옆에갖다놓으셨다.먹지않았다.내게엄마에대한정이있을리없었다.그래도계속음식을바꿔서담아내오시더라.손도안댔다.아침부터밤여덟시까지그실랑이가계속된셈인데,내가졌다.눈물이펑터지더라.2시간을울고나서부침개를먹었다.정말맛있었다.(웃음)엄마가나를사랑한다는걸깨닫는데24년이걸린거다.그때결심한게있다.나를낳아준엄마의마음을아는데20년이넘게걸렸다면,앞으로내가살면서만날수많은사람들이내마음을몰라준다고해도원망하거나불평하지말자는거였다."

오늘까지만살고죽자

―배움에대한욕심이상당했다.

“중학교에입학한친구가영어책이라며보여주는데울컥했다.(웃음)‘Iamagirl.Youareaboy’라고읽는거라며가르쳐주길래,두번째월급받은날서점에가서‘국어완전정복’과‘영어완전정복’을샀다.마침내가일하던집이한의원이어서곳곳에한자가적혀있었다.무슨뜻인지궁금해했더니주인할머니가천자문책을주시더라.그때시작한한자공부가사서오경까지이어졌다.그때나지금이나책을읽을때나는정말행복했다.책속의세상은바르고아름다웠다.‘잘못한것을알고도고치지않는것이더큰잘못’이란글귀가좋더라.아버지와엄마에대한미움과증오,슬픔의감정들도책을읽으면서치유했다.공부를왜해야하는지,어떻게살아야바르게사는것인지책이내게가르쳐주었다.”

―식모를그만두고직업훈련원으로갔다.

“반상회보에무료직업학교훈련생모집이라는광고가났다.기술을배우면식모월급3만원보다는많이벌겠다싶더라.양재를배우고싶었는데그건경쟁이치열하다고해서기계편물로지망해6개월간배웠다.”

―기술을배우면서검정고시도치렀다.

“그때는중졸,고졸이라는학력이무척갖고싶었다.(웃음)낮에는기술배우고밤에는야간학원에서검정고시를준비했다.책상이높으니의자에책을몇권깔고앉아공부했는데,앉은자세로있으면허리에통증이심해져집에돌아가두시간씩울었다.그래도좋았다.무언가를새로배울땐내가살아있는것같았다.육체적고통도잊을수있었다.”

―국내외기능대회를섭렵했다.1983년전국장애인기능대회,1984년전국기능대회편물분야에서금메달을땄고,1985년콜롬비아에서열린세계장애인기능대회에서우승을차지했다.

“손으로뭔가를하는일에서는뒤처진적이없는것같다.허리와다리가약한반면손의힘이상대적으로발달했다.뭘새로배우는걸겁내지않았다.음식을만들어도빠르고정확하게한다.오래서있으면허리가아프니까뭐든빨리빨리다.(웃음)”

―책에는직업훈련원다니던시절신앙을갖게됐다고적혀있더라.

“아버지돌아가셨을때에도울지않았을만큼내마음은닫혀있었다.직업학교들어갈때종교를쓰라기에‘자신교’라고썼을정도다.(웃음)세상에나밖에믿을사람이없었으니까.그런데학교에와보니나를위해걱정해주고내앞날을염려해주는사람들이있더라.부모님도걱정해주지않던내앞날을말이다.하나님을믿어서가아니고,나에게관심을가져준그들이고마워교회를따라다녔다.(웃음)”

―포기하고싶을때는없었나.

“매일매일포기하고싶었지.(웃음)심지어친구들걸음속도를못따라가혼자뒤처질때도죽고싶었다.하지만내가죽어없어져도세상은돌아가지않나.내가죽어서도저별이빛날것같으면무슨소용이냔말이지.그래서결심했다.좋아,죽을때죽더라도오늘까지만살고죽자!”

내가원하는곳이아니라…

1990년김해영은아프리카극빈국중하나인보츠와나로떠난다.한선교단체의회보에실린광고를보았다.보츠와나직업학교에서편물교사단기자원봉사자를모집하고있었다.자타가공인하는기계편물의장인으로마음만먹으면월급많이주는직장에취직할수있었지만그녀는모든것을버리고아프리카로간다.“그곳에는나처럼비참한어린시절을보내고있는아이들이있었어요.약간의기회와교육과격려가있다면얼마든지훌륭하게성장할청소년들이있었어요.”

