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파리 이르쿠츠크
시베리아횡단열차를탄지1년반이넘었습니다.

얼마나추웠으며열차안의불편함,편도선을앓아괴로웠던기억들이생생합니다.

그길을정수일선생님께서지난여름다시다녀오셨습니다.

리나를보느라고가고싶은것참았습니다.겨울과는전혀다른모습,이야기도너무달르고

세계적인대석학의눈으로본시베리아의모습을함께나누고싶어여기옮겨봅니다

ㆍ이광수‘유정’무대…아름답구나,여인들순애보

<정수일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www.kice.ac>

이르쿠츠크역사

이르쿠츠크를상징하는휘장은검은호랑이가붉은담비를물어구제하는도상이다.

검은호랑이는100년전까지만해도이곳에서식한길상동물이며,

담비는부근숲속에사는야생동물이다.초피(貂皮),즉담비가죽은예나지금이나

고급모피로애용됨으로써담비역시진중되는동물이다.

‘산신령’이나‘산군’(山君)으로여겨지는호랑이의영험과위력을빌려

북설한풍거칠지만보물로가득한이땅을번성케하려는뜻이담긴상징물이라고

해석해본다.그래서그런지올때마다신기(神氣)를느낄정도로

훈훈하고정감이들며,‘시베리아의파리’라고하는

그이색적인풍광에매료되기도한다.

지난50여년동안다섯번이나들렀으니,강산이한번변한다는

10년에한번꼴로찾아온셈이다.얼마나변했으며,

또변해가고있는가가늘궁금하다.

그러면서도한구석엔변하지말고그대로였으면하는

‘수구’(守舊)의취향도가끔내뱉어본다.

이번엔지난해(2008년)2월에있은초원로답사에이어꼭1년반만에다시찾아왔다.

사흘전블라디보스토크를출발한시베리아횡단철도열차는

예정시간보다40분늦은오후6시5분에도착했다.

시간은여기가서울과는같고,블라디보스토크와는3시간,

모스크바와는5시간시차가있으니드넓은러시아땅의

동쪽편에약간치우쳐자리한곳이다.

기차역사정문에서현지여행사직원과함께통역안내를맡을

이르쿠츠크대학유학생서군이일행을기다리고있었다.

지난해에는철도대학유학생임군이같은역을맡았다.

학구열에불타낯선이역땅에와서열심히공부하고세계를익혀가면서

여행객들에게안내의도움까지주는젊은이들이정말로대견스럽고고마웠다.

숙소는시내가아니라30분거리에있는라스트비앙트의삼림속

통나무집(올라체카)으로잡았다.이색적인체험이다.‘

북경코야점’(오리구이식당)에서저녁을때우고8시가다되어서

거리에나섰는데도백야탓으로대낮처럼환하다.

이르쿠츠크를상징하는휘장(검은호랑이가담비를구제하는도상).

이르쿠츠크는시베리아도시들중에서유일하게350여년의긴역사를가진

유구한도시이다.곳곳에그러한나이테가오롯이새겨져있다.

1615년러시아의시베리아정복에앞장섰던카자크기병들이

앙가라강변에만들어놓은자그마한기지촌으로부터발걸음을뗀다.

점차동부시베리아정복의거점으로확장되다가1686년에도시로승격하고,

18세기초엽에이르러서는시베리아의정치·경제중심지로부상한다.

1761년에이르쿠츠크원정대가베링해협을정복한데이어

알래스카에앙가라출신의상인과주민들이정착하면서

극동과알래스카전체가이르쿠츠크주의관할하에들어온다.

이때부터이르쿠츠크는명실상부한시베리아의맹주로군림한다.

그러나아직은시베리아고풍이켜켜이쌓인‘러시아의이르쿠츠크’로남아있다.

그러다가제정러시아의압제가극에달한19세기에들어서는유형지로변한다.

아이러니하게도유배되어온데카브리스트들에의해

‘하느님은높고차르(황제)는멀리있으니’죄와벌이무섭지않다고

으쓱거리는탐관오리들이판을치던살벌한도시가‘시베리아의파리’로

파격적인변신을한다.20세기초에는반혁명백군(白軍)의본거지로서

불꽃튀는격전장이되기도했다.너무나처절한역사의현장이다.

지금은비록그현장이역사의뒤안길로사라졌지만,흔적은곳곳에남아있다.

