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뉴욕 방문기(1)

70주년을 맞는 광복절 전날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됐던 8월의 연휴에 뉴욕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14시간 비행 끝에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매운탕으로 점심을 먹고, 버스에 실려 맨해튼까지 왔을 땐 상당히 지쳐서 빨리 호텔가서 쉬고 싶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배를 타고 바라본 맨해튼의 풍경이 피로를 어느 정도 씻어주었다. 하늘이 파랗다. 9.11 테러로 무너진 쌍둥이 빌딩 자리에는 세계무역센터 새 건물을 하나만 지었다고 한다. 그 옆에 조성했다는 추모공원 옆으로 버스가 지나갔는데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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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어머니는 이런저런 잡학 상식 같은 것들을 퀴즈처럼 알려주셨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문답(問答)중 하나가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하던 것이다. 20여년 지난 지금은 엠파이어 스테이트보다 높은 빌딩이 여기저기 많이 생겼고 어쩌면 그때도 이미 최고(最高) 빌딩이란 타이틀은 다른곳에 내준 상태였는지도 모르겠으나, 그때부터 내게 뉴욕이란 세계 최고의 빌딩이 있는 별세계라는 이미지가 생겼던 것 같다.

뉴욕에서 1만1000km 떨어진 한국에서 ‘뉴욕 스타일’ ‘뉴욕 치즈케익’ 같은 수사(修辭)를 자주 본다. 김승옥은 서울이 모든 욕망의 집결지라 했는데, 이쯤되면 뉴욕이란 곳은 욕망의 집결지 정도가 아니라 그냥 욕망 그 자체인것 같다. 멀리 작게 보이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새 세계무역센터 사이에 구름이 낮게 걸렸다. 팔뚝을 쑥 내지른 모습 같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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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많은 영화 중에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대부2’다. 어린 비토가 이태리를 떠나 뉴욕으로 들어오는 도입부, 그 세피아톤의 색채가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비토가 입국심사를 받고 작은 방에 머물던 장면이 기억나고, 화면에 자유의 여신상이 보였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아 찾아보니 비토가 내다보는 창밖으로 여신상이 흐릿하게 비치고 있었다. Picture-210

그 시절 미국을 찾아왔던 다른 이민자들이 그랬듯 비토도 오랜 항해 끝에 자유의 여신상이 눈에 들어왔을 때 신대륙에 왔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그땐 신체건강하면 누구에게나 입국을 허가했다던데 미국 가기 어려워진 지금은 꿈 같은 얘기다. 지금 자유의 여신상은 이민자들 대신 유람선 타는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날 맨해튼 날씨는 독특했다. 하늘은 푸른데, 자유의 여신상 부근에만 먹구름이 꼈고 그 사이로 빛살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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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가까이에서 본 여신상은 이렇게 생겼다. 전에는 입장에 제한이 없었지만 9.11 이후로는 사전에 예약한 인원에게만 내부 전망대 입장을 허용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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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늦어서야 호텔에 들어왔다. 저녁 8시쯤이었을 것이다. 그대로 쓰러져 자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짐을 풀고, 한국 시각에 맞춰 발제를 보내고 나니 저녁식사 때까지 씻을 겨를도 없어 세수만 대강 하고 로비에 내려갔다. 이날은 타임스스퀘어에 있는 ‘하드락 카페’라는 곳에 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메뉴판에 적힌 어떤 요리 하나가 2000Kcal이었다는 사실 외에는 이곳이 미국이고 뉴욕임을 실감나게 해주는 것이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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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동부 시차는 한국의 신문 마감 일정에 매우 비협조적이다. 행사 일정을 따져보니 기사 마감을 하려면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는데, 밤 12시에 방에 들어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비행의 피로까지 한꺼번에 몰려와 내리 자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실내에 불을 몇 개 켜두고 알람을 5분 간격으로 여러 개 맞춘 뒤에 눈을 붙였다. 아직 신체의 리듬이 맞춰져 있는 한국 시간이 낮이기 때문인지 긴장했기 때문인지 삼사십분마다 눈이 떠져서 거의 밤을 새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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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취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 한국은 이제 막 편집국 야근자들도 퇴근했을 새벽이었다. 발제도 송고도 당장은 할 수가 없어 잠시 눈이라도 붙일까 하다가 현대미술관에 가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걸으니 20분쯤 걸렸다. 입장료 25달러가 상당히 비싸다고 느껴졌는데, 전시를 둘러보고 나니 아깝지 않았다. 이 미술관은 제대로 다 보려면 적어도 사나흘은 걸릴 것 같았다.

요즘은 거장들의 전시회가 한국에서도 종종 열리는데, 구름같이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작품을 제대로 못 보는 일이 많아 늘 안타까웠다. 우리에겐 좋은 작품을 직접 볼 기회가 많지 않아 어쩔 수 없지만, 본고장인 외국은 이렇지는 않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 와 보니 본고장도 별수 없는 모양이었다. 관광객이 너무나 많아서, 맘에 드는 작품을 차분히 감상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나는 일하다 말고 나왔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마음이 편치가 않아서 금방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뉴욕에서 한 일 중에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되는 것은 짬을 내서 현대미술관에 들른 일, 가장 아쉬웠던 것은 편한 마음으로 찬찬히 둘러보지 못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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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삼성전자가 이날부터 시작한 광고를 카메라에 담으려고 타임스스퀘어에도 잠깐 들렀다. 파란 배경에 독수리가 나오는 저 자리에 삼성전자를 포함한 몇 개 기업이 돌아가며 광고를 하는데, 삼성전자는 신제품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는지 새하얀 배경을 쓰기 때문에 노출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코카콜라 아래쪽에는 현대자동차 광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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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벽에 걸린 전광판에 자신들의 모습이 나오는 걸 보며 손을 흔들고 있다. 그 옆을 현지인들이 바삐 지나간다. 세계 각국에서 온, 피부색도 나이도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마구 뒤섞여 있다. 맨해튼 지역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800종이 넘는다고 한다. 미국을 ‘용광로’라고 한다면 그걸 시각적으로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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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앞에도 왠지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뉴욕타임스 앞 광장이라서 타임스퀘어가 아닌 타임스스퀘어라고 들었는데, 정작 뉴욕타임스 건물은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새 건물을 지으면서 자리를 옮겼다고 들었던 것도 같다. 렌조 피아노가 건물을 디자인하면서 그 앞을 지날 옐로캡들의 색깔을 고려해 노란색 조명을 붙였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것 같다. 거리에서 올려다 본 사무실 천장이 왠지 우리 편집국과 비슷해 보여서, 신문사 편집국이란 어디나 별수없는 것인가 하고 잠깐 생각해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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