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박정희전대통령의신당동가옥전시구성관련자료인데시인이며소설가이신박목월선생님의글입니다.
박목월,『육영수여사』,자유문학사,1976.
1958년3월중순경햇볕이유난스럽게따뜻한날이었다.어제까지만하여도겨울날씨못지않게을씨년스럽던날씨가하루아침에훈훈하게봄날로변하였다.차분한한복차림의30대부인이장바구니를들고신당동네거리를돌아걸어가고있었다.그부인은중앙시장쪽으로큰길을건너려다가발을멈추었다.복덕방간판이눈에띄었기때문이다.
‘복덕방에라도들러볼까?’
장바구니를왼손으로바꾸어들며발걸음을돌려복덕방으로들어갔다.
“어느정도의집을구하시는지요?”
“글쎄요,뜰이좀넓은집이었으면…”
“그러세요.천만환정도의뜰이넓고싼집이있는뎁쇼.”
부인은약간놀라는시늉을지어보이며환하게웃었다.
“3~4백정도의…”
“그래애요.”
‘그래요’의‘래’에힘을주며복덕방영감이놀라는기색이었다.이처럼우아한부인이3~4백만환정도의집을구한다는사실이,그의직업적인직감과빗나가는의외의느낌을주었던것이다.그제야부인이들고있는장바구니에눈길을돌렸다.
“뒷골목에그럴싸한집이있는데요,가보실까요?”
복덕방노인과그부인이나란히중앙시장맞은편신당동뒷길로올라갔다.
“여긴데요.”
노인이골목끝에있는집을가리키며앞서서대문으로들어갔다.장바구니를든부인은집주위부터살펴보았다.앞과옆으로골목길이나있어앞․옆이탁틔어있는것이우선마음에들었다.안으로들어갔다.잡은처마가무너져내릴정도로낡은일식단층이었으나바라던대로뜰이넓어가슴이후련하였다.더구나정남향이어서봄볕이방안까지비쳐들고있었고대문은동향이었다.
집을둘러보고나오면서부인은값을물었다.
“대지100평,건평30평에450만환이면싼값이죠.”
복덕방노인이말하였다.그러나그분인에게는힘에겨운돈이었다.
“그래요.”
대답하는말끝에힘이없었다.아쉬운듯집을뒤돌아보며고개를끄덕거렸다.장바구니를든그우아한부인은바로육영수여사였다.
충현동집은어둡고습기가차서이사오던그날부터마음에들지않았었다.그러던것을얼마전사겠다는사람이나섰는데가격은320만환이었다.지금복덕방이소개하는집과는아무리계산을하여보아도1백만환이상이부족했다.은행에적금을붓는것이약간있기는하였지만그것으로충당하기에는힘에벅찰것같았다.
다음날여사는예수동생을찾아가서의논하였다.예수동생은돈암동에서살림을하고있었다.
“글세,그런목돈을돌릴수있을지모르겠어,언니.”
언니일이라면알뜰하게보아주는동생은체신부에다니는어느계장의부인에게연줄을대어돈을꾸어주겠다는약속을받았다.여사는4월초순께신당동집을계약하였고5월16일에잔금을치르고이사를하였다.
뜰이넓은집,그것이여사의꿈이었다.새로이사온집의뜰은그꿈을충족시키기에는작은면적이었다.3천평이넘는옥천교동집뜰에비하면몇십분의1도못되었다.그러나단몇그루의나무라도심을수있는뜰을가지게된것이여사는무엇보다기뻤다.
여사는어린시절부터좋아하던품종의화초를가꾸고나무를심었다.앵두나무,유자나무,벽오동,백목련,향나무,단풍,연주나무(보리수),사철나무,홍도,매화,장미,은행나무,라일락,산당화등등을해마다몇그루씩구해다심은것이다.
박장군의서재앞에는라일락을심었다.그향기를남편이좋아하기때문이었다.
여사는또다시집수리에몰두하였다.집수리를하는데도여사의성격이나생활신조가내비쳤다.①최소한도의비용으로,②생활에편리하게,③그리고멋있게집을꾸미려하였다.
