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로맺어진옥포와천주교의인연은병인박해를지나면서선교로이어진다.
복음의씨가처음으로옥포에떨어진것은병인박해직전으로
리델신부와순교자구다두가거제도전교를위해다녀간것으로알려져있다.
그후병인박해(1866-1873년)중에영일군기계면지촌리가고향인윤사우(尹仕佑,스타니슬라오)가
양산’대처’를거쳐이곳진목정(옥포리)에와전교활동을폄으로써활발하게포교활동이이루어진다.
순교자윤봉문요셉은윤사우의둘째아들로거제의사도로서형경문과함께교회회장직을맡아
신자들을모아교리를가르치고전교에힘쓰는한편자신의수계(守戒)에도열심이었다.
그리하여1887년11월병인박해후처음으로당시대구본당초대신부였던김보록신부가
판공성사를주기위해거제를방문하자그는자신이가르치던예비자15명을영세입교시킨다.
그러나그한달후뜻밖에도이지역에는공식적인박해가아닌사사로운탄압의바람이일어
윤봉문은진수부,주남이,한상필등과함께포도청으로끌려간다.
이때대부분의신자들은모두뇌물을주고풀려나지만
윤봉문은천주학의괴수라고해서통영으로압송된다.
수차례에거친문초와혹형을받으면서도그는배교와밀고의강요를결연히물리치지만
결국진주로보내어처형하라는결정이내려진뒤진주로이송된다.
굵은칡넝쿨로발목을얽어끌고갔던이길에서그는칡넝쿨에살이뭉개지고피가흘러참
혹하기이를데없는광경이었다고전해진다.
진주에이르러3개월동안감옥에갇혀있던그는드디어1888년2월22일올가미에목이졸려순교했다.
그의시신은진주비라실(長在里)에안장됐다가후에유족들에의해
지금의옥포인진목정족박골산으로이장된다.
그후부터진목정의외교인들은천주학쟁이가죽은동네이름이라해서’진목정’을’국산’으로고쳤고,
후에는지금의옥포(玉浦)라불렀다.그의무덤에는1978년2월24일기념비가세워졌다.
안내판에는앞으로성역화작업이이루어져곧좋은곳으로이장할계획이니
기도를부탁한다쓰여져있었다.온김에그곳에도가보려고본당에물으니
아직계획단계이니좀더오래기다려야할것같다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