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3/천종욱
전기도없고의료시설이라곤단한군데도없고버스가하루에한번다닐까말까한시골에서양은그릇에소독한주사기로스트렙토마이신을직접내엉덩이에꽂아야했다.

아무리매일주사자리를바꾸어도엉덩이는매일아팠고‘아이나’라고하는지독히독한약은내위장을다망가뜨렸다.

그러나그시골의공기때문이었는지,염소젖때문이었는지약때문이었는지,아니면한달에두어번하숙집양조장에서잡아먹은토종닭때문이었는지나는기침도가래도없어졌고얼마후병은다나았다고,기적이라했다.

그동안분필가루가싫어당번한명을두고시간시간분필지우개를털어말끔히하고칠판아래에모인분필가루를깨끗이닦으라고철저히시켰다.

시골의순진한아이는선생의심부름이라면죽을시늉도하던시절이었다..

어느날장학사가시찰을와서손가락으로칠판아래를쓰윽문질러보더니나를힐끔쳐다보았다.

그로부터2년뒤읍내중심학교로전근이되었다.

거기서그림의천재라불리던내동생은내가대는등록금도역부족이라자살을했고,파산을맞은아버지는나를의지하러내하숙집으로오셨지만화병이었는지곧돌아가셨다.

육친을한꺼번에둘이나잃은슬픔을그누가감당할수있겠는가!

버틸힘이남아있지않아많이힘이들었을때,지금의아내를만났다.

곧결혼을하였고사내아이들을낳았고긴주말부부생활에서마산으로합치게되었다.

1972년에는아내랑공동연구로“초등학교고학년성교육의지도와실제”라는논문을발표해부산교대에서있었던발표회장에서문교부장관상을받아신문에대서특필되는영광도얻었다.

둘은남들이부러워하는최고의부부교사가되어있었다.

그러다14년교직생활을그만두고시멘트대리점을차렸다.

큰아이5학년작은아이3학년때시멘트사업은친구의꼬임으로파산을맞았고우리는또옛날처럼알거지신세가되어서울로이사를했다.

시멘트본사영업이사와영업부장,과장이자기들의돈을모아내게서울에서사업을해보라며대리점을차려주었다.

다시서울에서시멘트장사가시작되었다.비록본사직원들과동업을하는처지였지만“제일양회주식회사”

내상호의시멘트회사는하루150킬로미터를운전하며변두리도시로시멘트를직접팔러다닌보람으로일년에시멘트200만포대를파는국내굴지의시멘트대리점이되었다.

1990년노태우대통령정권은주택200만호짓기운동을펼쳤다.

시멘트는곧파동을불러일으켜중국에서시멘트를수입하기도하고그래도들긇는시멘트시장을진정시키기위하여국내판매1위인나는시멘트값을안정시키는희생양으로구치소신세를지게되었다.

폭리도아니고,매점매석도아닌사문서위조,본사가자기들지인들에게인사하기위해대리점의시멘트를가져가놓고자료는주지않아만들었던자료가그이유라했다.

결국두달의조사과정-이미미리만들어진시나리오였지만-이끝나고풀려났지만그2개월은나에게향후살아갈엄청난정신세계를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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