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초원을 깨우는 고구려의 말발굽 소리가… 2

글:정수일(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www.kice.ac)사진:천종욱

왼쪽부터정수일선생님,몽골인,강만길교수님

새벽2시반에드디어목적지에도착했다.

이렇게18시간이상의강행군을마다하고찾아온곳은대흥안령바로서편의

내몽고자치구시린궈러멍(錫林郭勒盟)둥우주무친치(東烏珠穆沁旗)의중심도시

우리야스타이시(烏里雅斯太市)다.

찾아온목적은고구려의서경(西境)을현장에서확인하기위해서다.

지금까지의교과서적인이야기로는5~6세기가장강성할때의고구려강역을

서쪽으로는요동지방,동쪽으로는목단강유역에서연해주일원까지,

북쪽으로는쑹화강유역의북만주일대,

남쪽으로는한강이남의충청도와경상북도일원까지로잡고있다.

것만으로도고구려는동북아시아에서가장강성한나라였을뿐만아니라,

우리겨레의역사에서도그영토가가장넓었던나라였음을말해준다.

그렇지만그강역이과연이것으로그쳤을까?더너머로뻗어간적은없었을까?

사실이강역문제는주로중국사서에의존해논한데다가우리자체의연구가부실하다보니

제대로밝혀낼수가없었다.이서경의경우가바로그러하다.

물론,한나라의국경이라는것은유동적이다.항구적일수도있고일시적일수도있다.

설혹일시적일지라도국경은국경이며,따라서그것은그나라역사와위상의반영이기때문에

제대로밝혀져야한다.

바로이때문에자고로역사상의국경문제가날카롭게제기되는것이다.

대체로축소냐확대냐,아니면사실이냐를놓고갑론을박한다.

이제고구려의서경문제를한번따져보자.

지금껏이문제를해명하는데서전거가될수있는단서는몇가지역사적사실에서제공받고있다.

그중가장확실한것은장수왕의디더우위(地豆于)분할통치기록이다.

우리는그단서의현장확인을위해불원천리이곳까지찾아온것이다.

중국사서인<위서>‘거란전’에보면,북위효문제태화(太和)3년,

즉장수왕67년인479년에고구려가몰래유연(柔然)과디더우위를분할통치하려고모의했는데,

그침탈을두려워거란족의한부족인막하불(莫賀弗)족장이차량3000과부중1만,

그리고가축들을이끌고오늘의다릉허(大凌河)동쪽으로남하해북위의보호를구했다고한다.

당시내몽고의시라무렌강유역에서중흥기를맞고있던유연(일명)은

북위에대해통혼을강요하리만큼고압적자세를취하고여러차례북위를침공하면서

호시탐탐디더우위등빼앗긴땅을되찾으려고시도한다.

북위와의대결관계에서동병상련의처지에놓여있던유연과고구려는

마치순치(脣齒)처럼밀착관계에있었다.

한편,고구려의전성기를일궈낸장수왕은중국의남·북조모두와우호관계를유지하면서

두세력을조종하는능란한이원외교를펼치고있었다.

그러나그의재위기간북위와의관계는결코순탄치않고기복의연속이었다.

북위는남조에대한고구려의우호관계를달가워하지않았다.

특히백제가고구려토벌(472~473)을위해북위에파병을요청하고,

고구려가백제에파견되는북위사신의영내통과를불허하는등

백제문제가불거지면서양국관계는악화일로를걷고있었다.

게다가고구려의북방에서흥기한물길(勿吉)이디더우위를,

에도는길을통해북위에사신을파견하는등북위를등에업고고구려를괴롭히고있었다.

그리하여고구려로서는디더우위를장악해그길목을차단하는것이필요했다.

이렇게유연의고토회복과고구려의북방진출및물길통로차단이라는

전략적이해관계가맞물림으로써디더우위를함께공략해

분할통치하는모의에이르게되었던것이다.

그렇다면실천없이그저모의에만그쳤을까.

앞의<위서>기록만보고는판단하기가애매하지만,

그후에나온<수서>등몇가지사서에의하면당시거란족이고구려의침입을받고

북위에‘내부’(內附,보호)를구했다는내용이누누이기록되어있는점으로미루어

고구려가디더우위일원을점령통치한것만은사실이라고판단된다.

얼마동안,어떻게통치했는가는아직미상으로앞으로의연구과제다.

단,분명한것은장수왕이대군을이끌고대흥안령을넘어디더우위까지원정했다는사실이다.

따라서5세기말고구려의서경은대흥안령너머몽골초원의디더우위일원이었다고확언할수가있다.

중국사서에의하면,5세기당시디더우위는이른바16개북적(北狄,북쪽오랑캐)의일국으로서

대흥안령일원에자리한실위(室偉)국에서서쪽으로1000여리되는곳,

즉오늘의시린궈러멍동·서오주무친치에서활동한유목국가다.

기름진초원이라서소와양이많고명마의고장으로서도유명했다.

고구려는여기의비옥한초원에서전마를기르고보충받아기마전투력을더욱강화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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