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한덕골교우촌과이윤일요한성인의묘터
용인시이동면묵4리(031)332-298=천리성당
이윤일성인의묘터
가깝다는핑계로제일늦게찾은성지,
김대건신부님과최양업신부님의흔적이있는곳이라발길을재촉했어야했다.
아침일찍지도를가지고다녔다.올들어가장춥다는날.
쌀쌀한바람이코끝을에어내는듯하다.
저수지앞에서이윤일요한성인의묘터안내바위가서있다.
너무나가파른산길580미터란한다.
1킬로도안되니까설마멀면얼마나되랴?
그러나숨이가쁘다.깔딱고개에는줄을쳐두고십자가의기도대신
싯귀가적혀있다.
"바보라고부르리까순교자라부르리까
배교한다한마디면살수도있었건만
때려도비틀어도그한마디아니하고…"
당시의순교현장을그려놓았고,지금의우리마음가짐을비판했다.
"칼질없는현대순교사랑실천제일이라
나먹을때굶는이웃나웃을때우는이웃
가난한부자있고돈많은빈자있네
내눈들보못보고서남의눈티크게보고
이웃사랑하기커녕미워하고헐뜯었고"
마른나뭇잎이바스락거린다.
이싯귀를읽으며울먹울먹.아무도없는적막한산길에서눈물을글썽인다.
땅은얼어서얼음이지표면으로솟아올랐다.
밟으면빠드득빠드득소리가난다.
제대로신발을갖춰신고오지않아서경사가가파른산길에서
몇번이나미끌어져엉덩방아를찧었는지모른다.
이곳은그분의묘가있던터인데,순교사적지로꾸며놓고있었다.
이깊은산골동네에박해를피해그의동생이살았던곳이었단다.
성이윤일요한(1812-1867)
1812년홍성에서태어나1865년경남상주갈골로이주했다가부친별세후
문경여우목교우촌에서공소회장을하면서30여호를입교시켰다.
1866년병인박해로교우30여명과함께문경관아로끌려가3일간모진형벌을당한후,
다시상주로끌려가배교를강요받았으나기도와묵상으로이겨냈다.
사학의괴수로지목되어1867년1월4일사형선고를받고
대구관덕정에서1월21일,마지막음식을들은뒤주머니에서돈몇푼을꺼내어
희광이에게주면서단칼에베어달라고부탁했다한다.
유해는이토마스와아들이위서에의해대구비산동에매장되었다가,
경부선철도착공으로용인시이동면묵1리에살던그의동생이시영씨에의해
이곳묵리산32-1로이장되었다.
1976년6월24일미리내무명순교자묘지로이장,
1987년1월21일사후120주년미리내에서대구관덕정으로모셔
대구대교구제2주보로선포되었다.
1968년순교복자,1984년5월6일성인으로시성되었다.
한덕골성지
초기천주교역사에서용인은아주중요한역할을했던지역이다.
이천이나안성처럼들이많지않고,광주처럼서울과아주가깝지도않으며,
골짜기가깊고수해나한발의피해가상대적으로적은지역이기때문이다.
한덕마을도천주교박해시절천주교신자들의피난처였고김대건신부가사목(司牧)하기도했던곳.
은이와해곡을거쳐미리내로이어지는산줄기를따라
천주교신자들의교우촌이형성되어있었기때문으로생각된다.
넓은잔디밭에십자가를중심으로김대건성인과최양업신부의동상이세워져있는
한덕골성지,
천주교교우들이박해를피해모여들고교우촌을이루고살았던사적지이다.
한국인첫사제인김대건(안드레아)신부가족들은박해를피해이곳으로피난와서,
마을근처성애골(현재매몰되었음)골짜기에들어가산(生)나무와산나무에칡으로얽어매고
억새풀을덮고살았다는이야기가전해지고있다.
한국인두번째사제인최양업신부는1849년4월15일중국상해에서사제서품을받고
이듬해귀국하여이곳에서둘째큰아버지와어린동생들을눈물로상봉하였다.
두분다관련되는곳이기에두분의동상을함께모셨다.
한덕골성지출신순교자로는성김대건신부와부친김제준(이냐시오)성인과
김시몬(1870년순교,40세),김마리아(1866년순교,42세)등이있다.
한덕은한덕골에서비롯된이름으로’한+덕+골’로풀어볼수있는데,’
한’은크다는뜻을가지는우리말이고’덕(德)’은역시크다는뜻을한자로옮긴말이며
골을골짜기를가리킨다.따라서한덕골은큰골짜기라는뜻을가진다.
한덕이라는땅이름도세월이흐른뒤에는김대건신부같은큰덕을두루갖춘성인이
가르침을펴던곳이기때문에지역적인위치나형태나지역의성격을반영한이름아니겠는가?
일명광파리마을이라고도했다한다.
한덕은신원컨트리클럽아래쪽에있는마을로적동저수지위다.
묵리는불과몇년전까지만해도아주교통이불편했던오지로
옛날에는천주교신자들의피난촌이형성되어있었는데
지금은전원주택이많이들어서있어서예전의마을모습은찾아보기어렵다.
성지로조성된땅은마티아씨가640평을구입하여교구에기증했다한다.
건너편에하얗고거대한마리아상이있어서혹시김시몬,김마리아묘지인가하고찾아갔다.
개인가족묘지라하고그앞에전원주택지조성하는컨테이너집에서
올라가지못하게한다.
그마을에서전해져오는이상한온기….
늙은감나무,다쓰러져가는울타리.
등걸만남을감나무둥치.
그옛땅에새로지은화려한전원주택은우리눈에들어오지않았다.
신앙의선조들이일구어놓은집터와채마밭은지금은아주좋은
전원주택지가되어가고있었다.
후두둑저수지위를나르는물새떼들의몸짓을보면서
쓸쓸한성지의아침을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