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정기념당에서 장개석을 만나다.

대만에서 어슬렁 –  중정기념당에서 장개석을 만나다.<2>

얼마 전,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 본 대만(Taiwan)의 몇몇 곳을, 가이드 설명과 안내 브로셔를 기초해 순전히 내 방식대로 얄팍하게 정리해 보았다. 중정기념당을 찾아 장개석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사진과 유품들을 둘러보며, 재현해 놓은 그의 집무실을 살펴보며, 그가 평생 딱 한번만 탔다던 캐딜락을 눈팅하며, 장개석의 면면을 들춰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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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송미령결혼

장개석을 얘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그의 부인 송미령이다. 굉장히 야심이 많은 여자였다. 한국의 역사인물 중 민비를 닮은 여자로 국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송미령의 집안은 장개석의 집안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대단하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송미령 집안처럼 대단한 집안도 드물다. 모두 6남매로 아들 셋, 딸 셋이다. 큰 딸은 송애령, 둘째는 송경령, 막내가 송미령, 그리고 아들 중 하나는 송자문으로 장개석 시절 때 외무부장관을 했었다. 송애령의 남편은 중국 최고의 부호, 공상휘다. 송경령은  중국의 국부, 손문을, 그리고 송미령은 장개석을 남편으로 맞았다.

송경령이 손문과 결혼할 때 손문은 홀애비였다. 이미 결혼을 두번 했었고 자식까지 있었다. 손문의 당시 나이는 40대 후반, 송경령은 20대 중반이어서 결혼 때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그런데도 송경령은 나라를 사랑하는 손문 선생이 부패한 왕조를 몰아내고 민주공화국을 설립하는데 굉장히 애를 많이 쓴다는 걸 보고 감동하여 그와 결혼해 곁에서 내조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13세자매

장개석이 먼저 송미령에게 구혼을 했다. 장개석은 잔머리를 쓴 것이다. 손문 선생과 한집안을 이뤄야만 자신이 분명히 손문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아 챈 것이다. 그래서 그 집안을 들락날락 하다가 손문의 처제인 송미령을 눈여겨 보게 됐다. 당시 장개석은 이미 두번의 결혼 경험은 물론 첩도 하나 있었다. 자식도 있고 그리고 나이도 송미령보다 열세살이나 많았다. 그런데도 구혼을 했다.
송미령은 그런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이 싸가지가 좀 있어 보였던 모양이다. 권력을 장악할 것 같은 기미가 보였단 말이다. 송미령 역시 권력욕이 많기에 결심을 굳혔다. 결국 총통 부인이 된 것이다. 이처럼 송씨 집안은 애국심 그리고 재력, 권력을 다 거머지게 됐다.
송미령의 부친은 광동성에서 무역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손문이 혁명을 할때 혁명 자금을 넉넉히 지원했다. 그만큼 손문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나중에는 장인이 되었지만.

장개석이 한번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게 된다. ‘서안 사변’이 그것이다. 중국에는 군벌들이 있었다. 삼국지를 보면 제후국이라 하여 각 지역마다 토후들이 자기들 지역에서 왕노릇을 했다. 이게 후세에 와서 군벌이 됐다. 이때 군벌 중 장학량(張學良)이라고 있었다. 아주 호남형으로 103세까지 살았다. 장학량은 당시 중국의 10공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과거 7공자라고 있었다.(돈 많은 집 자식들이 흥청망청 생활했다는…) 중국도 이와 비슷했던 모양이다. 10공자 중 한 명이던 장학량은 동북 하얼빈지역의 군벌이었다. 당시 군벌을 일컬어 비아냥거리는 말로 ‘당나라 군대’라 불렀다. 일본과 전쟁에서 계속 밀리는 오합지졸이었다는 뜻이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계속 뒤로 밀리자,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장학량은 공산당 측 주은래와 상의해서 장개석을 서안으로 불러들였다.
“형님 이쪽으로 오셔서 회의 한번 합시다.” 장개석이 물었다. “무슨 회의?” 장학량이 답했다. “일본과의 싸움에 대해서~”