수리기간도여유가생기는대로한가지씩천천히손을댔다.우선급한것은무너지려는추녀와썩어내려앉은마룻바닥과부엌을수리하는일이었다.마룻바닥을뜯어내어시멘트로바닥을깔고손수고안한입식조리대를설치하였다.당시는입식조리대가극히드물때여서목수를시켜일부러만들어야했다.부엌일을하면서도남산기슭에서멀리북악까지환하게내다볼수있도록하고,식탁도만들었다.그리고그모든것은‘육영수식’이라고할수있는것이었다.
대문의경우만하더라도육여사의생각에서우러난것이었다.당시만하여도대문이라면두쪽으로만든후한쪽귀퉁이를터서통용문으로사용하는것이일반적인형태였다.그러나여사는세쪽짜리대문의구조를새로창안하였다.한쪽을완전하게열고꼿꼿하게서서드나들수있도록하였다.
“대문을들어서는데머리를숙이며들어가는것이보기에도좋지않고불편할뿐만아니라찾아오는손님에대한예의도아니라고보셨어요.그래서옛날의대문을지양하고세쪽으로대문을크게해달아한쪽만열면누구나자연스러운몸가짐으로드나들수있게여사님께서손수창안하셨어요.처음에는네쪽으로하려했다가4라는숫자를피하려고세쪽대문으로특이하게만드셨지요.그때여사님의놀라운창의력이오늘날주택가에서흔히볼수있는대문으로발전하게된것이아닌가생각해요.당시어떤영화사에서이대문을배경으로영화를촬영하였다면짐작할수있겠지요.”
지금신당동집을관리하는관리인의말이다.
여사는아무리사소한일이라도범상하게보아넘기거나적당하게처리하거나남이한다고해서그대로모방하는일이없었다.무슨일이든철저하게생각하고진행하고마무리지었으며,편리하게새롭게아름답게만들려고노력하였다.
담을쌓게되었을때도마찬가지였다.담을얼마만큼높이쌓느냐그문제를두고도여사는며칠을생각하였다.
“담은단순하게바깥에서집안이보이지않게하거나침입자를막는데만쓰이지않는다고말씀하시며담높이에따라집안의아늑한분위기가마련된다는집과담의조화를생각하신것입니다.”
수리하는모습을옆에서지켜보던사람의회고담이다.
“한번은신당동을방문하였더니집모양이아주달라진것같았어요.베란다가있는쪽이눈에확띄게예뻐보였어요.그래서아주예쁘다고말씀드렸더니집구석구석손본곳을일일이안내하시면서이곳은어떻게고쳤으며저곳은무엇이불편하길래이렇게바꿔보았다고상세히설명하시는데언제건축에대한지식을저렇게갖게되셨을까할정도로전문가적인안목을가지고계셨어요.여사님은무슨일을하든지당신힘닿는데까지연구해서조금이라도더완전하게하려고애를쓰시는분이었어요.”
신당동집에드나들던동기생의말이다.
그해봄은여사에게또하나의보람찬즐거움을안겨주었다.근혜양이초등학교에입학을하게된것이다.
“아버지,학교다녀오겠습니다,안녕.”
“어머니,학교다녀오겠습니다,안녕.”
근혜양은재롱을피우며입학날을기다리고있었다.육여사도첫아이의입학에마음을썼다.(중략)
여사는근혜양을취학통지서에지시된대로장충초등학교에입학시키기로하였다.4월1일근혜양은장충초등학교에입학하였다.자녀에대한여사의교육방침이확립된것도이무렵의일이었다.
부모의지위가높다하여혹은재산이부유하다가하여사회적인특권의식이나우월감을자녀에게심어주는것은민주주의사회에서바람직한일이못된다고여사는확신하고있었다.누구에게나평등하게주어져있는사회적인여건속에서누구나함께사귈수있고누구나저자신의능력으로자기의앞날을개척할수있는,의지와능력과슬기로움을길러주어야한다는것이여사가지닌자녀교육에대한기본적인신념이었다.여사의이와같은교육방침은청와대에들어가서도변함이없었다.(중략)
그해(1958년)6월17일,박장군은제7사단장에서제1군참모장으로전보되어원주로옮아갔다.여사는이사를가지않고가끔원주로내려가서남편의뒷바라지를하였다.남편의지위가올라갈수록여사는교양을넓히고자기완성의충실을안타깝게갈망하였다.알뜰하게살림을꾸려가는것만으로아내로서의의무를다하는것이아니라고믿었던것이다.그리하여여사는고사북동시절에시작하여근영양을낳고키우는동안중단하였던영어공부를다시시작하였다.교재를구입하여단어를외며학원에다녔다.그러나영어공부만은만사에알뜰한여사에게도쉽사리진척이되지않았다.어려운살림을꾸려나가는생활속에서공부에만몰두할수있는시간적여유가없었던것이다.
