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언제나 시작page18:유년의 기억 속으로/봉숭아

봉숭아

김상옥님의<봉숭아>를읽으면그때마다콧나루가찡해오는것을느낀다.

비오자장독간에봉숭아반만벌어

해마다피는꽃을나만두고볼것인가

세세한사연을적어누님께도보내자

누님이편지보며하마울까웃으실까

눈앞에삼삼이는고향집을그리시고

손톱에꽃물들이던그날생각하시리

양지에마주앉아실로찬찬매어주던

하얀손가락가락이연붉은그손톱은

지금은꿈속에본듯힘줄만이서누나

우리가어릴때는집집마다꽃밭이있었다.

턱없이작은집에도눈섭화단이라도있어서계절마다색다르게피는꽃을

마루에앉아완상하곤했다.

담벼락밑이나화단언저리,또는시조에서처럼장독간근처에

여름이면단골손님처럼빠알갛게봉숭아가피곤했다.

우리는봉숭아꽃물들이는날을따로받았다.

여럿이시간을함께잡아야꽃물을더잘들일수있었다.

토끼풀처럼생겼는데신맛이나고좀더연한초록빛이나는

"싱금"이란풀을뜯어넣고,백반한덩이를넣고,

봉숭아꽃을듬뿍따넣고이파리도따넣고

옴팍한절구에다함께쿵쿵짓찧는다.

붉은물이질컥절컥해지면서꽃과잎들이부드럽게짓이겨졌을때

그반죽을손톱위에얹고아주까리잎이나헝겊으로칭칭싸매어

흐르지않게실로빙빙돌려감아야했다.

이실로매어야하는작업은혼자서는못하므로공동작업이필요했다.

그리고이러한과정이그리간단하고쉬운작업은아니었으므로

모든준비를주도면밀하게계획해야했다.

손가락열개를다들이는아이도있었지만

나는항상무명지와새끼손가락만물을들였다.

지금도손가락에매니큐어를못바르는촌스런성격때문이었는데

다섯손가락이다빨갛게되는것은부끄러운노릇이라고생각했다.

손톱에배인봉숭아꽃물은손톱전체가온통빨갛게되었을때보다

손톱이다자라,끝부분에쬐끔,

초생달처럼남았을때가가장예쁘다고생각한다.

산너머꼴깍넘어가는석양무렵의태양처럼,

아니면어두운밤을다밝히고드디어모습을감추어가는새벽녁의달처럼,

손톱에서그생명을다하고그붉은빛이사위어져가는

마지막손톱의끝언저리에서더예쁘고앙증맞다.

고단한삶을다살고,죽음을맞게되는어느날도

무명지와새끼손가락에빠알갛게조금남은봉숭아꽃물처럼

아름다움을지닌임종을맞을수는없을까?

<이어지는글은‘공동수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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