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깊은 산속, 여주 부엉골 신학교 터


1.여주부엉골:경기도여주군강천면부평리581세종천문대뒷산(여주성당)

새벽에목욕부터하고순례길하루를시작한다.

재계하는마음으로정성을다해보자는의미이다.

그래서묵주의9일기도도시작했다.11일째.

우리가여주세종대학까지갔을때는아침7시30분쯤이었다.

서리가하얗게내려,떨어진나뭇잎위를덮었다.

그건바로예술품이었다.남편은성지보다는그그림들에관심이더많았다.

서리가없어지기전에사진을더많이찍고싶어했다.

햇살이막피어오르고있기때문에서리는순식간에사라질것이다.

우리일생에서좋은것은얼마나순간적이던가?

남한강에서피어오르는아침물안개가아득한선경이지만이또한잠깐이리라.

신학교터를찾아헤매는일만아니면우리도그그림속의일부로

정말잠깐동안은얼마나아름다운그림이었을까?


.부엉골은조성이된성지가아니므로찾는데어려움이따르리란건미리알았다.

너무일러서여주성당에전화를해도받지않았고,

안개자욱한이른아침에지나는트럭에게물었지만

기사는너무바빠말들어줄시간도없다고그냥내뺐다.

안내책자를자세히보아도확실하지가않다.

수련원뒷산인것같은데수원교구의성지지도에설명하는말이

강을따라난길을1킬로미터걸어가다우회전이라했다고

베드로씨는자꾸만왼쪽의강으로가는길이맞을거라했다.

나는박해를피해숨어서만든학교가산속에있을것같아

오른쪽의산으로가는길로가야한다고우겼다.

그런데그길을왔다갔다해보았지만길은없고밭둑만나온다.

“형수님도고집만피울게아니라제말을좀들어보셔요.”

제법큰소리가터져나온다.

우리가함께순례를선택한지가벌써석달여…..왜안그러겠는가?

새벽부터나와서명색이기획한다는사람이자세한준비도없이이리헤매고있으니

운전하는사람으로짜증인들왜안나겠는가?

미리미리완벽하게준비하지못한내탓이라생각하며얼른차에서내렸다.


며칠동안의짧은여행에서도동반자들은작은갈등을일으키게되는경우를흔히본다.

잦은여행길에서흔히겪는일이다.

피곤함,긴여정에일어나는일종의권태같은것,

아니면서로너무잘알기때문에일어나는편안함이어떨때는서로에게상처를주고받기도한다.

금방씩씩하게걸어오며언제얼굴을붉혔냐는듯이산길로오고있는베드로씨를보며

참으로좋은성격을가진그부부들과순례하는일에진정으로감사했다.

그들이아니었으면이순례길이어쩌면불가능했을지도모르는일…


아이들이왁자하게오고가는천문대쪽으로간다.

천문대학은청소년수련원을함께운영하여

아침식당에아줌마들이부지런히어린학생들의밥시중을들고있었다.

“아줌마,부엉골이어디예요?

“거긴왜요?”

“거기천주교신학교터가있었다네요.”

이상한사람다본다는얼굴로빤히쳐다보더니

“거기아무것도없는데요.”

“길은나있어요?”

“농장옆으로가면산으로가는길은너무잘나있어요.그런데정말거기는…“

그아줌마는건물의옆방향을손가락으로가르켰다.


정말길은잘나있었다.

오른쪽으로몇발자국만가면비포장이지만좋은길이나오는걸,

그몇발자국을떼지않고서오른쪽입구가움푹패이고꼬부라져있으니까길이없는줄알았던거다.

사람들은늘자기눈으로보이지않는건,

옳은게아니라고생각하는맹점이있다는걸깨닫는다.절대로우겨선안된다니까.

세상엔내가모르는일이너무많고,

내가모르는걸너무나당연하게아는사람이있다는걸새삼느낀다.

세걸음만더떼면바로거기에길이빤히나있는걸..거기길이어디있느냐고

바보같이길을가르쳐준다면서아줌마들을원망도했다.

큰자동차바퀴가움직인흔적도보였는데

울퉁불퉁하여승용차로는어림도없는길이었다.