전축을사들인것도이무렵이었다.생활이안정되는그만큼가정에정서적인윤기를감돌게하고취미와교양의영역을차차넓혀나갔던것이다.
“신당동에사실때전축을한대사셨습니다.별로비싼것은아니었는데도벽지와조화를이루는빛깔을택하여퍽그럴싸해보였습니다.이모님은단순한취미뿐만아니라자녀들의정서교육과한여성으로서의교양을넓히려고전축을사신것같았습니다.주로클래식을들으셨지만때로는<셴>의주제가,‘아이네클라이네나흐트무지크(EineKleineNachtMusic)’같은것도즐겨들으셨습니다.그리고경음악으로서는‘황성옛터’등을많이트셨어요.
조카홍정자씨의말이다.
여사도이제30대의중반기,근혜․근영양을옆에앉혀두고혹은박장군이집으로오게되면온가족이전축에서흘러나오는선율에귀를기울이며저녁한때를즐기는모습을볼수있었다.
포천으로인제로원주로줄곧일선으로만전전하는박장군의생활에비하면여사의생활은안정된것이라고할수있었다.그러나친정어머니를모시고,두딸을키우며살림을꾸려나가는한주부의생활이한가로울수만은없었다.여사는항상바빴다.그런생활중에서도남편에게문안편지를잊지않고꼬박꼬박보냈다.때로는남편휘하의장병들을위문하는일도게을리하지않았다.
섣달로접어들자거리는성탄절분위기에들뜨기시작했다.(중략)여사는저녁무렵부터산기가있었다.남편이일선으로나가고없는집안이허전하게만느껴졌다.이웃에있는산부인과의사를불러서아기를낳았다.아들이었다.(중략)이름을‘지만(志晩)’이라고지었다.신당동집에는아기의우렁찬울음소리와어울려가족들의웃음소리가그칠날이없었다.(중략)
1959년사회의부조리나부정등자유당말기현상이가득찬가운데어두운1950년대의마지막한해를맞이하였다.
회갑을지낸이경령여사는신당동집에서외손녀․외손자의재롱속에나날을보내고있었다.이경령여사의나이이때만63세,육여사는노령에접어든친정어머니를알뜰하게모시고건강을보살펴드리는것이일과의중요한부분이되었다.여사는츰이날때마다어머니를즐겁게해드리려고애를썼다.
“어머니,올해앵두‘낭키’에열매가열릴까요?”
창밖에있는앵두나무를가리키며어머니에게말하는것이었다.‘낭키’는이경령여사가자주사용하는‘나무’라는말의사투리로어머니를웃겨드리려고여사가일부러어머니의사투리를흉내내는것이었다.
“그럼열매가‘낭키’에안열리고어디열리냐?”
이경령여사의대답에모두한바탕웃곤하였다.이와같은여사의태도는훗날청와대에서도한결같았다.
“어머니,‘됙일’안가보시겠어요?”
여사가방독(訪獨)을앞두고어머니를즐겁게해드리기위해건네는농담이었다.‘됙일’은독일의사투리발음이었다.이경령여사는빙글빙글웃으며대답했다.
“왜,내사투리듣고싶어그래?”
그래서가족들은또한바탕즐겁게웃었다.
역시청와대에서의일이었다.이경령여사가전화를받으면육여사가다가와서웃기는것이었다.
“어머니,혹시사투리를많이쓰셔서잘못걸린줄알고저쪽에서전화를끊자고하지않던가요?”
남편에대한배려와는다른뜻에서,어머니에대하여서도걱정스러운일은한가지도말씀드리지않으려는것이여사의생활이었다.이와같은생활신조를여사는어머니를모시는동안철저하게지켰다.
‘혼자해결할수있는일은혼자해결하고,가정안의근심스러운일은나혼자만으로족하다.남편이나어머니를괴롭혀서는안된다.’