원래건물은모두가목조건물이었으나1879년큰화재로

대부분건물이전소되거나화상을입었다.

참사이후목조건물을대신해석조건물이나타나기시작한다.

그러나‘시베리아의파리’였던그명성만은이어가려는

이곳사람들의끈기있는노력에의해그‘파리풍’만은여전히남아있다.

주택을비롯한전통건물들을유심히살펴보면크기나외양이같은것이

거의없을뿐만아니라,아기자기한색깔과문양은기괴할정도로다종다양하다.

무언가서로달라야신이쉬이식별하고제대로찾아온다는속설은

이곳사람들의믿음이라고한다.

도식을피하고다양성을추구하는이곳만의개성이다.

현대적건물도전통을따라탈러시아적인서구식으로짓고꾸미고있다.

샤머니즘과러시아정교회가추구하는전통양식과유럽의바로크형식이혼합된

이른바‘시베리아바로크’형식의독특한건물이눈에많이띈다.

최근에는200년이상되는건물은문화재로지정해정부가보호관리하고있으며,

오랜건물은함부로허물거나증축하지못하도록하고있다.

인구80만명을품고있는이도시는세계적관광명소바이칼호로가는

필수경유지라는점에서관광전망은밝다.아울러경제·문화적잠재력도상당하다.

교통의요로에서중국이나몽골과의교역이활발하며,

1956년에완공된앙가라수력발전소와풍부한지하자원을바탕으로

동부시베리아의산업을주도하고있다.

교육·문화면에서도동시베리아에서는타의추종을불허한다.

전기세가1㎾당한화로4원밖에안되니아마세상에서가장싼전기료가아니겠는가.

국립이르쿠츠크대학을비롯해30여개의대학과직업학교가있다.

대학등록금은1년에한화로250만원(6만루블)이라고하니우리네보다퍽싼셈이다.

콜차크해국제독동상

첫날밤을보낸올라체카는숲속깊숙이파묻혀있다.

2층으로된20여동의통나무집들이이곳저곳에꼭꼭숨어있다.

층마다방이대여섯개씩딸려있다.방바닥이며벽은몽땅널빤지로짰는데,

널빤지사이사이의틈은자작나무껍질로메우고있는것이이채롭다.

지은지몇해된집인데도구수한나무진냄새가은근히코를찌른다.

한여름이지만창문을열어젖히니시원한숲바람이솔솔스며든다.

괴괴한숲속의밤은나그네의온갖잡념을털어버리고곯아떨어지게한다.

삼림욕을만끽한하룻밤이다.이르쿠츠크주전체면적76만7900㎢가운데서

타이가삼림지대가75%나차지하며,7월이맘때의평균기온이17~19도이니

정말로쾌적한자연환경이다.

올라체카에서시내로돌아와관광에나섰다.

처음찾은곳은앙가라강의지류인우샤코브카강건너편에자리한

즈나멘스키수도원이다.수도원정문밖광장에는세운지얼마되지않은

해군제독알렉산드르콜차크장군의동상이서있다.

1689년에문을연이수도원은이곳과울란우데,치타지역까지를관장하는

동시베리아정교회의본부이다.지금까지줄곧예배가진행되고있는

현행수도원으로서내부는화려한프레스코화로장식되어있다.

눈익은성화도여러점눈에띈다.30여명의신도들이선채로엄숙히예배를근행한다.

수도원에는300여년전(1698년)에만들어진귀중한성경이보관되어있으며,

유명인사들이묻힌공동묘지도함께있다.

이묘역에는알래스카와쿠릴반도를발견한‘러시아의콜럼버스

’쉘리호프와데카브리스트의뜨레베츠키야부인과가족들이묻혀있다.

쉘리호프의묘에는그의업적을기리는지도와컴퍼스,닻,원고등이

청동으로부조되어있다.

이어찾아간곳은한인독립운동가들의체취가스며있는레닌거리23번지옛극장이다.

이곳은1920년대한인독립운동가들을비롯한외국혁명가들이

자주모임을갖던자리이다.벽면에는그러한역사의현장임을전하는동판이

여러장붙어있다.이에앞서1910년대에이범석,이범윤등

연해주에서활동하던독립운동가들이이곳에유배되기도했으나,

그흔적은찾을길이없다.

