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기 정신’

직후인1962년박정희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경기도광주군동부면,지금의하남시풍산동가나안농군학교를찾았다.농촌개척의새바람을일으키는현장을눈으로확인하기위해서였다.간식으로감자와빵이나오자박의장은무심코빵한조각을입으로가져갔다.그러자김용기(1908~1988)교장이손을내저으며말했다."여기서는식사전에꼭’일하기싫으면먹지도말자’고외쳐야합니다."박의장은물었던빵을내려놓고일행과함께구호를외쳤다.

▶1966년필리핀마닐라에서막사이사이상시상식이열렸다.’아시아의노벨상’이라는명성에걸맞게각국사절과손님1000여명이들어찼다.검은정장차림수상자들사이에삼베두루마기입고흰고무신을신은사람이앉아있었다.아시아농부로는처음상을받는김용기였다.그는"농업을통해세상의가난을몰아내고평화를이루는게꿈"이라고연설해누구보다큰박수를받았다.

▶김용기가가나안농군학교를세운1962년우리1인당국민소득은87달러였다.그는아내와아들·딸일가족8명의힘으로동부면야산4만㎡를기름진땅으로일군뒤개척경험을나누기위해학교를열었다.그의집엔온돌을비롯한난방시설이전혀없었다.대신벽을한자넘는두께로쌓고,문을이중으로달고,지붕에도흙을두껍게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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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기는생일상을받아본적이없다."생일은환갑되는해부터사회에공이있는사람만치러주자"는게지론이었다."세상에태어난것이좋은게아니라태어나좋은일을하는것에탄생의뜻이있다"고했다.그는와이셔츠입고넥타이맨적도없다.늘직접디자인한국민복을입었다.1966년10월4일자조선일보는전날가나안농군학교에서열린김용기의차남과장녀합동결혼식소식을전했다.신랑은국민복,신부는치마저고리를입고예물대신악수를나눴다.두쌍결혼식비용2만원대부분이하객에게대접한국수값이었다.
▶근면·절약·봉사의’김용기정신’이서려있는하남가나안농군학교가올해말사라질운명이라고한다.이일대가보금자리주택지구로지정됐기때문이다.토지보상금으로양평야산에새터를사고나니남는돈이없다고한다.50년동안가나안농군학교를거쳐간입소생이70만명.’김용기정신’은이들을통해온사회로퍼져대한민국을일으켜세우는큰힘이됐다.시절이바뀌고먹고살만해지면서가나안농군학교를찾는발길도뜸해지고있다.개척자김용기에대한기억도머지않아사람들머릿속에서사라질지모른다.
(2012년6월13일자조선일보만물상에서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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