7월1일부터박장군은제1군참모장에서영등포에있는제6관구사령관으로전보되었다.객지에서생활하던박장군이아침저녁집에서출퇴근을하였다.육여사는더욱오붓한가정적인분위기속에서자녀들의교육과집수리에골몰하였다.비록1959년이정치적으로여야대립이극심하고소란스러우며사회적으로도불안한한해였지만신당동에서는1960년으로건너가는마지막의안정된조그만디딤돌과도같은해였다.
10월,박장군은자유중국을시찰하고돌아왔다.미국유학이래첫해외여행이었다.
1960년새로운연대의새날이밝았다.지난섣달에돌을지난지만군이걸음마를익히고재롱을피우는나이에접어들었다.신당동박장군댁에서는오붓한단란함속에설날을맞이했다.
그러나시국은3․15부정선거를앞두고긴장과혼란의회오리바람속에밀려들고있었다.
1960년1월1일동아일보에서는‘대각(大覺)․회천(回天)의새해’라는제목의긴사설로써자유당위정자와국민의각성을촉구하였다.
설마하고부질없는희망과기대를간직한보람도없이‘기해년’도속아살아온가운데어름어름보내고또다시행여나하고어렴풋한미련과집념을가지면서‘경자년’새해를맞는다.—-이암․날(暗辣)의장막을제거하고탄로(坦路)를개척하는거국적분발과거족적노력이없을수없다.—-올해는‘선거의해’다.—-2․4파동따위의민주반역적이며위헌적인과오는두번다시되풀이해서는안된다.만약또그런‘치욕의위헌사(違憲史)’를반복하는경우가앞으로생긴다면그때야말로이나라의헌정은그형상조차어느시기까지사라지고말는지모른다.
<동아일보1960년1월1일>
이와같은분위기속에박소장은육군군수기지사령관으로전보되어부산으로내려가게되었다.
정국은날로긴박감을더해가고민심은소란해졌다.
2월4일,자유당대통령입후보이승만,부통령입후보이기붕,중앙선거위원회에등록.
2월7일,민주당대통령입후보조병옥,부통령입후보장면,중앙선거위원회에등록.
2월15일,조병옥박사서거.
2월25일,조병옥박사국민장.
2월28일,민주당부통령입후보자대구유세.부정선거를규탄하는학생데모.
3월15일,선거.
3월15일,마산데모.
4월11일,제1차데모에참가했던김주열군의시체발견.데모확대.
4월18일,고려대학교생데모.
4월19일,학생봉기
고대생의데모에이어19일오전전례없이무자비한경찰의저지에도불구하고많은희생자를내면서국회의사당앞에집결연좌데모중이던약2만명이상의시내대학교및중고교생은11시40분국회의사당을출발,경찰의경비망을뚫고경무대를향하여돌진하기시작하였으나중앙청후문적선동에서M1장총및권총에의한실탄및최루탄을발사하는경찰의결사적인저항으로일대충돌이야기되어수많은학생과경찰관이부상하였다.이데모대는경무대어귀까지전진하여급기야유혈의참극을빚어내었으며육군헌병까지출동하게되었다.12시반현재서울대학교생별동데모대는대법원을포위,3․15선거가합법적이냐불법이냐를대법원장으로하여금해명할것을요구하고있다.
<동아일보1960년4월19일>
4월25일,교수단데모.
4월26일,이승만대통령사임의사표시.
4월27일,대통령사임서정식국회제출,하야.
학생의거가성공을거두고태풍은물러가기시작했다.이역사적인폭풍이불어제치는소용돌이속에서즉자유당정권이3․15부정선거를치르고4․19학생의거가봉기되는그과정속에서박장군의자세는의연하였다.
전군(全軍)90%의이승만,이기붕찬표를위하여공개투표와대리투표를감행하려던특무대에서는‘비둘기작전’이라는해괴한작전으로선거전략을짜고있었다.이작전을독려하려고육군고위층장성이사람을부산에내려보내박장군에게압력을가하려하였으나박장군은호응하지않았다.(중략)
4․19의후유증으로시국은여전히소란하였으나신당동댁여사의생활은예나지금이나다름없이조용한질서속에서흘러가고있었다.
7월30일,박장군은군수기지사령관에서광주제1관구사령관으로전보되었다.세속적으로말하면좌천이라할수있었다.그렇게된경위에대해서는좀장황하지만인용문을들어보기로한다.
