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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어릴적꽃같던시절의이야기한편을올려야겠다.
그계기는온종합병원에입원했기때문에알게된
오빠친구남강문우회양동근님때문에그들의홈을들락거리다
이웃집오빠의소식을접하게되었기때문이었다.
방선생님댁.
우리는늘그오빠네집을그렇게불렀었다.
우리집은우리학교진주여중여고가가까운상봉서동에있었다.
이름하여‘공동수도집’
내기억으로는화타편작같은의술을가지셨던우리아버지.
진주원창약국의아버지친구분은아버지의화제라야만
환자에게약을마음놓고지어줄수있다고하셨다.
두분의교유는아버지가돌아가실때까지연결되었다.
공동수도의새벽은정말시끄러웠다.
물동이가줄을서서차례를기다리는데마음이급한출근시각의
아낙네들은더러새치기를하려고들었다.
그런아낙네들을준엄하게타이르는아버지의음성을매일들었다.
그새벽에다투는아낙네들과씨름하며물한동이에
동전몇닢을받는일을아버지가하셨다.
지금생각하면아버지의분위기로는상상이안되는일을
참으며하셨다는생각이든다.
하루종일글만읽으시는선비가할일은못된다는판단에서그일을
접게하시려고엄마는콩나물을키웠고,봄가을누에를키웠고,
밤이면바느질을하셨다.
정말오랜만에꿈을꾼어젯밤에도엄마는재봉틀을달달돌리시다
“아침늦겠네,밥지어야지.”
하시며오빠와나의이불을다시덮어주시고방을나가셨다.
돈버는일보다는공부하고,글쓰시고누가오면먹여보내라고
하신일밖에는아버지는경제적활동은별로인분이셨다.
부지런한엄마의노력으로지금봉래초등학교옆언덕에
조그만국민주택하나를마련하셨다.
그런데그동네에는수돗물이없었다.
이제막가정집에수도가들어올무렵이었다.
우리주택단지언덕을내려오면거기에공동수도가있었으나
우리는무슨연유에선지공동수도도다른집의수도도다두고
방선생님댁에서수돗물을길어먹었다.
방선생님댁은수도가들어오는부자였다.
여학교선생님인키가자그맣고눈이동그랗던누나,그아래로
공부를썩잘하는두오빠가있었고,내한해아래인미순,
내두세해아래의미옥이,그리고지금은이름도기억이안나는
귀여운막내가있었다.2남4녀6남매의유복한가정이었다.
진주농대에다니시던,진주에선알아주는명필이시던
아버지방선생님과,늘인자한웃음을얼굴가득
담으셨던어머니를기억한다.
우리집엔어린심부름꾼아이가있었지만,나보다더어린
그아이가물동이를이는게안쓰러웠던나는
수돗물을나르는일은내가했었다.
“하약국집착한양념딸오셨구나?”
어머니는늘그렇게나를맞아주셨다.
내가물을긷는시각은늘학교가파하고나서였으니까,
미순이미옥이는수돗가에서그때처음나온샴프로머리를감았다.
나는세숫비누로머리를감았던시절이었다.
선생님이었던언니를가진미순이,미옥이가참많이도부러웠던때였다
향긋한샴프냄새가지금도기분좋은추억으로나를몰고간다.
어린나는그때어쩌다가마주치는두오빠를부끄러워했었다.
정말어쩌다가내가물동이이는것을거들어주는날에는
나는가슴부터콩닥콩닥뛰었었다.
어린게물을이는게좀불쌍해보였기에아무생각없이한일이었겠지만
미옥이나미순이가아니면어머니가물동이를거들어줄때와는
다른정말알수없는느낌이었다.
그리고진주사람모두가다기뻐했던일,
큰오빠가서울대학에전체수석을할수있는실력자인데
시험지번호를한과목엇갈리게썼는데도과수석을했다던가?
소문이었는지도모르지만,사람들이많이애석해했었다.
그리고또작은오빠가서울대의과대학을합격했다는말.
진주의자랑이었던두오빠.
우리아버지는사춘기병증을심하게앓았던내오빠에게
“방선생댁아들들을보아라,머리가모자라냐?학비를안주냐?”
모질게맞기도많이했었다.
사실우리집은남다르게영리했던오빠에게너무나큰기대가있었으나
생전의엄마와아버지의소망에오빠는미치지못했었다.
“하약국마님,이솜씨그대로간직하셨다가우리딸들다시집간후에
돌아가셔야합니다.“
방선생님댁어머니는늘엄마에게그리말씀하셨다.
명절날우리엄마가만든유과를석작에담아가실때도,
엄마가지은바느질감을찾아가실때도그렇게말씀하셨다.
무슨일이있었던날이었는지는모르겠으나,엄마는방선생님댁으로
직접가셔서하루인지이틀인지정과를만드셨다.
박을타서그하얀색,당근을살짝쪄말린붉은색,
대추의자주색,검정콩,고은엿물에졸여서반짝이고야들야들한
그아름다운정과의색과맛을음미하시며
“우리딸들다시집갈때까지…”
엄마의솜씨를칭찬하셨던그분,
그리고우리집에도수도가들어오고나는방선생님댁을
들락거리는일이별로없었다.
진주사람모두가애석해하고슬퍼했던그댁큰오빠의사건.
참으로오랫동안가슴앓이를하는것처럼보였다.
우리는그모든것을한걸음먼발치에서보며가슴아파했었다.
“너무머리가좋기때문에다른사람보다다를뿐이란다.
곧돌아오게될게야“
아버지도,어머니도안타까워하셨다.
길에서마주치면내쪽에서먼저고개를숙였었다.
그리고내가대학을,학교를,시집을,그렇게집을떠나고
격랑의세월이흐르고내아버지도어머니도다돌아가신후,
JJ오빠네소식을들었다.
큰오빠는돌아가셨고그어머니가막내랑부산에서
아직도살고계신다는것이었다.
가슴이뛰고소식이닿으면그어머니를만나뵙고싶었다.
“하약국댁착한양념딸오셨구나!”
그때처럼그인자한음성을듣고싶었다.
그런데어젯밤내게온JJ오빠의서신에는어머니가영원한나라로
떠나셨단다.
뒤늦은시각,이아침에접한슬픈소식에
나는옛날을생각하며눈물이난다.
무엇보다도나는이렇게생생한기억으로있는데
오빠의글
“AigoWojago!"
“내가너무오래전에집을떠나있어서…”
기억이안난다는그말씀이더서운하였다.
서툰영어로답장을썼으나
휘리릭날아가버려그냥이렇게횡설수설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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