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산길, 단양 옥순봉과 구담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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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객 실은 버스는 ‘장회나루’를 지나 가쁘게 엔진음 토해내며
구불구불 산모롱이를 돌아올라 ‘계란재’ 잿마루에 멈춰섰다.
오늘 걸을 산길, 옥순봉과 구담봉의 들머리이다.
이미 여러대의 버스가 산객을 부려 놓고 있었다.

‘장회나루’는 옛부터 구담봉과 옥순봉을 보기 위해 배를 띄우던 곳이다.
구담봉과 옥순봉은 산길이 아닌 뱃길로도 돌아볼 수 있다.
‘계란재’는 이 지역에 은거하던 토정 이지함이 금수산에 올라 이 고개를
굽어보니 풍수상 마치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계란치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구담봉과 옥순봉은 단양팔경 중 하나로 충북 제천과 단양을 경계하는
계란재 북 편 충주호에 우뚝 솟아 있다.

 


들머리 안내판에 실경산수화 한 점이 설명과 함께 시선을 사로잡는다.
조선시대 화가, 단원 김홍도의 ‘병진년화첩’에 들어있는 옥순봉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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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순봉圖는 단원이 초기에 주로 그렸던 풍속도와는 필선이 사뭇 다르다.
과감한 필선과 생략으로 사실적이면서도 관념적이다.
近景 위주의 구도와 먹의 濃淡 그리고 淡彩의 투명한 효과가 수묵묘사법으로
잘 표현되어 있어, 후반부 단원 화풍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산길로 막 접어드는데 국립공원 관리요원이 신신당부 한다.
그제 단양 쪽 소백산 자락에 산불이 발생했었음을 주지시켜가며
화기를 사용하지 말 것과 특히 담배는 절대로…

 


임도를 따라 100여미터 걸어가니 이정표가 오른쪽을 가리킨다.
이정표 상단에 국립공원 로고가 선명하다.
구담봉과 옥순봉은 월악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완만하던 임도는 비닐하우스가 있는 빈 터에 이르러 나무계단길로 이어졌다.
비닐하우스 귀퉁이에 메뉴가 적힌 간판이 쳐박혀 있는 걸로 보아
오가는 산객들이 목을 축이던(?) 쉼터였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국립공원 내 식당 정비로 폐쇄된 모양이다.

 


연초록 기운이 나뭇가지 끝에서 곰실거리고
생강나무도 노랗게 꽃망울을 터트렸다.
산 속의 봄은 산 아래보다 한 템포 늦다.

 


충주호가 굽어보이는 능선 갈림길에 닿았다.
왼쪽으로 900m 가면 옥순봉, 오른쪽으로 600m 가면 구담봉이다.
들머리에서 이곳 갈림길까지는 1.4km이다.
두 봉우리를 올랐다가 원점으로 회귀하는 총 거리는 5.8km에 불과하나
오르내림이 녹록치 않아 운동량만큼은 절대 부족하지 않다.
그렇지만 걸음 내내 눈이 호사를 누리는, 그런 코스다.

 


옥순봉에 올라 뒤돌아보니 뫼’山’자 모양의 암릉이 선연하다.
곧 만나게 될 구담봉의 모습이다.
금방이라도 봄비를 뿌릴 듯 하늘은 끄무레하다.
구담봉 뒤로 가은산도 흐릿하게 눈에 든다.

희끗하게 뻗어오른 바위 기둥들이 비 온 뒤 솟아오른 옥빛 죽순과
같다하여 퇴계 이황이 ‘玉筍峰’으로 이름 붙였다 전한다.

여기서 잠깐,
옥순봉을 이야기 하면서 퇴계 이황과 관기 두향의 말랑말랑한
러브스토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다.

퇴계의 매화 사랑은 각별했다.
매화를 노래한 詩만 일백 편이 넘는다.
평소 매화를 의인화해 하나의 인격체로 대할 만큼 매화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곳 단양군수 시절에 만났던 관기 ‘두향’ 때문이다.

단양 두항리에서 조실부모한 두향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뛰어났고
자태는 빼어났다. 詩와 書, 가야금에 능했고 매화 기르기를 즐겼다.
재능을 아깝게 여긴 한 퇴기(退妓)가 두향을 데려다 기적에 올렸다.

때마침 퇴계 이황이 단양 군수로 부임했다.
퇴계의 나이 마흔여덟, 두향은 십팔세 꽃띠였다.
군수를 모실 관기로 두향이 간택되었다.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둘의 운명적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퇴계는 부임을 전후하여 몹시 힘든 나날을 보냈다.
첫 부인에 이어 두번째 부인과도 사별했다.
또 부임 한달 만에 둘째 아들마저 잃어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아무리 꼿꼿하고 의연한 그였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을 연이어 잃으면서
인생 무상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심신은 쇠약해져 갔다.

