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의 즐거움

도전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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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말 퇴직하고 그때까지 안해본 것에 해보고 싶었다. 안해본 것을 하자니 도려움도 있었지만 도전이라 생각하고 처음으로 조깅을 시작하여 마라톤완주를 한 후에는 자신을 얻어 도보 국토종주, 자전거 전국일주를 했다.

 

먼저 마라톤이야기다. 마라톤을 하기위해 2000년12월에 심박계 기능이 있는 마라톤전문용 시계를 구입하여 그 다음해 1월1일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1키로부터 연습을 하면서 거리를 늘여나갔다.

 

그렇게 하여 3월 초 서울 마라톤 클럽에서 주관하는 마라톤대회에 10키로 부분에 참가한 이후, 5월 21일 인천공항개항기념 하프마라톤, 6월 잠실운동장에서 관광협회 주관 하프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후, 조선일보 춘천마라톤대회에 참가신청을 하고 본격적으로 연습했다. 결국 10월 21일 춘천마라톤대회에 참가하여 4시간 9분에 완주하였다.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 추억은 것은 마라톤선수대열이 선두와 후미와의 거리는 길게 장사진을 이루었는데 선두에서 아~ 하는 함성을 지르면 그것을 다음 사람들이 이어받아 계속 뒤로 전달하고 다시 후미에서는 선두로 그리고 선두에서는 다시 후미로 전달하는 함성의 메아리 소리는 매우 참 감동적이었다.

 

11월 11일 여의도에서 63.5키로 Km 울트라마라톤대회에가 있는 것을 알고 그대회에도 참가하였다.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 것은 새벽 5시에 출발시켰다는 것과 화장실을 다녀오고 나면 나보다 뒤에서 달려오든 사람들이 앞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그들도 역시 화장실에 갔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면서 실례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후부터는 나도 달리는 중에는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

2003년 자원봉사로 스리랑카에 있을 때는 그곳에서 열리는 단축마라톤에 참가했다. 그대회는 일종의 Fun run 대회였다. 장년부로 참가신청을 했다. 그곳에서 우승을 했다. 상금은 받았으나 상장은 없었다. 왜 상장이 없느냐고 했더니 그나라 문화란다. 그곳에서의 마라톤연습은 날씨가 더워 새벽에 일어나 신작로를 따라 뛰었는데. 신작로 옆 마을에는 방범일환으로 개를 풀어놓는다. 이 때문에 몽둥이를 들고 뛰어다녔던 추억이 새롭다.

 

이날 마라톤은 처음부터 힘을 내여 맨 앞에서 1위를 지키며 경찰 선도차들 따라갔다. 갑자기 선도차가 멈췄다. 앞을 보니 기차 횡단철도인데 공교롭게 그 시간에 가차가 오고 있었다. 나는 선도차를 추월해서 기차가 지나가는 시간에 혼자 뛰고 있었다. 같이 뛰어도 내가 맨앞에 왔는데 기차가 막아 주었느니 당연이 우승을 했다. 마라톤 경기에서 선도차를 앞질러 뛴선수는 아마도 나뿐이었으리라.

그후 2009년 11월 29일 잠실운동장에서 열리는 손기정 마라톤 대회에 32키로부분에 참가하여 연령대(60대)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보스톤 마라톤에 도전하고 싶었다. 참가신청하려면 2년내의 국제대회 4시간 15분기록이 있어야했다. 그래서 2008년 3월 서울 국제마라톤참가해서 얻은 3시간 51분09초의 기록을 첨부하여 참가신청을 했고, 결국 보스톤마라톤대회에 참가하여 4시간 11분 35초로 완주했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구간에 걸쳐 어린아이들과 함께 나와서 열띤 응원하는 모습이다. 하프지점 근처에는 힐러리가 다녔다는 웨슬레이 대학생들이 연변에 나와 학생들이 Kiss me 라는 프랑카드를 들고 나와서 응원을 하기에 나도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낯모르는 사람과 처음으로 키스를 했다.