이르쿠츠크는자유세계를찾아방황하던

이광수의소설<유정>의무대이기도하다.

오늘날은이곳에서고려인으로선유일한러시아연방의원

유리텐(한국명정홍식)이배출되었으며,100여명의한국인교민과유학생들이살고있다.

이어발길을옮긴곳은데카브리스트의박물관이다.

데카브리스트란1825년12월러시아최초로근대적혁명을일으킨

혁명가들을지칭하는데,러시아어에서12월을‘데카브리’라고하는데서유래된말이다.

그래서일명‘12월당원’이나‘데카브리스트사건’으로불리기도한다.

이사건이여태껏사람들의입에오르내리는것은사건자체의의미와더불어

그부인들의기막힌순애보와그들에의해시베리아동토에

자유와근대적문명이전해졌기때문이다.

1812년모스크바까지쳐들어온나폴레옹을물리치고파리까지진격한

러시아젊은장교들은유럽의자유주의와계몽주의사상,

근대문명에감응되어귀국해서는농노제를폐지하고

입헌군주제를수립하기위해1816년구제동맹을결성한다.

이를시발로복지동맹과북방결사,남방결사,통일슬라브결사같은혁명조직을

잇따라뭇고세를키워간다.그바탕에서1825년12월14일원로원광장에서

거행되는새황제니콜라이1세에대한선서식을계기로거사를도모하기로한다.

데카브리스트박물관(발콘스키고택).

그러나사전에발각되어주모자5명은교수형에처해지고나머지120여명의장교들은

시베리아로유배된다.섣달,송구영신(送舊迎新)의꿈은이렇게꺾이고만다.

그러나다음세기에타오를불씨를이암흑의땅에뿌려놓았다.

그것이데카브리스트의자부와긍지였다.그

들모두는장교인동시에열렬한혁명가,정치가들이었으며,

그가운데는이름난시인도있다.시인라에프스키는<명상>(1830년작)에서

자유를찾은감격을이렇게자문자답식으로읊조린다.

“방랑자여,그대는왜당신의매력적인골짜기를야생의숲,바위덩어리,

어두운협곡으로대체하였는가”,

이에대한답은

“이산들속에서,이화강암의절벽속에서,나는힘과자유를숨쉰다”이다.

러시아의위대한시인푸슈킨도남부로유배를가는바람에

데카브리스트의대열에직접끼지는못했지만,그들못지않은열정으로

혁명을동경하고그들과호흡을같이한다.

“무거운족쇄가떨어져나가고,감옥은허물어지리니

자유는,기쁘게문앞에서당신들을맞이하고,형제들은그대들에게검을건네리라.”

그가쓴시<시베리아의깊은광맥속에서>(1827년작)의마지막구절이다.

데카브리스트의한사람인발콘스키백작주택을개조한박물관1,2층에는

그들의활동상을보여주는유물과사진들이빼곡히진열되어있다.

그가운데서너나없이감동을받는것은그들부인의극진한순애보이다.

데카리스트들에게유배형이내려진뒤황실은부인들에게반역자인

남편들을버리고귀족신분으로재가를하든지,

아니면귀족으로서의모든특전을버리고남편들을따라유배지로가든지,

둘중하나를택하라는명을내린다.

부인들은주저없이유형길을택한다.

고대광실에서영화만을누려오던귀족출신의부인들은

설한풍휘몰아치는시베리아대지를1년이상걸어서순정의드라마를펼친다.

유배형을마친데카리스트들과부인들은유배지이르쿠츠크를

그들이그토록꿈꾸던자유와이상의온상으로변모시킨다.

그들에의해이도시가지녀오던역사의무게와문화의결은확달라진다.

그것이오늘로이어진‘시베리아파리’의모태이다.

벽에걸려있는발콘스키부인마리아의초상화,

38세의젊은나이에걸맞지않은겉늙음에서그고난찬일생이읽혀진다.

소박한살림살이와숱하게오간편지,읽은책,하나하나가

혁명가들의불꽃튀는삶과참사랑을증언하고있다.

어린이들을비롯해백발이성성한늙은이에이르기까지전시실을

발디딜틈없이꽉채운관람객들의얼굴은진지하다못해엄숙하기까지하다.

필자는

‘참순애보의현장을찾아서’

란감격어린말한마디를방명록에남기고박물관을나섰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