십팔세 두향은 고독한 중년, 퇴계의 빈 가슴을 채워주고 싶었다.
시문을 논하며 고매한 인품에 매료되어 흠모의 싹을 키워갔다.
퇴계 역시 두향의 재능과 총명함에 반해 때로는 師弟로, 때로는 父女로,
때로는 戀人이 되어 정을 쌓아갔다.

그러나 둘의 달달한 시간은 아홉달만에 끝나고 만다.
친형이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 형제가 직속 상하관계가 되자,
청렴결백을 중히 여기는 퇴계가 단양을 떠나 소백산 죽령 넘어 경상도땅
풍기 군수를 자임해 헤어지게 된 것이다.
갑작스런 이별은 두향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초승달이 매화나무에 걸린 떠나기 전날 밤,
둘은 이별의 술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퇴계가 침묵을 깨고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로다”

말없이 먹을 갈던 두향이 붓을 들었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 제 /
어느덧 술 다하고 님 마저 가는구나 /
꽃 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퇴계가 단양 땅을 떠날 때 두향은 매화 화분을 선물했다.
퇴계는 평생 이 매화분을 가까이 두고 정을 쏟았다.
이 매분은 곧 두향이의 분신이라 여겼다.
두향이 그리울때면 매분에 물을 주며 대화했다.
매분 앞에서는 병약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홀로 단양에 남은 두향은 다른 남자와 어울리는 것은 흠모했던 어른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며 기적(妓籍)에서 이름을 내렸다.

그리고는 고향마을 두항리에 초막을 짓고 수절하며 외롭게 살았다.
단숨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공직에 있는 탓에 그럴 수도 없는 일.

퇴계 역시 두향을 잊지 못했다.
고매한 유학자의 체통과 뭇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드러내놓고
애정을 표하진 못했지만  편지는 자주 주고받았다.

퇴계는 풍기로 옮겨와 1년 만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안동으로 낙향했다.
두향과 헤어진지 20여년, 일흔 나이(1570년)에 몸져 누었다.
인편에 소식을 접한 두향은 멀리서나마 정화수 떠놓고 눈물로 기도했다.
결국 그해 음력 12월 “저 매화나무에 물을 잘 주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그렇게 세상을 떴다.

퇴계의 부음을 접한 두향은 소복차림으로 나흘을 걸어 안동에 닿았다.
하지만 먼 발치에서 남몰래 빈소만 바라보고 눈물지으며 돌아서야 했다.
단양 남한강변 초막으로 돌아온 두향은 곡기를 끊고 슬피 울다가
결국 남한강에 몸을 던져 애닯은 생을 마감했다.

짧은 사랑 긴 이별, 못다한 사랑을 품고 간 두향,
퇴계와 함께 노닐던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그녀의 무덤은
장회나루 건너편 옥순봉 산자락에 지금도 남아 있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면서 “물을 주어 잘 가꾸라” 당부했던, 퇴계매(退溪梅)는
바로 한국은행 1천원권 지폐에 퇴계 초상과 함께 선연하게 피어 있다.

둘의 사랑은 매화향기처럼 그윽했지만 그 애잔함은
44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옥순봉에 올라 남한강을 굽어보며 둘의 플라토닉 러브에
흠뻑 빠져들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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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순봉을 뒤로하고 다시 능선 갈림길을 거쳐 구담봉으로 향했다.
구담봉 단애에 걸쳐진 철계단이 아찔하게 눈에 들어온다.
고층아파트 이삿날 뽑아올린 고가 사다리가 연상된다.

 


구담봉 산정엔 산객들로 가득한데 장회나루터는 한가하다.
산정에서 내려다 본 호수면은 그지없이 잔잔하다.
깎아지른 기암절벽의 모습도 거북을 닮았고 물 속의 바위표면에도
거북 무늬가 있어 구담봉(龜潭峰)이다.
거대한 단애의 절묘함에 조선의 묵객들도 거침없이 붓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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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법으로 ‘구담도’를, 심재 이방운은 남종화법으로
‘구담도’를, 단원 김홍도는 실경산수화법으로 ‘옥순봉도’를 남겼다.

이야기가 있는 산길, 옥순봉과 구담봉을 내려와 계란재로 원점회귀했다.
조선 묵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옥순봉과 구담봉의 기암단애를
한번 더 걸음하여 유람선에서 오롯이 느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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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

  1. 데레사

    2016년 4월 13일 at 11:08 오전

    천원짜리를 지갑에서 꺼내놓고 매화를
    찾아봤습니다.
    무심하게 사용한 돈에 그런 의미의 매화가
    있다니….탱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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