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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

풍속도2

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

장모님이 시를 쓰고 사위가 곡을 붙인 노래, 우리 가곡 ‘그네’의 끝 소절이 위의 글 제목이다. 노래에 대한 사연도 멋지지만 가사와 멜로디가 이처럼 궁합이 잘 맞는 노래도 드물 것 같다.

서정적인 노래 대부분이 정적(靜的)이라면 이 노래는 동적(動的)인 감흥을 일으킨다. 눈을 감고 이 노래를 듣노라면 내가 그네에 앉아서 swing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롯데 부회장의 자살기사를 보면서 ‘일만 근심을 실어 가는 바람’에 대한 생각을 해 봤다. 자살이 그 해법은 아닌 것 같다. 세상에서 걱정 근심이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 생각으로는 zero일 것 같다. 근심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행복한 사람도 그걸 놓칠까 걱정을 하고, 권력자나 부자 역시 마찬가지일 게다.

아기가 엄마와 떨어지면 울어대는 걸 보면 아기에게도 걱정은 있는 셈이다. 풍요로운 노년을 보내는 노인일지라도 혹시 모르는 건강 걱정, 행여 자식들이 잘못될까 자식들 걱정..

그래서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한다. 거기에서 어떤 초월자(超越者)에게 기대어 보는 게 종교의 형태이다. 능력이 없는 부모일지라도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천애고아(天涯孤兒)보다는 낫다. 푸념이라도 할 대상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세상엔 수 많은 종교가 있다. 경전(經典)이 있는 종교도 있고, 토속신앙처럼 구전(口傳)에 의하여 의식을 집행하는 종교도 있다.

종교는 ‘논리(論理)나 이성(理性)’의 영역이 아니기에 각자의 ‘신념(信念)이나 감성(感性)’에 의해서 종교를 택하게 된다. 즉 각자에게 맞는 종교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택한 종교에 대하여 시비할 권한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그게 소위 말하는 종교의 자유이다.

종교가 권력을 잡으면 그 폐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유럽에서 로만 카톨릭이 지배했던 1,280년간을 교회사에서는 종교암흑시대라고 한다. 종교재판에 의하여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야 했고 종교를 빙자하여 침략도 서슴지 않았었다. 또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이민을 온 청교도들도 주일을 범하면 체형을 가했었다.

그러나 의지처가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큰 위안을 받는 것이 인간이다.

세계 교회사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의 천주교가 선교사 없이 자생하였다. 내 자식의 자식들은 물론 그 아래 대대손손을 내려가도 종의 신분을 벗어 날 수 없었던 그들에게 천주(天主)의 아들이 된다니 그만한 복음도 없었다. 믿고 나 후로는 굶어도 견딜 만 했었고 고된 일이나 죽음까지도 피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에게 헛 믿었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

신앙생활이 현실을 초월하면 그건 수도승의 삶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과 타협을 하라는 말은 아니다. 삶 속에서의 신앙이 되어야지 신앙 속의 삶이 되면 그 가족들이 우선 피해자가 된다.

신심(信心)은 여성들이 남자들보다 더 깊다. 십자가 사건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다락방에 숨었지만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 갔던 사람이 여자들이었다. 옛날 장독대에 정화수를 놓고 빌던 사람도 어머니들이었지 아버지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인이 너무 종교에 열중이면 그의 남편은 안티가 된다. 주일날에 온 종일을 교회에서 보내거나 교회행사로 몇 일씩 집을 비우게 되니 남편은 집에서 인터넷에 종교 비난 글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건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정문제인 셈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기복신앙(祈福信仰)이다. 기독교의 축복은 천상(天上) 축복이지 지상(地上) 축복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팔복산에서 하신 여덟 가지의 복에 대한 설교의 내용이 그렇다.

기복신앙은 일이 잘 풀리는 사람에겐 문제가 안 되겠지만 일이 안 풀리는 사람은 그 열성만큼 금방 지쳐서 신앙을 접게 된다. 목사님이 헌금에 대한 설교를 자주 하거나 스님이 시주 이야기를 자주 한다면 그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를 찾는 게 현명하다. 절 역시 마찬가지이다.

헌금이나 시주는 앞으로의 어떤 보응(報應)에 대한 조건부가 아니라 현재까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야 옳다.

기독교나 불교 모두 궁극적으로는 내세(來世)에 대한 약속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라고 했다.

병이 든 자는 아프지 않은 다음 생을 원하겠고, 굶주린 자는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 다음 생을, 외로운 사람은 그렇지 않은 다음의 생을, 압제를 받는 자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다음 생을 원할 것이다. 그게 종교의 순 기능이다.

무신론(無神論)자라면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 하시라. 그것도 인생에서 종교보다 더 현실적으로 위안을 준다는 게 심리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마음의 일만 근심을 실어 가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걸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올 가을엔 하얀 뭉게구름에 근심걱정을 다 실어서 날려 보낼 수 있는 여러분과 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8/26/2016.

그네 / 김말봉 시, 금수현 곡.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고 구름 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한 번 구르니 나무 끝에 아련하고
두 번을 거듭 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