―사서고생하기를좋아하나보다.

“실은대학에가고싶어학력고사를봤는데연거푸떨어졌다.실의에빠져있던차에우연히거창고등학교교장선생님이쓰신글을읽게됐다.‘직업선택십계명’이란제목인데‘아무도가지않는쪽으로가라’‘한가운데가아니라가장자리로가라’‘내가원하는곳이아니라나를필요로하는곳을택하라’는구절이가슴을파고들더라.황무지보츠와나가나를필요로한다는확신이들었다.”

―칼라하리사막의‘굿호프(GoodHope)’라는곳이었다.

“우리나라50~60년대풍경이었다.전기도,전화도없고도로포장도안된오지였다.사막한복판엔흰색의일자건물이덩그러니놓여있는데암담하더라.오전에는수업하고오후에는교사학생모두삽과곡괭이를들고일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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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막심했겠다.

“처음에만.먹을게없어서배고플때제일힘들더라.하지만나는굿호프에서행복했다.‘Youaresobeautiful’이란말을거기서처음들었으니까.(웃음)키작고볼품없는나를그들은예쁘게봐주고오히려도와주고싶어했다.세면장,싱크대밑,교실칠판아래에다아이들은나만을위한발판을만들어주었다.기적적으로허리의통증이줄어들었다.”

―당신의무엇이그들을매료시켰을까.

“나의‘잘나지않음’때문이겠지.(웃음)많은이가선교를명분으로들어오지만원주민들에대한고압적인자세,가르치려는태도로수많은오해와갈등을낳는다.나는학교의주인공은원주민학생들이어야한다고생각했다.그림자처럼그들뒤에서있었다.내가옳고뛰어나다는생각을버렸다.한국의제도권교육을받지않은게큰장점이됐던것같다.(웃음)”

―4년만에굿호프직업학교가폐교됐다.하지만당신은그곳을떠나지않았다.

“떠나려고했다.마지막으로짐을싸고있는데편물과여학생다섯명이찾아와계속공부하고싶다고,떠나지말고계속가르쳐달라고매달리더라.꿈을심어준사람들은떠났지만뿌려진꿈의씨앗은자라고있다는걸보고가슴이뛰었다.나를선생이라고믿고찾아와서가르쳐달라고하는아이들이있으니나는이텅빈사막에서계속해서살아야할의미가있었다.다시운영진과이사진을꾸렸고내가교장을맡았다.10년간교장으로일하는동안학생15명이80명으로늘었다.”

―의식주가열악한것은물론,권총강도가성행할만큼위험한지역이라더라.

“어린시절부터온갖험한일을겪으며살아온게서바이벌할수있는힘이돼주었다.(웃음)사막이왜좋은가하면텅비어있기때문이다.죽음같은고독,텅빈땅에서얻는영성이있다.도덕,신앙을떠나생명그대로를경외하고존중하는법을나는그거대한칼라하리사막에서배웠다.비를피할지붕만있으면얼마든지행복할수있다는것을,살아있음만으로나는아름다운존재라는것을사막에서깨달았다.”

무일푼그녀,맨해튼에서웃다

―2004년보츠와나를떠나미국으로간다.

“내가쿨쿨잠만자도학교가저절로굴러갈만큼자리를잡았다.어느날그런생활이마음에안들었다.뭔가를간절히소원하는인생이어야하는데그게아닌거다.잔잔한호수처럼열정과재미가없었다.고생하며살운명이라그런지,어렵고복잡한일이앞에떨어지면그걸즐기며도전하는심리가강한편이다.새로운것에도전하고싶어서미국으로갔다.”

―서른아홉살에뉴욕에있는나약대학교사회복지학과에입학한다.

“뉴욕선교부에계시던목사님이추천해주셔서입학할수있었다.대학에들어가다니,꿈만같았다.엄마의건강도좋아졌고동생들도일가를이뤄살고있으니이제나자신만책임지면되었다.무일푼이었지만맨해튼한가운데서있어도전혀주눅들지않더라.아프리카그거대한사막에서살아나온내가아닌가.무서울게없었다.”

―제도권교육을받아본적이없다.대학공부가어렵진않았나.

