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마다 고려 우왕의 눈물이… 강릉 제왕산

공민왕은본래여색을즐기지않았다.
정략결혼한노국공주의침소에도가뭄에콩나듯들릴정도였다.
그래도어찌어찌하여임신을했으나난산끝에노국공주가숨을거뒀다.
이때부터공민왕은정신적공황상태에시달리게되면서
엽기적행각을일삼게된다.
용모단정한귀족자제들을모아변태적인시중을들게하고
심지어는귀족자제들에게자신이보는앞에서후궁을범하게하기도했다.

그러다가자신의오른팔,신돈의첩,반야에게필이꽂혔고
체통도없이신돈의집을들락날락거리며작업에들어갔다.
왕이들이대는데’아니되옵니다’할수는없는노릇,
그렇게세상에나온아이가’모니노(牟尼奴)’다.
모니노는우왕(禑王)의아명이다.

공민왕과찍자꿍이잘맞는신돈을주위에서곱게볼리만무했다.
신돈이간통을했다,신돈이반역을꾀한다,
신돈의골상이흉인을닮아후환을끼칠것이다등등…
가랑비에옷젖듯,공민왕의귀도앏아져결국신돈의목을쳤다.

반야의아들모니노는태후의반대에부딪혀세자로삼지는못했으나
공민왕은’禑’라는이름을지어주며강녕부원대군에봉했다.

태후가우를세자로허락하지않자,공민왕은다시후사를걱정하였다.
급기야귀족자제와자신의비빈들을억지로간음케하여왕자를얻으려했고
비빈이거부하자,칼로위협해가며강제로간음을시켜임신하게했다.
천인공노할작태를벌였으니후환이없으면섭섭할터.
술에취해침전에든공민왕의온몸을마구찔러댄이가있었으니
바로억지간음에동원됐던귀족자제였다.
뇌수가벽에튀어붙을정도로처참한죽음을맞은공민왕의나이는45세.
고려의등불같은존재였던공민왕의죽음은이처럼허무했다.

공민왕의뒤를이어10살의어린나이로우왕이즉위했다.
처음에는학문닦기에힘썼고,할머니명덕태후의가르침을받아몸가짐을바로하여
기대를모았으나,태후가죽은후음주가무에엽색등방탕하게노닐면서
백성들의신망을잃어갔다.여기에다왕을믿고까불던측근들이
이성계일파로부터왕따당해유배되자,우왕의정치적기반은흔들렸다.

이때부터우왕의생모,반야가신돈의첩이라는사실때문에우왕이신돈의아들이라는
‘우왕신씨설’이모락모락피어올라사방으로퍼져나가기시작했다.
‘왕족의혈통이아니고신돈의자식이맞다’고이성계도거들었다.
이성계는위화도회군이후,꿍짝이맞는몇몇의도움을받아어의를벗겼다.
강화도로,여주로,다시강릉으로유배지를옮겨가며서러운눈물을흘렸다.
유배만으로는성이안찼던지이성계일파는강릉인근으로찾아가무참하게살해했다.


그렇게24세꽃다운나이에비운의삶을허무하게마감한우왕.
그의서러운눈물이마르지않는곳,강릉제왕산으로향한다.

엄청나다.
대관령휴게소엔버스도사람도초만원이다.
산들머리에서산악회버스들이가장붐비는시간대는10시30분전후다.
이곳대관령휴게소를들머리로오를수있는산봉은선자령,능경봉,제왕산으로
한결같이능선이완만해저질?체력들도부담없이걸음할수있는코스다.

영동고속도로준공기념비앞까지는산꾼들에떠밀리듯올라섰다.
입산통제소앞에서제왕산과능경봉으로길이갈라진다.
능경봉은오른쪽산길로,제왕산은왼쪽임도로이어진다.
제설이된듯한임도를따라룰루랄라걷다가왼쪽산자락에걸쳐진
목계단을딛고올라서니이내사방이열린다.

오승우화백’설산’

산의골격인산등성이의굵고거친선을보면서
산에올라산의속살을느끼고그기운을화폭에담아내는화가,
오승우화백의산그림이문득머릿속에떠오른다.
그의붓끝에는늘살아숨쉬는엄숙한산의기운이묻어있다.
가는선보다는굵은선,밝고예쁜색보다는무겁고깊이있는색을즐긴다.
하얀바람개비가아스라이눈에들어오는반백의선자령능선을
오승우화백에빙의되어그의시선으로느껴본다.

