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인 2016년 10월부터 금년 초까지는 박근혜전대통령의 탄핵사건으로 세상이 촛불이다 태극기다하며 어수선하여 불안했다. 따라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생각을 하다가 옛 회사 상사분과 전에 광복회 간부로 재직하셨던 분을 만나 세상 이아기하면서 안중근의사의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란 유묵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그후 호기심을 느껴 도서관에 가서 안중근평론을 읽어보기도 했고, 안중근의사의 자료를 검색하던중 안중근아카데미수강공고를 보고 신청했다. 3월 7일부터 시작한 강좌가 이제 거의 마치고 각자 총 정리 하는 각자의 발표만 남아 있다. 발표를 의식하고 작성한 내용이다.
본보고서는 머리말에서 수강하게 된 동기와 느낀 점을 간단히 서술하고 내용면에서는
1. 안중근은 어떤사람인가 이력중심으로 고찰해보고 2. 그가 평소 갖고 있는 동양 평화론에 대한 고찰. 3.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소개하고 끝으로 4. 수강 소감을 간략하게 논하려한다.
- 안중근은 어떤 사람인가?
아버지는 진사 태훈(泰勳)이다. 안중근은 1879년9월 2일 아버지 태훈 어머니 조마리아사이에 3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진해현감을 지낸 인수(仁壽)이며, 아버지 안태훈은 진사였다.
6세가 되었던 1884년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조부 안인수가 설립한 서당에서 한학교육을 받았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는 못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다.
1894년 16세때 황해도 재령군 향반 김홍섭의 딸(16세) 김아려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분도는 12세때 북만주 목릉에서 사망하고 2남 준생과, 장녀 현생이 있었다.
1897년 19세때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천주교를 통해서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6년 3월에 이사한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이를 정리하고 삼흥학교(三興學校) 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천주교 계열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했다.
1907년에는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독립전쟁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의병부대의 창설을 협의하는 한편,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과 함께 의병부대 창설의 준비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1908년 6월에 특파 독립대장 겸 아령지구 군사령관으로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그뒤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부근에서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으나, 사로잡았다가 석방된 일본군 포로가 신고하여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그이유로 부대는 해체되었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에서 함께 의병활동을 하던 김기룡·황병길·강기순·유치현·박봉석·백낙규·강두찬·김백춘·김춘화·정원식 등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10월 이토가 북만주 시찰을 명목으로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와 회견하기 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또 거사계획을 수립했다.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를 거사장소로 설정하고, 채가구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그는 하얼빈을 담당했다.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으로 가는 순간 권총을 쏘아,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이어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森泰二郞], 만철(滿鐵) 이사 다나카[田中淸太郞] 등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대한만세”를 외치고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러시아 관헌의 조사를 받고 일본측에 인계되어 10월 27일 안중근 재판을 관동도독부 로 넘겨졌고, 1909년 10월 30일 일본 미조부치검사 안중근의사 심문이 시작되었고 11월 3일 뤼순감옥에 수감되었다. 미조부치검사 10회 신문, 사카이경시 신문 13회, 총23회신문을 마쳤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과 재판과정에서 그는 한국의병 참모중장이라고 자신을 밝히고,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며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일본검찰에게 이토의 죄상은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5년 11월에 한일협약 5개조를 체결한 일, 1907년 7월 한일신협약 7개조를 체결한 일, 양민을 살해한 일, 이권을 약탈한 일,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 등 15가지로 제시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밝혔다.
1910년 2월 7일 제1회 공판시작으로 2월 14일 제6회 공판 때 미조부치검사가 안중근에게 사형언도 하였다.
2월 15일 안중근은 안병찬을 통해 동포에게 유언을 알렸고 2월 17일 안중근은 히라이시 고등법원장과 면담하여 동양 평화론을 설파하고 동양평화론을 집필을 시작했다 .
3월 15일 안중근 역사 탈고했고 3월 24일 안중근유서 6통을 작성했다. 안중근은 유언에서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할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라고 했다.
3월 26일 안중근 동양 평화론을 유언으로 남기고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 동생 안정근과 안봉근이 유해 인도를 요구했으나 감옥당국으로부터 거부당했다. 순국후 공동묘지에 매장된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까지 매장 위치가 발혀지지 않고 있다.
2. 동양평화론은 무엇인가?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은 안중근이 1910년 옥중(獄中)에서 쓴 글이다.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과 중국의 희생을 강요하는 이토 히로부미의 ‘극동평화론’에 맞서, 한·중·일이 동등하게 평화와 발전을 이루어 나가기를 꿈꿨던 그는 사형 집행 전까지 이 글을 쓰는 데 매달렸다고 한다. 안중근은 이 글을 마칠 때까지 사형 집행을 미뤄 줄 것을 일본 측에 요청했으나 서둘러 형을 집행하는 바람에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이 때문에 원래 집필을 구상했던 서ㆍ전감ㆍ현상ㆍ복선ㆍ문답 가운데 서문과 전감 일부만 작성한 채 미완성으로 남았다. 한문으로 쓴 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A4용지 7∼8장 분량이다.
