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스타디 3 눈물의 조선 이민 역사
윤오월중순인가봅니다.

점심후에나가보니상현달이해사하게떠있었어요.

우선정말세계적으로아름답다는와이키키해변을

눈요기하시지요.

사진실력이별로좋진못하지만

파도타기를하는사람들을맞추려고애썼습니다.

서당개3년은더되었는데아직이라죄송합니다만..

우리는와이키키가보이는서쪽해변에서

와이키키를바라보며바다를즐겼습니다.

오아후섬일주를하는1일관광상픔이있다기에다음주수요일,

와까꼬가쉬는날로예약을했습니다.

한국인가이드가따른다는관광인데

민속촌이나,개인이따로가기어려운곳을길즐길수있을겁니다.

자세한안내는그때드리기로하지요.

점심후에와이키키해변이바라보이는서쪽편바닷가.

많은사람들이바다를즐기고있었습니다.

파도타기를즐기는사람.

낚시를즐기는사람.

바닷가잔디밭에서고기를구으며피크닉을하는사람

아이들을작은풀에다담그고일광욕을즐기는사람.

망연히앉아바다를바라보는여행자도보였습니다.

핫볕에앉아서늘어지게하품을하는고양이조차도

해변에걸맞는경치로보였습니다.

졸려서잠을자던리나는바닷가에오더니

늘하던대로신이나면엉덩이를들석들썩하면서

춤을추는버릇을계속하며깔깔대고웃습니다.

호놀롤루의하늘에뜬윤오월의낮달은신비스럽기까지합니다.

오늘은하와이로간우리민족의이민사에대해서공부하기로하지요.

2000년에집계한하와이의총인구는121만1,537명이며,

인종별로는아시아계가41.6%,백인은24.3%,하와이원주민은18%에불과하다하며

이들의약80%가오아후섬에밀집하여살고있다합니다.

하와이인구의약절반에해당하는아시아계.

보이는사람들이모두중국인,아니면일본인,아니면한국인입니다.

이런하와이에서우리의이민사가궁금했습니다.

카메하메하1세에서8대조에이르는하와이왕조는하와이사람이나미국인들에겐중요하겠지요.

이곳까지와서뿌리를내리려고애쓴눈물의우리하와이이민사가제겐더흥미로워서

먼저이민사부터찾아보았습니다.

문명은대개이렇게전파되고교류하면서접변에접변을거듭하고

새로운문화가탄생되는것아니겠습니까?

이곳에7월10일엔가한민족페스티발이열린다고해요.

와이키키해변에서.

이변이없으면가보려고합니다.

그들이자랑하는알로하정신,대단한희생과봉사의정신이지만

이땅에서살아내기위하여혼신의힘을다한아시아계이민자들을잊는다면

하와이를생각할수없을겁니다.

여기옮긴글들은하와이교민사이트및여러사이트에서

제가발췌하여재구성한것임을밝힙니다.

중국일본,등의노동이민을받은바있는하와이농장주들은

조선정부와계속접촉을갖고드디어1902년11월고종이노동이민을허락함으로써

한인노동자들의이민이시작되었습니다.

하와이농장주들은조선의항구도시거리마다하와이의풍물,작업내용,

미국달러로임금을지급한다는광고포스터를붙이고노동자를모집했습니다.

1개월에16달러를지급한다는광고는당시대기근으로

가난과굶주림에시달리던조선노동자들에게는일확천금의기회로여겨졌습니다.

최초모집된한인이민단은통역관2명을포함하여총121명.주로인천개신교인이중심인

그들은1902년12월22일개릭(Gaelic)호를타고‘신천지’를향해인천항을떠납니다.

당시에는한국에서하와이로직접갈수있는길이없어

일본고베항(神戶港)을경유하면서,이곳에서실시된종합신체검사로

20명이탈락하고101명만이고베항을출발,

1903년1월13일하와이호놀룰루항에도착했습니다.

그러나호놀룰루에서,추가로15명이탈락하여

최종적으로86명만이상륙허가를받았습니다.

이들이최초의하와이한인이민자들인데대부분이남자였습니다.

그이후점차많은이민자들이하와이로이민을왔습니다.

그들은가정을이루기를원했으나하와이에한인여성이거의없고,.

당시는동양인과미국인의결혼을금지하는금혼법이있었기때문에

현지인과도결혼할수없었답니다.

그렇다고결혼하러한국을다녀온다는것은당시에는상상할수도없었습니다.

그래서궁여지책으로생겨난것이사진결혼입니다.

중매쟁이를통해사진이오고가고,이사진을들고아가씨가남자를만나러

하와이로건너오는것이었어요.

이런식으로1910년부터1924년까지

약950명정도의‘사진신부’가하와이로건너왔답니다.

최초의‘사진신부’는‘사라최’라는여성으로

1910년11월28일(혹은12월2일)호놀룰루에도착했습니다.

그녀의남편은하와이국민총회장을지낸이래수씨였습니다.

사진만보고결혼하다보니우습기도하고슬프기도한에피소드가참으로많았고

문제도적지않았습니다.

노동이민을온총각들은결혼비용을마련하기위해10~15년동안

부지런히일해서저축을해야만했고,

그러다보니늙은신랑과어린신부가맺어지는경우가대부분이어서

그들의평균나이차이는무려15살이나되었다고합니다.

이렇게해서건너온아가씨들에게기다리고있는것은

연분홍빛희망보다는척박하고힘든고생의나날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경우낮에는사탕수수밭에서노동을했고

밤에는삯바느질을하며오로지자식교육에온힘을쏟았습니다.

1905년하와이마우이섬으로이민을온최용운할머니는

자신의느낌을시로읊었습니다.

.

강남에노든속에

봄바람소식실은배,만리나떨어져있으니

친척들과이별하고조상님의묘버린

슬픔을뉘알리요.

새울어눈물보지못하고

꽃웃어도소리듣지못하니

좋은것뉘가알고

슬픔인들뉘가알리.

그분이읊었던시에는조국을떠나있는그들의답답함과슬픈마음이

절절하게드러나고있습니다.

힘들고고단하고모든일이순탄치않았을사탕수수노동이민자들이지만,

우리의이민선조들은조국을위해쌈짓돈을모아

해방전까지고국에무려300만달러가넘는거금을보냈다고하니

그애국심에절로머리가숙여집니다.

국민회가분열되고동지회가지원한임시정부의추대를받은

대한민국초대대통령이승만은독재정치를이어가려다가

4/19혁명을통해그의시도가무산되자

하와이로망명,1965년7월이곳하와이에서생을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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