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신사’가 돌아왔다

다른 신문사에서 노동문제를 담당하는 한 친구는 영화 ‘인턴’을 보면서 요즘 한창 이슈인 임금피크제나 노년 일자리 문제를 떠올렸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잘나가는 스타트업 사무실에 사과모양 애플 로고가 난무하는 와중에 70세 인턴의 구식 피처폰에만 서글픈 삼성 마크가 보인다는 점에 주목했어야 마땅한 일이겠으나, 솔직히 로버트 드 니로가 보여준 완벽한 스타일에 더 눈이 가는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 패션을 본다면 여주인공 앤 해서웨이에 주목하는 쪽이 좀더 일반적일 것이다. 개봉 직후에 몇몇 해외 매체들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이후 해서웨이가 다시 한 번 스타일 아이콘의 면모를 보여줬다는 식의 리뷰를 냈다. 그도 그럴것이 극중 해서웨이는 의류 쇼핑몰 창업자인지라 시종 세련되고(화려하지는 않다) 감각적인 옷차림으로 등장한다.

그에 비해 로버트 드 니로는 늘 비슷한 수트 차림이다. 스타트업의 남자들은 아무도 수트를 입지 않는다. 드 니로가 연기한 벤 휘태커는 아마 영화에서 유일하게 수트 차림으로 나오는 남자일지도 모른다. 출장길에 나이트가운을 챙겨가고 주말에도 면도를 하는 그는 브룩스브라더스 카탈로그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모습이다. 영화에 등장한 의상이나 소품의 브랜드에 대해서는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어서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상당히 확신에 가까운 심증(?)이 든다. 넉넉한 선에 버튼다운 셔츠가 상당히 미국식이다.

특히 패턴 있는 타이와 셔츠를 함께 매치하는 장면이 자주 나와서 흥미로웠다. 셔츠의 패턴이 클 때는 타이를 잔잔하게, 타이의 패턴이 도드라질 때는 반대로 셔츠를 솔리드에 가깝게 연출해서 조잡하거나 어지러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비슷비슷한 감색 또는 회색의 수트여도 셔츠와 타이의 조합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이 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아마도 의상 담당의 솜씨였을 것이다.

와이셔츠와 넥타이 모두 패턴이 들어있지만 어지러워 보이지 않는다. 비슷한 수트에 버튼다운 셔츠여도 패턴이 달라지면 느낌도 새로워진다. 이미지는 모두 영화 공식 예고편에서 캡처.

와이셔츠와 넥타이 모두 패턴이 들어있지만 어지러워 보이지 않는다. 비슷한 수트에 버튼다운 셔츠여도 패턴이 달라지면 느낌도 새로워진다. 이미지는 모두 영화 공식 예고편에서 캡처.

드 니로는 영화에서 ‘오래 입어 수트가 몸의 일부처럼 되어버린 사람’을 잘 표현해냈다. 이건 수트 디자인이나 핏이 좋다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그런 면모는 그가 ‘손수건은 빌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장면이나, 완벽하게 꾸며진 드레스룸(스위치 누르면 돌아가는 넥타이 걸이는 좀 부럽다)에서도 드러나지만, 나는 벤이 보여주는 사소한 동작에서 더 확실한 느낌을 받았다.

영화에는 벤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때마다 그가 수트 윗 단추를 잠그는 것을 볼 수 있다. 서 있을 땐 재킷 단추를 채우는 게 습관이 된 것이다. 시나리오에서 원래 이런 것까지 일일이 지시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감독의 의도였든 배우의 애드립이었든, 벤 휘태커라는 인물의 면모를 보여주기 위한 디테일이었을 것이다. 벤은 경험과 연륜을 갖췄고, 자신이 일했던 공장을 인수해 회사를 차린 어린 상사를 존중할 줄도 안다. 이런 사람이 신사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남성복의 화두는 ‘클래식’이었고, 실루엣이 날렵하고 곡선을 강조하는 이태리식 스타일이 그 바람을 대표해왔다. 급기야는 ‘바지 밑위가 짧아야 클래식’ ‘밑단 통이 17cm면 클래식’이라는 식의 웃지못할 오해까지 불러일으키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직선적이고 넉넉한 미국식 스타일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실용성을 중시하는 미국에서는 옷도 헐렁하게 입기 때문에 스타일은 별볼일 없다는 정도로 쉽게 넘겨버렸던 것이다.

‘인턴’은 그런 대접을 받아왔던 ‘미국 신사’의 復權과도 같은 영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재단된 더블브레스티드 수트 차림으로 우산을 휘두르던 영국 신사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Intern_Icon_thumb인상깊었던 소품 한가지. 가방이다. 그가 들고다니는 가죽 서류가방(attache case)은 40년이나 돼서 낡았지만 여전히 “최고의 제품”(언제 산 거냐고 묻는 젊은 동료에게 가방을 소개하는 벤의 대사)이다. 비싼 가방을 사는건 돈이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같은 가방을 40년씩 들고다니는 것은 아무나 못 한다. 오래된 물건, 함께한 세월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벤이 동료에게 제품 이름과 생산 연도를 말해주는 장면도 있는데, 실존하지 않는 브랜드인지 내가 몰랐던 것인지 얼른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가방은 영화 공식 로고에 들어갔다.

첫 출근 장면에서 벤의 가방은 다른 젊은 인턴들과 대조를 이룬다. 젊은 친구들이 책상 위에 이어폰이며 USB 포트며 각종 문명의 이기들을 꺼내놓는 사이 벤의 가방에선 펜, 알람시계, 전자계산기 같은 물건들이 나온다. 그런데 시대착오적인 느낌은 아니다. 어쩌면 이런 물건들이란 우리가 그래도 인간적인 리듬에 맞춰 살던 시대의 유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회사에 나가 일하고,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생활. 이제 직장을 취미로 다니고 있거나 남다른 의지가 있거나, 하다못해 ‘미움받을 용기’라도 있지 않고서는 그런 삶을 살기가 쉽지 않게 되어버린 터라 벤의 가방이 더 멋져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미국 신사’가 돌아왔다”에 대한 1개의 생각

  1. 유민호

    나는 이영화 빼고 로버트 드니로 나오는 영화는 거의 다 보았는데, 거의 모든 그의 배역은 강한 남부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계 인물 캐릭터이다. 완전한 미국 시민의 캐릭터를 연기하더라도 강한 이탈리아식 개성은 그대로 남아있다. 사실 그는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캐릭터를 뒷 받침하는 그의 생활 양식 역시 이탈리아 풍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 영화 역시 이탈리아 냄새나는 패션일 거다. 미국식 신사라는 게 어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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