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유배문학수상소설- 신선의 섬 꽃밭에 놀다12
자암의유허추모비앞에서

여기까지아버지의말씀으로들은옛이야기속에젖어있다가장삼자락을날리며스님오빠가일어섰다.

“우리이제자암선생유허추모비앞으로가자“

바다를바라보며차는미끄러지듯달렸다.

한려해상공원을품은남해바다에는남해사람들을먹여살리는멸치어장죽방렴이담기고

크고작은고깃배도품고있었다.

앵강만,물미도로를지나고나는꿈길에서처럼하얀도포자락날리며다니시다가

왕진가방을들고들어서시던아버지를아직도가슴으로만나고있었다.

아버지가늘지니고읽으시던『자암문집』은어디에두셨을까?

누군가에게전해져내려온다는자암김구선생의『이겸인묘비(李謙仁墓碑)』,

『자암필첩(自庵筆帖)』,『우주영허첩(宇宙盈虛帖)』등진품들은모두누가가지고있으며어디에있을까?

너덜너덜해진자암필첩복사본을보물처럼지니고쓰고또쓰시던우리아버지.

자암의문장은기이하고필력이굳세며위(魏)나라의종유와왕희지(王羲之)의필법을사모하였다.

일찍이중국사람이자기글씨를귀중하게여긴다는말을듣고드디어붓을끊고

쓰지않아서그의필적이세상에전하는것이드물다.《당적보》

그말씀을얼마나들었던지…

자암선생은남해적소에서유배중에부모의상을당했지만갈수없었고

15년의유배생활이풀려석방된후에나중에야복을입고애통해하며

부모의산소에서얼마나울었는지산소의풀이다말라버릴정도였다한다.

애간장이녹아내려석방된지2년만에자암도결국병이나서아까운47세의나이로이세상유람을끝낸다.

차는남해충렬사앞주차장에서멈추었다.

충무공이순신의모형거북선이바다에떠있었다.

충렬사로오르는왼쪽언덕에자암김선생적려유허추모비가있다.

자암김선생적려유허추모비는숙종30년(1704)에김구의후손인김만상이남해현령으로부임하여

김구가생활하였던옛터에세운것이다.

김만상은이곳에죽림서원을세워조상의얼을받들기위해위패를모셔놓고제사를모셨으나

죽림서원은고종원년(1864)에대원군의서원철폐령에따라없어진것으로전하고있다

"선생께서일찍이조정암(조광조),김충암(김정)과함께도의로사귀어,

서로도와가며요순시절같이새세상을만들고자하였으나

시운이닿지아니하여기묘사화가일어나이땅으로귀양왔다.

돌아가는일의형편을알수없어서사람들이모두두려워하고겁을내었지만,

선생은화복에개의치아니하고죽림에작은집을지어시가와술을즐기며한가로이지내셨다."

비석의서체는해서로되어있었고,김만화는찬을짓고

남해현령자암의6세손김만상이글씨를썼으며

사헌부장령김만주가비석을세웠다.

김만주도자암의6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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