당시박장군은군내부의파벌과정치세력의침투를제거해야건전한군기가확립될수있을것이라는의견을역설하고군도이제4․19정신을받들어정군(整軍)을거쳐단결해야된다고갈파했다.그러자당시어느군단장으로있던K중장은이러한박소장을아니꼽다는듯이반박론을펴기시작하였다.
“오늘날군의잘잘못은이자리에참석한모든장성의공동책임이다.군인도인간인이상봉급만으로살수없다는것은하사관으로부터대장에이르기까지매한가지인것이다.하사관은밥그릇으로,장교들은가마니로후생사업을해서살아왔다.후생사업을한것은매일반인데어째서장성급만물러나라는건가.처벌을하려면계급을따질것없이모조리해야한다.그렇지않고선군은붕괴되고하극상이만연되어군은자멸한다.오히려저렇게주장하는장성부터군에서물러나야한다.”
군내부의부패를합리화시켜현상유지로명맥을유지하겠다는가증스러운반박에박장군은결연히K중장을면박하였다.회의분위기는삽시간에험악해지고박소장과K중장의말다툼으로격돌직전에다다랐다.여러장성들의만류로겨우진정은되었으나이날회의는이렇다할수확도없이해산되고말았다.회의가끝나면박장군을불러서인사참모부장취임을수락받으려고벼르고있던최총장은이런광경을보자인사문제를보류했다.
정군기운이차차높아지자정군대상들도반기를들고이에맞섰다.그들은주요공격목표로박정희장군을지목하고갖은책략을짜고있었다.그러나박장군의뒤를아무리밟아보아야비행이없고이렇다할실마리도발견되지않자그들은하는수없이아주한직(閑職)인제1관구사령관으로좌천명령을내려버렸다.이조처는분명정군의강경론을편박장군에대한하나의보복임에틀림없었다.
박장군이인사참모부장에보직되리라던소문을듣고의기충천하던정군파장교들은이번인사에크게반발했다.흥분된그들은그처사의부당성을들어궐기하려고까지서두르고있었다.그러나장본인인박장군은의외로담담하였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이뚜렷한격언을되씹으면서흥분된동지들을오히려무마하기에바빴다.
1960년6월15일,내각책임제헌법통과.
7월29일,민․참의원선거.
8월12일,윤보선대통령당선.
8월18일,장면국무총리지명.
8월19일,국회인준획득.
8월23일,제1차내각구성.
9월12일,제2차내각구성.
이와같은시국은종잡을수없이급변을거듭하며전개되었으나위정자는정치적부패와파쟁,경제적혼란과부정,행정적인무능,사회혼란등으로극도의혼란상을빚어내고있었다.
9월3일,박장군은육군본부작전참모부장으로전보되어서울로올라오게되었다.말하자면영전이라할수있었다.임지가자주바뀌고그기복이심한것은군부내의불안정상태와박장군에대한포폄이극심함을뜻하는것이었다.그러므로영전되건좌천되건마음이편할리없었다.박장군은소용돌이치는‘태풍의눈’을응시하며육본으로나가고있었다.
그무렵이었다.박장군은일주일에한차례쯤가족들을불고깃집으로데려가곤하였다.신당동집의생활로서는불고깃집에가는일이엄청나게호화로운외식이라할수있었다.그러므로아버지의괴로운심정을이해할수없는어린근혜양이나근영양에게는그것이즐거운추억으로남아있게된다.
“아버지는일주일에한차례쯤온가족을데리고불고깃집으로가서불고기외식을시켜주셨어요.그래서우리는주말을무척기다렸고그날을‘불고깃집에가는날’로알고주말이가까워지면즐거워했어요.”
근혜양의추억담이다.
육군본부참모부장으로취임한후박장군의표면적인일상생활은변화가없어보였다.아침에지프를타고육본으로나가고저녁이면집으로돌아왔다.그러나여사는여성특유의,아니면아내만이지니는예민한감각으로박장군의생활에일어나고있는변화를날카롭게직감할수있었다.
아침밥상머리에서나,늦게돌아오는남편을맞이할때나궂어져보이는박장군의얼굴표정에서심상치않은긴장감을느끼곤하였다.그렇다고그것을물어볼수도없는일이었다.
여사도가정적인테두리를벗어난문제에대해서는함부로질문을하거나성가시게하는일을삼가고조심하였다.이것은,
‘남편이무슨일을하든믿고돕는다.’
