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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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세월.

이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이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 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 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헌들 쓸데 있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 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 있나

판소리 본 창을 하기 전에 부르는 단가 중의 하나인 사철가의 시작 대목이다. 인생 팔십을 산다 해도 병든 날, 잠든 날, 근심걱정을 한 날들을 제하면 사십도 채 못산다는 내용으로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한 것이다.

흰 머리가 생기고 얼굴이 주름이 생기는 것만 늙는 게 아니라 마음도 같이 늙는다. 유행가 가사가 자신의 이야기 같을 때부터 늙기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젊어서는 유행가 가사를 그렇게 음미하게 되지는 않는다. 좀 더 늙으면 판소리 가사가 귀에 들어 온다.

젊었을 때는 판소리를 들으면 이태리 말로 부르는 오페라처럼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으나 늙어서는 그걸 알아 들으니 그것도 묘하다. 사설(辭說)에 철학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일본 사람들은 가부끼를 서양의 오페라와 동격으로 놓고 감상을 하지만 한국에서 판소리는 영화 서편제에서나 등장하는 정도이니 그것도 아쉬운 점이다. 나는 스트레스가 있을 땐 민요를 크게 틀어 놓고 따라 부르면 좀 개운해 진다. 음치이지만 궁상각치우의 오음계에서는 별 탈이 없다.

위 사진은 영국 여왕의 젊었을 때와 현재의 모습이다. 꽃다운 시절은 여왕뿐만이 아니라 누구에나 다 있었다. 젊음은 이미 다 누려 봤기에 그게 동경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뒤를 돌아보면 오늘이 가장 늙은 날이 되겠지만 남은 날들에 대해서는 오늘이 분명 젊은 날이기 때문이다.

한 필우님의 글에,
봄 꽃들을 보면서 ‘저 꽃들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 글을 읽으며 가슴이 아려왔다. ‘술이 반 병이나 남았다’와 ‘술이 반 병 밖에 안 남았다’는 말에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 진다는데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는 누구나 다 안다.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니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화시라

사철가에 이런 일침도 있으니 그런 게 판소리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생은 100년 이상 잘 숙성된 아주 비싼 술인데, 어느 경우든 그 반 병에서 열 잔이 나올지 스무 잔이 나올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이 화창한 봄날에 그 반병이나 남은 술을 꺼내 놓고 좋은 안주도 한사라 준비하여 지긋이 서로 눈을 맞추며 인생을 찬미하심이 어떨는지? 4/27/16 cane091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