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된 숭례문 사진과 동영상 그리고 역사

친구들모임을주선하려니오래된모임이라그런지왠만한곳은다녀왔다.이번에는어디서만날까하다가생각한것이최근에복원된숭례문을한번보고나서남산길을산책하려했다.식사를해결할곳과그리고쉬면서정담을나눌곳을찾아보려고혼자다녀봤다.내맘같아서는남산위를넘어서장춘단쪽으로내려가도산책코스는괜찮겠다는생각을해보지만서로건강상태가달라조정하기기만만치않다.

숭례문에갔더니많은사람들이폼을잡아가며제각기기억을남기기에열중이었고외국인관광객들도많이보였다.모습을화려하게보였다.나도그틈에끼어그곳에모습을사진으로남기고동영상으로도간단하게촬영햤다.부활된모습으로태여났으니예전의전철을밟지않고오래오래이모습을보존했으면하는마음이다.

2013년5월24일

숭례문(남대문)의역사적변천사

숭례문(崇禮門)은조선왕조도성의정문으로청계천과만초천을가르는언덕위에세워져있으며서울성곽8문가운데가장웅장하고규모가커도성의얼굴구실을하였다.숭례문은1396년1월제1차도성수축때세우기시작하였는데,월단(아치)과문루공사에고도의기술과시일이필요하였기때문에제2차축성이이루어진후1396년10월에상량(上樑)하였다.이러한사실은1962년숭례문을해체수리할때“洪武二十九年丙子十月初六日”이라쓰여진상량문이발견되어확인되었다.

그후세종7(1425)에는흥천사의종을남대문에게하였고,세종30

년(1448)에는풍수지리설을따라숭례문의지대를높여남산과인왕산의산맥을연결시켜경복궁을아늑하게껴안을수있도록숭례문을다시건축하였다.이사실은1962년에발견된상량문에‘正統十三年戊辰三月十七日’이라는묵서명이있어세종30년3월17일에상량이거행된것을알수다.

또한성종10(1479)에숭례문이기울어져또다시개축공가추

다가,위태로운지경이아니니그대로두라는왕명으로중지되었다이때옹성을설치하자는논의도있었으나실행되지는않았다.그러나성종실록에는나타나지않으나1962년에발견된상량문에‘成化十五年己家四月初二日’이라는묵서명이있어성종10년4월에개수공사상량이있었음을알수있다.

그이후임진왜란과병자호란에도남대문은무사히남아있다가1962년에본격적인해체수리공사에의해숭례문의옛모습을유지했다.

숭례문현판은양녕대군의씨로전해다.이현판은다도성게가여지지않고세로되어다.이오행사상에따른것으‘예(禮)’자는오행의화()에해당하는글자이기때에불이타오르는모양처럼세워서달았다는것이다.또한강건너관악산이오행의화산에해당되어그불기가도성을위협하게되로숭례문현판을세워아맞불로도성을보호하고자했다는다.그리고례문은도성의정문으중국사신등귀한손님이드나게되므로서서맞이하는예의를춘모으로도해석된다.

숭례문은1934년일제가제정한〈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의해보물제1호로지정되었다.광복후6.25한국전쟁으로석축과건물에많은피해를입어,1952년에피해부분위주로수리되었고,1954년에는단청공사가있었다.1962년에“문화재보호법”이제정공포되면서전국의문화재를다시지정하는작업에따라숭례문은국보제1호로고쳐지정되었다.

이와관련하여19617월부터해제수리를위한준비작업이시작되었고1962년1월부터건물을해체하기시작하여1963년5월13일에준공되었다.

그후2008년2월10일오후8시40분경,방화범채종기의방화로인한화재가발생하여소실되었다.600년가까이이어져오던대한민국의문화유산인숭례문이소실되어국민들에게크나큰아픔으로남게되었다.이에문화재청은숭례문을원형에가깝게복구할계획을수립하여복구작업을벌여2013년5월4일복구되어개방되었다.

이번복원된숭례문에서가장눈에두드러진점은일제강점기직전헐린숭례문육축양쪽성곽이복원된것이다.새로단장한숭례문에는서쪽16m,동쪽53m의총69m성곽날개가다시만들어졌다.

이것은숭례문의’역사성’을최대한온전하게되살려내자는취지에서추진된것이다.숭례문은조선시대외교사절등이왕을만나기위해성안으로들어갈때통과해야했던한양도성의정문으로,양옆으로성곽이펼쳐져있었으나양쪽성곽은대한제국말기인지난1907~1909년사이훼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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