 

다음으로 도보 국토종단에 도전했다. 2012년 봄, 지도를 구입해 해남 땅끝 마을에서 강원도 통일전망대까지 직선을 그었다. 갈 수 있는 도로와 숙박 가능한 곳에 동그라미 쳤다. 걸어서 해남 땅끝 마을부터 광주 순창 진안 무주; 문경, 제천, 평칭, 인제를 거쳐 통일전망대에 도착하는 도보국토종단을 계획했다. 혼자 하는 게 무리라 생각했지만 성공을 장담할 수 없어 아무에게도 권하지 못했다. 한데 교회 지인이 우연찮게 소식을 듣고 따라나섰다.

5월 1일, 해남 땅끝마을에 도착하여 그날로부터 걷기를 시작했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그런데 순창에 닿을 때였다. ‘숙소를 찾았지만 공교롭게 지역 행사 때문에 모두 사전 예약돼 있어 잘 곳을 구할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다가 교회 문을 두드렸습니다. 염치 불고하고 목사님께 ‘재워 주십쇼!’ 했다. 목사님은 흔쾌히 받아 주었다.

그게 다가 아니다. 기필코 완주하겠다던 동행은 체력의 한계로 보은에서 두손을 들었다. . 처음 맘먹은 대로 다시 혼자 걸어야 했는데 그후 주말이면 집사람이 내려와 함께 걸어 주었다. 도보 여행이 처음인 아내의 발은 날이 갈수록 물집과 상처로 가득했다. 무척 미안했지만 고맙단 말조차 못했다. 아내가 돌아가면 다시 혼자 걸었다. 외롭고 마음이 약해졌지만, 그때 마다 초심을 되새겼다. 마침내 21일 만에 통일전망대에 도착하니, 옛 사우들이 응원하러 와 있었다. 그는 해냈다는 성취감보다 감사에 목이 멨다.

 

이번에는 전국자전거일주를 계획했다. 서울 집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고성 최북단마을인 명파초등학교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부터 동해안 차도를 따라 포항, 그리고 부산까지, 다시 남해안 도로를 따라 해남 땅끝마을까지, 그리고 서해안 도로를 따라 인천까지 와서 아라뱃길 자전거도로를 타고 서울 집으로 오는 코스를 잡았다.

 

그렇게 잡은 이유는 명파 초등학교는 우리나라 최북단 초등학교이고, 호미곶은 육지에서 가장 동쪽 포항의 한 곳이며 땅끝 마을은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 마을이고 진주 촉성루는 논개의 애국충절의 의미를 생각했고, 여수에 손양원목사님 기념관은 손양원 목사님이 아들이 625전쟁때 살해되었는데 아들의 살인자를 용서하고 자기의 양자로 삼았기에 우리가 용서란 입장에서 볼 때 목사님중에 대표적 인물로 생각해 그곳을 방문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인천에 있는 맥아더장군 동상을 찾아가 참배하는 것은 요사이 같이 안보가 중요한 상황에서 가보는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의 사고에 대비해 전국자전거일주 패찰을 만들어 집사람의 전화번호도 적어놓았다. 실행은 2014년 10월 7일 서울을 출발하여 9일 명파초등학교에 도착. 부산에는 10월 16일, 진주 촉성루는 17일, 또한 10월 19일은 손양원 기념관에 도착했습니다. 21일 땅끝마을에 가서 땅끝이란 표지석과 전망대를 봤다. 다시 서해안을 따라 인천쪽으로 올라갔다. 이순신 장군의 승전한곳인 울돌목은 23일, 그곳에서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실감 했다. 29일 맥아더 동상이 있는 인천 자유공원을 찾아 갔다. 그리고 아라뱃길 터미널을 찾아 갔고 그곳에서 자전거 길을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 결국 10월 7일 9시에 집을 떠나 29일 오후 8시에 집에 도착했다 .

 

길을 잃어 고생도 했고, 포항에 도착했을때는 거센 비바람 때문에 하루가 묵여 있기도 했다. 해남에서 목포로 오는 도중 탈수현상이 와서 갑자기 병원을 찾아야하는 어려움도 있긴 했지만 모텔주인의 친절함으로 잘 해결했고, 보령에서는 식사하면서 모텔을 물으니 식당에서 식사하던 모텔사장이 “어르신이 고생한다”며 모텔 사장님이 무료로 방을 제공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식당주인도 식사비를 받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참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다시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지난추억이다. 나에게는 의미 있는 도전이었고, 큰성취감도 느낄수 있었다. 도전은 포기하지 않고 한거름 한거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일이 그렇지 않을까?

2019년 7월 20일   양병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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