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봉동 戀歌

소설이나드라마에서묘사된가리봉동은지독히도씁쓰름하다.양귀자의소설「비오는날이면가리봉동에가야한다」가그랬고신경숙의자전적소설인「외딴방」,그리고TV드라마「가리봉엘레지」가그려낸가리봉동이그러했다.

1964년서울구로구일대에60만평규모로조성된구로공단은국내공업단지1호이다.
구로동의1공단에이어가리봉동에2,3공단이더들어섰다.초기공단내3분의1을차지하는60여곳의업종이봉제였다.공단과인접한1백여군데하청봉제공장들까지합하면‘구로공단’은아예‘봉제공단’이랄수있을정도로봉제품목이주를이루기도했다.

이렇듯70년대를거치면서고사리손이부르트도록의류며가발이며쉴새없이박아내수출불모지인이땅에달러박스를안겨주었던곳으로익숙하다.80년대에접어들면서시작된노사분규로구로공단은용광로처럼달아오르기도했다.
당시대우어패럴(이후,세계물산)은노사분규로특히나몸살을심히앓아뉴스의한가운데를장식하면서한때구로공

단은노동운동의메카로인식되기까지했다.이즈음노동운동을지원한다는명분으로소수의운동권대학생들이이른바위장취업해구로공단에흘러들었다.

또뜨겁게일렁이던시대적정치상황에내몰려쫓기던사람들도속칭기리봉동,구로동의비좁은벌집촌으로찾아들어,그래서더더욱그늘지고남루한서울의또다른얼굴로드라마나소설속에비추어졌는지도모른다.
구로공단을사통팔달하는가리봉오거리는70년대이후공단생산직사원들의문화중심지였다.
80년대는치열한노동운동의현장이었으며주말저녁시간이면작업현장에서쌓인피로를달래려는젊은이들이삼삼오오선술집으로모여들어북적거리던곳이기도했다.

또한오거리를중심으로내로라하는대형봉제업체들을비롯,’82년5월,9개중소봉제업체가모여설립한「구로협동봉제공장」과그로부터몇년뒤같은형태로문을연「제일협동봉제공장」도이곳에자리잡고있어특히나유동인구가많았다.그러나호시절도잠시,수출불황과인건비상승,인력난등암운이드리우기시작하면서봉제,전자를비롯한많은사업장들이문을닫거나지방으로,해외로생산기지를옮겨갔다.구로공단에젖줄을대고생활하던사람들도함께썰물처럼빠져나간이일대는황량하기그지없었다.

그러나휑하기만하던이곳에도청신호가켜졌다.
구로공단을첨단디지털단지로탈바꿈시킨다는계획이발표되자달러박스의기쁨과노사분규의소용돌이등,희비를간직한채시멘트블록의단층회색공장과굴뚝들이하나둘씩사라져갔다.

「구로협동봉제공장」은담을허물고의류할인매장으로단장했다.「제일협동봉제공장」은아예건물을허물고의류타운을건설중이다.이제과거의모습은가늠하기어렵다.사라진‘굴뚝’자리에‘디지털밸리’가속속둥지를틀고있다.
‘10년이면강산도변한다’는이미고전이다.‘자고나면아파트형공장한동이우뚝서있더라’는표현이실감날정도로하루가다르다.

구로공단의대변신이시작된것이다.
과거구로공단을기억하고있는사람들은‘이곳이그곳맞느냐’며갸우뚱거린다.
‘구로공단’명칭은일찌감치‘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변경했다.2호선‘구로공단驛’도어느새‘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내걸렸다.확달라진가리봉동과구로동엔더이상회색빛공단이미지는없다.
하나둘씩들어선할인매장은이미신흥패션명소로입소문이자자해젊은이들로넘쳐난다.
벤처기업들이입주해있는디지털밸리엔캐주얼차림의젊고패기넘치는신세대직장인들로만원이다.
이른바‘디밸족’(디지털밸리족)이란신조어까지등장하기에이르렀다.
상당수젊은벤처인력들이유입된덕에디지털단지주변엔디밸족을겨냥한새로운상업시설들도속속생겨나고있다.

테이크아웃커피전문점,외국어학원,헬스클럽,패밀리레스토랑등이그것이다.

몇가지변신이더남아있다.
서울시와구로구,금천구의계획대로라면마지막남은가리봉1동‘벌집촌’은호텔이나컨벤션센터등업무지원시설로,주변에는오피스텔등주거시설이들어선다.가리봉2동역시도심형주거밀집지역으로재개발될예정이다.이일대를지나는남부순환도로는도시미관을고려해지하로들어가게된다.가리봉오거리도도로체계를정비하여가리봉사거리로바꾼다는계획이다.
구로공단에서비롯된70·80년대‘한강의기적’은이제새롭게임무를부여받은디지털밸리의젊은인력들이반드시재현해내야할몫이며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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