는그런마음에서였다.
그무렵여사는가정에서의옷차림이나몸가짐에각별히마음을쓰는것같아보였는데그럴만한이유가있었다.
“이모는이모부님앞에서도부부간이면서남앞에나서는것처럼옷맵시에마음을쓰시고몸가짐을조심하시는그런분이었어요.더구나놀라운일은이모부님앞에서맨발을보이시는일이없었어요.반드시버선을꼭신으셨거든요.”
이조카의말대로여사가옷맵시․몸가짐에마음을쓰게되는것은아내의단정한모습이남편에게심리적인안정감을주게된다고믿고있었기때문이었다.그러므로박장군이심각한문제에부딪친듯한기미나괴로워하는듯한눈치가보일때일수록여사는밝은인상을주려고애를썼던것이다.
“주부들이자신의아름다움을가꾸려고화장을하는것처럼흔히들말하고있지만사실은주부의단정한옷차림이나아름다움이온가족들에게밝고평안함을주게되는것이다.”
훗날여사는주부의화장에대하여이런뜻으로말한적이있었다.
그해(1960년)는추위가빨리닥쳐왔다.10월말에한고비의추위가몰려오고11월초순에는일선고지에적설이심하다는신문보도가있었다.
11월9일이었다.밤8시를전후하여신당동집에는젊은장교들이모여들기시작하였다.여사는젊은장교들이이처럼신당동집에모여드는것이미심쩍었으나평소에박장군을따르는사람들이었으므로별밤다른관심을두지않았다.
박장군의서재가좁아그들은응접실로대용하는마루에모여앉았다.8평미만의마루에영관급장교10명이둘러앉고보니온집안이그득한느낌을주었다.젊은장교들의긴장된음성이마루에잇달아붙어있는안방까지울려왔다.
이신당동회합이야말로박장군을지도자로추대하고혁명적인방법에의하여‘기울어가는조국을재건’하고자다짐하는역사적인모임이었던것이다.
밤이깊어갔다.박장군의신념에찬목소리가울려왔다.그날박장군의훈시는다음과같은것이었다.
“첫째,우리나라는정치에서초연해야할군인이정치에개입하여그들정치인과야합함으로써정치의부패를조장시켰다.그러한부패속에서권력의왕좌에군림하여군본래의숭고한정신을더럽힌자는단연코축출하고그러한악한요소는과감하게일대수술을가해야한다.
둘째,농어촌의실정이비참함은정치의부패․무능에기인한것임은새삼말할필요조차없는일이다.정부에서는날로범람하는농어촌고리채문제만하더라도헛구호만내어놓았을뿐,이렇다할구체적인방안을세워과감한실천을꾀하지못하고있는실정에있다.
셋째,사회적으로는퇴폐한풍조가퍼져사회도의는땅에떨어진지오래이며,마치깡패왕국을이루고있는공포의거리로변하였다.이러한무법․불법의암흑사회는정치권력이불법폭력단체와결탁함으로써그들의악을조장해온결과인것이다.이렇게부조리한악의요소가그대로이나라를풍미하고있는이상진정한민주공화국을이룩한다는것은‘진흙속에서장미꽃’을찾는것과같은어리석은일이다.
오직순수한애국애족의청년장교들의단결만이이나라를살리는유일한길임을명심하기바란다.
마지막으로국내의군수사기관에서우리들을주시하고있지만모든책임은나한사람이지겠으니여러분은맡은부서별로열과성을다해주길바란다.”
안방까지울려오는열기찬남편의목소리에여사는일종의감동같은것을느낄수있었다.그와같은감동은앞날에대한모든불안이나근심을몰아내기에충분하였다.여사는남편의지위에대하여우월감이나권위의식같은것을가져본일이없었다.한사람의순수한아내로서남편을사랑하고존경하고남편이충실하게자기임무를다할수있도록알뜰하게뒷바라지하려고애를썼으며남편과조화를이룰수있는아내가되기위하여자기수양을다짐하였을뿐이었다.그러나오늘의회합은여사의평소생활신조나이해범위를훨씬초월한것이었으며일상적인그것과는다른엄숙하고긴장된분위기였다.자녀들을둔한사람의어머니로서혹은여성으로서이같은경우에어떻게대처해야할지생각하지않을수없었다.만일거사가뜻대로이루어지지않을경우어떤결과가빚어지게되리라는것은불을보듯명확한일이었다.본능적인전율이여사의전신을엄습해왔다.그러나마루에서울려오는남편의신념에넘치는우렁찬목소리가그것을물리쳐주었다.