“기술연마라는게집중과반복의연속이라학교공부에필요한집중력,학습력은그때이미습득했다.4년내내4.0만점에3.8점을유지했다.결석한번하지않았고리포트를날짜넘겨서내본적도없다.성적우수한학생명단에늘내이름이있었으니까.나의가장큰걱정은학비였다.첫학기학비만4950달러였다.월급없이14년을보츠와나에서살았으니내게돈이있을리없었다.그런데채워지더라.내사정을전해들은교포들이장학금을대주시고,휴스턴에있는한인교회청년들은500불씩모아생활비로보내주셨다.미국에서공부한7년동안등록금이없어중도포기할위기가많았지만그때마다도움의손길이나타났다.그래서내공부는나를위한공부가아니다.가난한나라의어린이들,청소년들에게나를선물로보내려고하시는하나님의뜻이라고생각한다.”

―영어가엄청난장벽이었을텐데.

“직업학교졸업하고용인의편물하도급공장에서일할때내영어공부는시작됐다.(웃음)편물기계옆에영어발음기호를써붙이고보고외우던게엊그제같다.영어에익숙해진건보츠와나에와서다.영어를쓰는나라라아이들을가르치려면맨땅에헤딩하기로영어를배워야했다.그런데영어보다중요한게만국공통어다.생각해보니나는그공통어에능했던것같다.표정과손짓,눈빛이전하는뜻말이다.거기에더진심이담겨있다고생각한다.”

아픔은다이아몬드처럼빛나고

―명문컬럼비아대학원에진학했다.

“다들불가능하다며말렸다.나도기대하지않았는데합격해서믿어지지않았다.이건내추측인데,입학에세이에서높은점수를받은것같다.1994년5월모든사람이보츠와나의굿호프직업학교를떠난뒤나혼자남았을때의이야기로에세이는시작된다.동양에서온장애인여성이아프리카에서14년살다가온것만으로컬럼비아대학에서사회복지학을공부할이유가충분하다고생각해준것같다.감사할뿐이다.”

―컬럼비아대학원까지가서석사과정을밟을필요가있었을까.

“저개발국가일수록네트워크를중심으로일하는것이굉장히효율적이라는것을이미아프리카생활에서경험했다.장애인인데다내세울만한가족적,사회적배경이없는내겐컬럼비아대학만큼확실한배경이없다고판단했다.인턴활동600시간을채워야하고33학점을이수해야졸업할수있는석사향상반과정이라하루세시간밖에못잤지만원없이공부한시절이었다.”

―대학원을졸업했다.현재어떤일을하고있나.

“부탄개발프로젝트를진행하고있다.이르면올가을부터부탄여성들에게체계화된편물기술을교육하게된다.보츠와나에도1년에한번은들어가서아이들이잘자라고있는지살핀다.한국에들어오면제천에있는아동보호시설에간다.소년범죄에연루된아이들을보호하는곳인데상담해주고검정고시특강을해준다.열두살부터스무살아이들에게내얘기를들려준다.아프리카의이야기에아이들은귀를쫑긋세운다.아무리절망적인상황도그걸희망적으로해석하면살아나올수있다는믿음을심어주려고노력한다.”

―긍정하라?너무막연한충고아닐까.

“사람들은나의작은키를치명적인약점이라고생각하지만나는작은키가내강점이라고생각한다.사람들은내가못나고작아서더쉽게마음문을열었다.특히아이들은제키와비슷한나를무척이나좋아한다.저희를내려다보거나위협하지않으니까.(웃음)부탄이든,아프리카든,한국이든아이들이나를필요로하면언제든달려갈것이다.”

―당신을움직이는초인적인힘은무엇일까.

“엄마에게매맞고자란기억,아버지의죽음이내겐다이아몬드다.거기에빚을지고살고있다.행복한것은그냥지나가지만,아픔과상처는지나가지않고그자리에남아반짝반짝빛을내더라.다이아몬드처럼빛나는그상처와아픔의힘으로내가계속살아가고있다고생각한다.아프리카에서생사를넘나든경험은다시미국유학을가능하게한다이아몬드가되어주었다.”

―다시태어난다면곧은등,긴다리를갖고싶겠지?

“물론이다.하지만그래서또놓치는것들이있을것이다.내가견뎌낼만한고통이있다는건축복이다.”

<조선일보why난의김윤덕기자의김영애님의인터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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