14장학량

국민당의 장개석이 달려왔다. 장개석은 반일 투쟁을 지양하고 오로지 공산당 홍군 토벌에만 몰두했다. 이를 못마땅히 여긴 장학량은 한걸음에 달려온 장개석을 잡아 가뒀다가 죽이려고 했다. 공산당인 주은래에게 장개석을 죽일까 말까를 상의했는데 주은래가 죽이지 말자고 했다. 왜? 주은래와 장개석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장개석이 초창기 중국 육군사관학교(황포군관학교) 초대 교장이던 때 주은래는 정치주임교수였기에 매일같이 얼굴 맞대고 회의하던 관계였다.
주은래의 뜻대로 장학량은 장개석을 불러내 셋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했다. 결론은 “좋다. 그럼 우리 함께 일본과 싸우자”였다. 그때 처음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본을 치기 위해 뭉쳤다. 이른바 국공합작인 것이다.
그렇게하여 장개석은 남경 정부로 다시 돌아오는데, 이때 장학량이 따라 나섰다.
“형님, 내가 형님한테 악감정이 있는게 아니고 오로지 국가 안위를 걱정하는 충정심에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형님을 남경까지 호송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함께 남경에 도착하자, 장개석은 곧바로 부하들에게 명했다.
“야! 쟤 잡아! 그리고 쳐 넣어!”
그리고 군사재판을 열어 10년 형을 때렸다.

그날부터 장학량의 비운의 시간은 시작됐다. 장개석은 전쟁을 피해 후퇴할 때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학량만큼은 끝까지 데려갔다. 하물며 1949년에 대만으로 후퇴할 때도 장학량을 끌고와 가뒀다. 장개석이 죽기 며칠전까지도 아들인 장경국과 고관대작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용인 즉 “저 새끼는 절대 풀어 주면 안돼!”라고.
그래서 아들 장경국도 그를 끝까지 연금시켰다. 1980년도 초반, 장경국이 죽는 날 장학량이 드디어 연금에서 풀려났다. 그때 이미 80을 바라보던 나이였다. 불행한 사람, 장학량은 조카가 있는 하와이로 가서 여생을 마쳤다. 무려 103세의 나이로.
뭣하러 장개석을 호송해 준다고 거기까지 쫓아 갔다가 죽는 그날까지 생고생 했을까? 이처럼 장개석의 뒷끝 작렬이 어마무시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공합작이 되면서 장개석은 육해공 총괄 합참의장이 됐다. 모택동 군대한테는 중국의 북쪽을 맡겼다. 모택동은 똑똑했다. 자신의 정예부대 1백만을 내몽골 쪽에 감춰 뒀다.”너넨 맨날 잘 먹으면서 체력단련하며 대기하고 있도록!”
그런 다음, 모택동은 일본과 싸울 때는 게릴라전을 택했다. 옆에서 빵 쏘고 도망가는~ 식이다. 이러니 일본은 모택동을 끝까지 쫓지 않았다. 일본의 주적은 장개석의 중앙 부대였기 때문이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기 전까지 장개석의 부대는 거의 70%가 궤멸했다. 그런데 모택동의 부대 1백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자마자 모택동은 장개석의 부대 안에 고정간첩을 여럿 심어 놓고서 내부에서 전쟁을 일으키게 선동했다. 장개석은 어쩔 수 없이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장개석은 이미 전쟁할 기운이 없었다. 부대 손실이 너무나 컸다. 또 내부에서 선동이 있었고 외부에는 모택동의 1백만의 군대가 있었기에 장개석은 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대만으로 쫓겨나오게 된 것이다. 장개석이 죽는 그날까지 한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가장 후회하는 대목이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7년 7월 7일 at 4:04 오후

    이제나 엿날이나 정치권의 다툼은
    참으노 야비해요.
    저도 중정기념관에서 송씨네 세자매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었지요. 우리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가이드설명이
    재미나서요

    • 카스톱

      2017년 7월 10일 at 2:02 오후

      근래 한-중 갈등을 대만은 어떤 기분으로 지켜볼까, 가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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