‘나야뭐,그분의아내일뿐,사랑과믿음으로그분을따르면될것아닌가.’
여사는마음속으로수없이되새겨보았다.회합은10시쯤끝이났다.
“사모님,안녕히계십시오.”
장교들의인사에여사는일일이미소로써답례하였다.그들을따라박장군도뜰로내려서면서여사를돌아보았다.긴장된박장군의얼굴에그분특유의독특한미소가스쳐갔다.
“조심하세요.”
여사는인사를건네면서박장군의얼굴이활활타오르고있다고느꼈다.남편과장교들이나가버린뒤문단속을하였다.갑자기온집안이바다밑같이조용해지고사방에서정적이밀려들었다.여사는방안으로들어가지않고뜰에서서별을쳐다보았다.짙푸른밤하늘에치렁치렁한성좌(星座)가맑게빛나고있었다.마음이좀처럼가라앉지않았다.
본격적으로김장철에접어든며칠후의일이었다.점심때쯤여사는중앙시장에들러장을보아가지고집으로돌아오다가수상한것을발견하였다.대문앞에서세사람의장정이군고구마수레를세워놓고장사를벌이고있었다.이외진골목에하필이면집대문앞에서군고구마장사를한다는것이아무리생각하여도수상쩍은일이었다.더군다나군고구마를팔면서세사람씩이나매달려있다는것도의심스러웠다.여사는문득‘군수사기관에서우리를주시하고있지만’하던박장군의말이떠올랐다.
집에들어온여사는연락병인박중사를내보내어일부러군고구마를사오게하며동정을살피도록하였다.
“고구마좀줘요.”
박중사는돈을꺼내주면서그들에게말을걸어보았다.
“요즈음고구마한관에얼마나하오?”
“글쎄요…”
그들은서로얼굴을쳐다보며얼른고구마값을대지못하였다.
오랜군대생활에익숙한박중사는그들이첫눈에수사기관에종사하는정보원임을알수있었다.
“수상해요.”
고구마를사들고집안으로들어오며박중사가말했다.그날저녁여사는집에돌아온박장군에게이사실을알렸다.
“고얀놈들.”
좀처럼감정을나타내는일이없는박장군도그때만은화를버럭냈다.나중에안일이지만이들은육군의모고위장성의지시에의해파견된군수사기관원이었던것이다.
다음날,박장군이고위장성에게항의를하자그들은자취를감추었다.그렇지만신당동집주변에는항상감시의눈길이뻗쳐있었다.
12월15일,박장군은제2군부사령관으로전보,대구로내려갔다.15일자로발령이났지만실제로부임한날짜는12월8일이었다.
박장군이집을비우자여사는착잡한심정에사로잡혔다.혼인한후로남편과더불어생활한날짜보다헤어져생활하는날이많았다.그러므로빈집을지키는고독감이나공허감에여사는이미익숙해져있었다.그리고어쩌면그것은고독이나공허보다는남편을기다리는보람으로내일에의소망과기대에찬밝은것일수도있었다.그러나이번만은달랐다.무엇보다도박장군의신변에대한불안이앞섰기때문이다.
이런착잡한심경으로여사는섣달그믐을맞이하였다.해마다의버릇대로앞치마를두르고손수집안을구석구석치웠으며밤늦게까지놋그릇을닦았다.
박장군이상경하였다.
1961년새해새아침,장군은자녀들의세배를받았다.근혜,근영,지만3남매가아버지앞으로나아가큰절을하였다.근영양은올해초등학교에입학해야할연령이었다.
새해로접어들자항간에서는3월위기설,4월위기설이떠돌았다.민주당정권은그러한발설의근원을추적하려고전수사기관을집중동원하고있었다.그럴수록혁명거사계획의위험도높아졌다.
한편박장군은제2군부사령관으로대구에머물면서장성급포섭과혁명거사를위하여중앙과긴밀한연락을취하면서자주상경하였다.
혁명거사의D데이가5월12일로정해지자박장군은조직을재검토하고만반의태세를갖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