그렇게호젓하고아름다운산길을일찍이본적이별로없다.

산으로이어지는길은점입가경이다.

부엉이가부엉부엉울어댈것같았고,

커다란장끼가아름다운날개를퍼덕이며눈앞으로퍼더덕날아간다.

단풍은또얼마나아름다운지…

하얀돌들이일정하게깔린사잇길을걸어올라가다가저기가신학교터인가,

아니면여기가…마음대로상상했다.그러나그곳은산사태가일어나

흘러내린물길에깔린돌인것같았다.

다시그곳을내려와긴임도를따라산속으로갔다.약2킬로미터지점에갈랫길이있다.

아무래도양지쪽일것같다며햇살이비치는오른쪽으로걷기시작했다.

지천으로깔린밤송이들이바지를찔러댔다.

더러알밤도밟혔다.마지막지점계곡옆에다허물어져가는빈집이하나있다.

그집만보고그신학교터에벌써다른사람이차지했나상상했다.

여름장사를하던집으로보였다.“서울뚝배기”

등산객에게커피나팔고라면이나간단한요리를해서파는가게터.

고추도,피마자도서리를맞아잎이시들었는데유독구기자는

붉은열매몇을달고싱싱하다.

순교자들의피처럼…

삐딱하니상도기대어서있고휴대용가스렌지도박스에가려져있다.

여름용가재도구들이먼지를덮어쓰고다시돌아올여름을기다리며있었다.

허무한마음으로기도만하고약1킬로미터쯤내려오는데올라갈때의갈랫길에서

남자둘이멈추어섰다.

“여기에물도흐르고좀넓은걸보니이곳이집터인것같구려.“

그렇게말하니그래보였다.

새로임도를닦고있었던왼쪽길과양지라고말하던오른쪽길사이에제법넓은공터가있었다.

여기에있었다는예수성심신학교는1885년10월28일개교,1백여년의온갖수난과역경을이겨내면서성소를키워내오늘날의가톨릭대학교신학대학을있게한모태이다

조선교구제7대교구장블랑주교는페낭신학교의한국학생들이그곳의기후와풍토를이겨내지못해그들의철수가시급해졌고이미1884년에일부가귀국하게됨에따라신학교의설립을서둘러야해서이깊은산속에낡은집몇채로사서신학생7명으로시작했었다고페낭신학교에있는"부엉골학생명부"에기록되었다한다

최초의국내신학교였던부엉골신학교는그러나그리오래운영되지는못했다.

시설이좋지않은데다학생수도얼마되지않았고

그동안콜레라로인해한문교사1명과학생1명이사망한다.

그러는동안한불조약이체결,비준되면서블랑주교는신학교를다른곳으로옮길계획을세우게된다.

그리하여개교후2년이지난1887년봄,부엉골예수성심신학교는용산함벽정,

지금의성심여중고,커다란조선가옥에꾸며진새보금자리로옮겨졌다한다.

안타까운일은표지석하나라도,안내표지판하나라도그곳에있어서순례자들이

너무헤매지않게했으면좋겠다는생각을했다.수원교구차원에서…

얼마나박해가심했으며,또얼마나신학교설립이절실했기에

이깊은산속에학교를지어달랑일곱명의학생들로운영했을까?

바스락거리는낙엽밟은소리속에저물어가는가을의소리,

순교자들이죽어가면서도신앙을저버리지않았던신음소리가들리는듯했다.

벽안의신부님이이깊은산골에서어린학생들을모아놓고수도자의길을가르치셨다니…

청소년수련원에서막나온한패의어린학생들이왁자하게놀이기구를타려고지도자를따르고있었다.

말한필이유유히좁은농장으로난길을가로질러지나간다.

오늘의아이들은이렇게재미있게노는것도돈을들여이런시설을찾고있는데…

아침7시에집을나서서11시가다되어가고있었다.아침겸점심을먹으면서

배고픈것도모르고산을헤맬수있는힘이남아있다는것은참으로신비였다.

밥시간5분도못넘기는남편의성정으로…

아무것도보지못했지만우린모든걸다본듯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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