콧구멍을닮은터널이…

관동과관서를잇는숱한嶺의존재감을단박에날려버린쭉쭉뻗은
고속도로가산밑으로파고들면서생겨난콧구멍터널은
쉼없이차량을들이고내뱉는다.

눈,비,바람에잘담금질된고사목한그루가시선을잡아끈다.
나뭇가지의춤사위가일품이다.
춤을추다가’그대로멈춰라~’하여굳어버린건아닐까?
동작만해제되면금방이라도너풀거릴것만같다.
외로움을삭이며꼿꼿하게버티고선고사목이겨울산과조화롭다.
우왕이오르내렸을능선에는’제왕산성’의흔적이처연하다.

제왕솟대바위

제왕솟대바위를지나자,드디어고사목과노거송이帝王의면모를유감없이발한다.
정상에서면능경봉과새봉을잇는백두대간의등뼈가용트림하듯꿈틀대고
강릉시내저너머로동해가하늘과맞닿아말그대로일망무제이다.
우왕은이곳에올라무슨생각에젖었을까?
아마도생모반야를그리며눈물지었을것이고,
어쩌면이성계를떠올리며칼을갈았을지도…

이곳에서부터날머리로정한대관령박물관까지는5.4km.
587봉에이르는1.7km구간은산사면이가파른편이나
겨울산꾼들에겐더할나위없는놀이터다.
무릎까지쌓인눈비탈에주저앉으면’봅슬레이’부럽지않다.
간혹돌부리에걸리기라도하는날엔강력똥침맛을보기도하지만
너나없이무한쾌감에넋을놓고미끄러져내린다.

상제민원계곡

이후부터금강송이빼곡하게들어선완만한산길이이어지고
상제민원계곡을가로지른제왕교를건너면옛대굴령길과만나는상제민원길로접어든다.
꽁꽁얼어붙은계곡은정지된듯보이지만얼음장아래에선
봄을잉태하는움직임이쉼없이꿈틀대고있을것이다.

고을원님이강릉으로부임해올때힘들어울고,임기를끝내고돌아갈때는
따뜻했던고을인심에또한번울었다는’원울이재’를지나자,
저만치,날머리인대관령박물관주차장에서울까지데려다줄애마가…반갑다.

녹색점선을따라이동.

대관령휴게소>능경봉갈림길>제왕산정상>원울이재>대관령박물관

5 Comments

  1. 데레사

    2012년 1월 30일 at 4:52 오후

    제왕산이고려우왕이올랐던산이군요.그래서이름이제왕으로되었나
    봅니다.
    산행기를읽는게아니고전설의고향을읽는기분으로포슽을읽으면서
    속으로감탄을합니다.
    모르는사실들을가르쳐주셔서고맙습니다하고요.

    겨울산,사진만봐도즐겁습니다.   

  2. 정영호

    2012년 1월 31일 at 2:25 오전

    83년도대학시절때제왕산에가봤어도우왕과관련된산이라는것은몰랐었고다만경치가참좋다고생각했었는데이런속이야기가있음을처음알았습니다
    좋은글재미있게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3. 유머와 여행

    2012년 1월 31일 at 8:56 오전

    정말슬픈이야기로군요..   

  4. 정종호

    2012년 2월 7일 at 9:47 오전

    전설따라삼천리!!어릴적라디오에서들려오던성우의목소리가오버랩!!되는건무슨이윤지??행님잘보구갑니당   

  5. 와암(臥岩)

    2012년 2월 24일 at 11:20 오전

    이글읽으면서늘머리속을맴돈단어가’인과응보’입니다.

    조선왕조를개국한이성계,
    숱한정적들에게피바람을불러일으켰으니,
    ‘왕자의난’이란응보를받았음은물론이고.

    적장자(문종)가처음으로왕위에오른후두번째적장자(단종)은삼촌에게무참히짖밟혔으니말예요.

    고려조뿐아니라조선조에선이같은비극들이훨씬많지요.
    이모두’인과응보’의결과물이아닐까요?

    ‘帝王山’,
    이산외에도제왕의슬픈얘기가맺힌뫼들이많지요.

    멋진산행기에쓰잘데없는얘길주절거려죄송할따름입니다.
    추천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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