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통령50주기,우리의오늘이그없이가능했는가
조국에모든것바치고빈손으로떠난거인,’고맙습니다’말밖엔…
50년전1965년7월19일오전0시35분하와이의한노인요양원에서나이아흔의한국인병자가숨을거두었다.한달전부터피를토했다.7월18일엔너무많은피가쏟아졌다.옆에는평생수발하던아내,대(代)라도잇겠다며들인양자와교민한사람밖에없었다.큰한숨을한번쉬더니숨이끊어졌다.어떤어려움에도우는법이없었던아내가오열했다.전기작가이동욱씨는영결식의한장면을이렇게전했다.한미국인친구가울부짖었다."내가너를알아!내가너를알아!네가얼마나조국을사랑하는지…그것때문에네가얼마나고생을해왔는지.바로그애국심때문에.네가그토록비난받고살아온것을.내가알아…."
그미국인은장의사였다.그는1920년에미국서죽은중국인노동자들의유해를중국으로보내주고있었다.그런데이승만이라는한국인이찾아와그관(棺)에숨어상하이로가겠다고했다.한국독립운동을하는데일본이자신을현상수배중이라고했다.그한국인은실제관에들어가밀항에성공했다.’너의그애국심때문에네가얼마나고생했고,얼마나비난받았는지나는안다’는절규는그냥나온것이아니었다.
15일아침서울국립현충원이승만대통령묘소를찾았다.나흘뒤면그의50주기다.필자역시이대통령에대해부정적얘기만듣고자랐다.그의생애전체를보고머리를숙이게된것은쉰이넘어서였다.이대통령묘앞에서’만약우리건국대통령이미국과국제정치의변동을알고이용할수없는사람이었다면지금의대한민국이존재할수있었을까’라는질문을스스로에게해보았다.고개를흔들수밖에없었다.그없이대한민국을건국하고,그없이우리가자유민주진영에서고,그없이전쟁에서나라를지키고,그없이한·미동맹의대전략이가능했겠느냐는질문에누가"그렇다"고답할수있을까.추모비에적힌지주(地主)철폐,교육진흥,제도신설등지금우리가디디고서있는바탕이그의손에서나왔다.원자력발전조차그에의해첫발을내디뎠다.
그는무지몽매한나라에태어났으나그렇게살기를거부했다.열아홉에배재학당에들어가나라밖신세계를처음으로접했다.썩은조정을언론으로개혁해보려다사형선고까지받았다.감옥에선낮에는고문당하고밤에는영어사전을만들었다.이대통령은독립하는길은미국을통하는수밖에없다고믿었다.1905년나이서른에조지워싱턴대학에입학하고하버드대대학원을거쳐프린스턴대에서국제정치논문으로박사학위를받았다.1941년미국에서’JAPANINSIDEOUT(일본의가면을벗긴다)’을썼다.그책에서이대통령은일본이반드시미국을공격할것이라고역설했다.책이나온지넉달뒤일본이진주만을폭격했다.미국정치인들은한국인이승만을다시보았다.
이대통령은1954년이책의한국어판서문을이렇게썼다.’일본인은옛버릇대로밖으로는웃고내심으로는악의를품어서교활한외교로세계를속이는…조금도후회하거나사죄하는태도를보이지않을뿐더러…미국인들은지금도이를알지못하고일인들의아첨을좋아하며뇌물에속아일본재무장과재확장에전력을다하며…심지어는우리에게일본과친선을권고하고있으니….’이대통령은서문을’우리는미국이어찌하든지간에우리백성이다죽어없어질지언정노예는되지않겠다는결심을하고합심하여국토를지키면하늘이우리를도울것이다’고맺었다.평생반일(反日)한이대통령을친일(親日)이라고하고,평생용미(用美)한그를친미(親美)라고하는것은사실을모르거나알면서매도하는것이다.
최정호울산대석좌교수는"어지러운구한말모두중·일·러만볼때청년이승만은수평선너머에서미국을발견했다.그래서그를19세기한국의콜럼버스라고부른다.우리수천년역사에오늘날번영은대한민국을건국한이박사의공로다.그런데지금우리국민은이위대한지도자를몰라도너무모른다"고했다.거인이이룬공(功)은외면하고왜곡하며,과(過)만파헤치는일들이지금도계속된다.건국대통령의50주기를쓸쓸히보내며감사할줄모르는우리의자해(自害)와업(業)을생각한다.
이승만대통령은물러난후겨울에난방할땔감도없었다.하와이에선교포가내준30평짜리낡은집에서궁핍하게살았다.부인프란체스카여사친정에서옷가지를보내줄때포장한종이박스를옷장으로썼다.교포들이조금씩보내준돈으로연명하며고국행여비를모은다고5달러이발비를아꼈다.늙은부부는손바닥만한식탁에마주앉아한국으로돌아갈날만기다렸다.그렇게5년이흘렀다.
이대통령이우리음식을그리워하자부인이서툰우리말로노래를만들어불러줬다고한다.이대통령도따라불렀던그노래를이동욱작가가전한다.’날마다날마다김치찌개김칫국/날마다날마다콩나물국콩나물/날마다날마다두부찌개두부국/날마다날마다된장찌개된장국.’아무도없이적막한그의묘앞에서이노래를생각하니목이메었다.
<2015년7월6일조선일보양상훈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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