〈동양평화론〉은 한·중·일 3국의 관계를 ‘대등한 국가 관계’로 보면서, 이웃 국가에 대한 침략과 영토 확장을 비판하고 평화적 공존을 주장한 내용이다. 이를테면 한·중·일 3국의 중심이 되는 뤼순을 중심지로 삼고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한다, 3국 공동의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화폐를 발행한다, 3국 공동의 군대를 창설하고 타국의 언어를 가르친다, 조선과 청국은 일본의 지도 아래 상공업의 발전을 도모한다, 3국의 황제가 로마의 교황을 방문해 협력을 맹세하고 왕관을 받아 세계인의 신용(信用)을 얻는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양 3국이 평등하고 상호 협력하는 동맹 관계를 건립해야 한다는 데 취지가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제안들이었지만 당시는 배타적인 주권을 중심으로 경쟁과 전쟁으로 점철되었던 제국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었다.
안 의사는 한ㆍ중ㆍ일 3국 간의 상설기구인 동양평화회의를 뤼순에 조직해 기타 아시아 국가가 참여하는 회의로 발전시키고, 동북아 3국 공동은행 설립, 동북아 3국 공동평화군 창설 등의 구체적인 구상도 밝혔다.
이러한 구상은 1993년에 설립된 유럽공동체보다 80년이상을 앞선 것이었으며, 최근 군주제를 수립하면서도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려 했던 칸트의 ‘평화연맹’과 비교되면서 재조명되고 있다.
3.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묵에 대해
안중근은 만주의 여순(旅順: 중국식 발음으로는 뤼순) 감옥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으로 지정됐다.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는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라는 뜻이다. 안중근이 1910년 3월 옥중에서 쓴 행서 글씨 두 폭이다. 이글은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 있을 때 자신의 취조를 담당했던 여순 검찰청 야스오카 세이시로 검찰관에게 써준 것이다. 야스오카는 사망하기 직전 이 유묵을 큰딸 우에노에게 물려주었고, 그 뒤 동경 국제한국연구원의 최서면 원장을 통하여1976년 2월 11일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되었다.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은 ‘나라를 위해 몸바침이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뜻으로 안중근이 공판정을 왕래할 때 경호를 맡았던 일본헌병 치바 도시치 간수에게 써준 것으로 전한다. 치바는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뒤 자진하여 제대했는데, 그가 사망하자 안 의사의 유묵은 그의 부인과 조카딸 미후라에 의해 보관되었다가1980년 8월 23일 도쿄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을 통해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되었다.
“임적선진 위장의무(臨敵先進 爲將義務)은 적을 맞아 앞서 나가는 것은 장수의 의무다라는 이 유묵은 본래 전남 순천의 전지훈씨가 소장 중이던 것을 (주)유로통상의 신용극 회장이 구입, 1996년 5월25일 해군에 기증한 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해 오고 있던 것이다.
지사인인 살신성인 (志士仁人 殺身成仁)은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사람은 좋은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뜻으로 논어의 위령공편에 나오는 지사와 어진사람은 살기위해 인을 해치는일이 없고 몸을 죽여 인을 이룩한다는 글에서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치라는 뜻이다. 여기서 견리사의(見利思義)와 견위수명(見危授命)은 안중근 의사가 100년 전에 여순 감옥에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자신의 철학과 심경을 피력하였던 간절한 마음이 읽혀지는 내용이다. 견리사의는 이익 보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익을 얻는 과정이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따져보라는 뜻이다.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는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하라는 뜻으로 안중근 옥중에서 남긴 글씨로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서울역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인무원여 난성대업(人無遠慮 難成大業)은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즉, 먼 장래를 내다보는 원대한 계획이 없이 그저 눈앞의 것만을 생각하면 필히 아침저녁으로 급박한 걱정이 생길 것이며, 그러면 결코 대업을 이루기 어렵다는 뜻이다.
일일불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은 안중근 의사 자신의 명언으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뜻이다. 평생의 경구가 될 만한 말이다. 쉬운 얘기를 볼때면 배움에 대한 그의 마음이 더욱가깝게 느껴진다.
백인당중유태화 (百忍堂中有泰和)은 ‘백 번 참는 집안에 큰 평화가 있다’라는 뜻이다. 인내를 강조한 내용으로 선현들의 구전글귀중 하나이다. 중국당고종이 운주 장공예의 집당호로 9대가 화목하게 산 것을 칭찬하며 지어준글이라한다.
황금백만량 불여일교자(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황금백만량도 자식하나 가르침만 못하다는 뜻으로 명심보감 훈자편에 황금 한궤짝이 자식에게 경서 한권 가르치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다.
고막고 어자시(孤莫孤於自侍) 스스로 잘난척 하는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없다.
4. 수강을 하면서 느낀점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를 할빈역에서 이토이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독립투사로 기억할 것이지만 그는 독립투사이기이전에 전 세대를 앞서간 사상가이고 전세게 제국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올린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할빈역에서 이등방문을 처단함으로서 대한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렸고 국내외 항일운동이 기폭제가 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개인적 감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 아니다. 안중근 의사는 러일전쟁 직후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고 나아가 중국 만주까지 넘보는 한국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이고,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파탄시킬 인물이기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처음부터 하얼빈 의거가 개인 차원의 거사가 아니라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J으로 결행한 국가 차원의 거사임을 주장했고 더욱이 거사의 이유도 한국의 독립만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고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한 일이라 했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평화를 발전계승하고 나가서는 동양평화와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닌가 생각한다.
데레사
2017년 6월 1일 at 16:58
오랜만입니다.
지난 세월이 많이 복잡하고 착잡했지요.
지금도 편치는 않습니다만.
안중근 의사님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btyang
2017년 6월 2일 at 08:59
댓글감사합니다. 오래간만입니다. 이번기회에 저도 안중근의사님에 대해
많은것을 배웠습니다. 오늘도 즐겁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