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귀 옛 사진자료***

희귀한옛자료모음 육혈단포

총구,방아쇠,노리쇠가두개씩인쌍혈단총으로개화기이전중국으로부터들어와사용되었던것으로추정된다.

유성기

해방전후에유행했던SP축음기와판이다.손잡이로태엽을감고바늘을판위에올리면바늘위쪽에있는소리통이울린다.
유성기판의한면에는대개1곡정도의노래가수록되어있다.당시유성기를소유했던사람의집에는축음기소리를듣고자많은사람들이몰려와인기를독차지했다.
오른쪽유성기판은,장일타홍(張一朶紅)의"창부타령",김옥엽(金玉葉)의"아리랑",성광현(成光顯).신불출(申不出).나품심(羅品心)의폭소극인"엉터리",임방울의"쑥대머리"."고고천변(皐皐天邊)"등이수록되어있는판이다.

잡화점

1920년대잡화접의모습으로갓신,나막신,짚신,가위,안경집등온갖물품을진열해놓았다.
상투를틀고긴담뱃대를문주인의모습이이채롭다.

1920년대조선의아이들

무명저고리치마에쪽찐머리를하고이방인을바라보는눈이마냥선하다.

<엽서>남대문옆길

경성남대문옆길로흰옷입고걷는사람들의모습이보이고수레,전봇대,건물등에는일제의손길이닿은흔적이역력하다.

<엽서>1920년대의서울

앞쪽에는신식건물들이즐비하고뒤쪽으로낮은건물들사이로넓은도로끝에조선침략의본거지인총독부건물만이눈에띈다.

<엽서>평양시장

평양의어느시장안풍경이다.
머리에이고지고끌고흰옷입은사람들로가득하다.

<엽서>독립문

우뚝선독립문옆으로전철이지나가고제염공장에서검은연기가솟고있다.

<엽서>수원화성팔달문

화성(華城)은정조(正祖)20년(1796)에완성된성으로정조임금의효심과개혁의뜻이담긴성이다.
세계문화유산에등록된것은무엇보다도축성의과정을낱낱이기록한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남아있어본래의모습을되?을수있기때문이다.
1920년대팔달문(八達門)앞상점의모습과2층누각의뜯겨진벽이보인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과용연(龍淵)

동북각루(東北角樓)인방화수류정과그아래연못위에솟아오른바위는광교산의일맥이용머리가되어솟은것이라고「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서는말하고있다.
한국정자를대표할만큼아름다운이각루는평면구조가아닌다각화된형상으로사계절변화의미가지금도독특하다.

화홍문(華弘門)

광교산에서흐르는개천이성내를관통하는곳에북수문과남수문을설치하였다.
북수문은풍광이아름다운동북각루(방화수류정)아래에일곱개의아치형석조수문을쌓고그위에정면3칸의누각을세웠다.
이것이화홍문으로방화수류정과함께화성(華城)내에서가장경관이아름다운곳이다.성벽은장안문(長安門)과연결되어있다.

수원지지대(遲遲臺)

정조(正祖)임금이아버지사도세자(思悼世子)가잠들어있는현륭원(顯隆園)을바라보며더딘발길을재촉하던이긴고개가지지대고개이다.
고개마루에는정조의효심을기록으로남기고자순조7년(1807)에호조판서서영보(徐榮輔)가짓고윤사국(尹師國)이쓴비석을세웠는데이것이비각안에있는지지대비(遲遲臺碑)이다.

수원신사(水原神社)

일제식민지치하조선말살정책의하나로일본황실과그공로자들추모하는곳으로전국곳곳에세워졌다.

천도교월보

1910년8월15일부터1937년5월까지발행했던천도교의월간기관지이다.창간호부터한글로글을싣고있는이월보는민중을계몽하고교양을보급하려는뜻을담고있으며,천도교사상을파악할수있는자료이다.

경성지방법원수원지청

일제식민지치하조선인을탄압하기위해설치한재판소이다.

화성창룡문(華城蒼龍門)

현재는다시복원되었지만이엽서사진은6.25동란중소실되기이전의모습이다.
얕은언덕에옹성을두르고연무대(鍊武臺)와마주하고있는동쪽성문으로장안문이나팔달문에비해규모가작다.

화성화서문(華城華西門)

사진처럼예전에는넓은들판을가로지르며가파른팔달산으로오르는성벽과연결되어있는서쪽문이다.
한가로이소가풀을뜯는경관이매우아름다운곳으로사람들은직접성문안으로드나들었으나,지금은주변이도시화되어그면모를잃었다.
그규모는창룡문과비슷하다.

화성연무대(華城鍊武臺)

군사들의훈련장으로사용되던곳으로성내를조망할수있는등성이에건물과조련장을마련하였다.
앞에는창룡문옆으로는동북공신돈과연결되어있다.

수원역

1930년대조선풍물안내첩에서수원역을소개하는사진이다.
전통관청건축의일면을보여주고있는것으로오늘날재건축을추진하고있는수원역사건축은세계문화유산인수원화성(華城)과더불어이러한면모를보여주어야한다.

입공희보(立功喜報)

이증서는1951년8월31일한국전쟁중,중국조선철로군사관리국에서,중국요서성철도현형국동(邢國棟)에게항미원조(抗美援朝),즉6.25사변중에북한을도운공로로표창한증서이다.

제국신문

1898년8월10일창간되어1910년8월2일폐간된신문이다.
사장은이종일(李鍾一)이고,이승만(李承晩)이주필로활동하였으며,기자로는이인직(李人稙).이해조(李海朝)등이활약하였다.
이신문은한글전용으로민족언어의발전에기여하였으며,B4판형의절반크기정도의2단제에서1907년6단제로확대되어매일4면씩2000부내외로발행되었다.
당시일본세력이우리나라의내정을간섭하던상황에서이신문은무능한정부와관리의부패및일본세력의국권침탈에대해서도날카롭게비판하였다.
따라서일본당국이실시한사전검열기사가삭제되거나정간처분을받는등많은어려움을겪었다.
당시먼저간행된’황성신문’이한자해독계층을위한특수층의신문이라면,[뎨국신문]은한글만을사용함으로써일반민중을대상으로한민중계몽과국권회복을위한신문이었다.

선교기념스테레오뷰사진

1900년초언더우드가찍은선교기념사진으로당시개화에앞장선흰옷입은아이들과갓을쓴어른들이선교회서양여인과함께찍은사진이다.이사진은특수한기계로보면입체로볼수있는사진이다.

전우(田愚)선생초상

조선시대의마지막정통유학자이신간재(艮齋)전우(田愚1841~1922)선생의초상사진이다.
선생은아산에서임헌회(任憲晦)로부터학문을사사하여수많은제자들을가르쳤으며,[안자편(顔子篇)],[오현수언(五賢粹言)],[연원정종(淵源正宗)]등60여권의저서를남겼다.
강원도도사.사헌부장령.순흥부사등을제수받았으나모두나아가지않았다.나라가망하자군산도,계화도에들어가학문에전념하였으나,나라가망하여도의병을일으키지않고도학군자로자처하는데그쳤다는비판을받기도하였다.
선생의초상을대하면꼿꼿한대학자의맑은면모가느껴져어지러운이시대에위안이된다.

남궁억선생의탑골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답사사진

1904년남궁억선생이잡초에덮인탑골원각사터에서우산을들고대원각사비를바라보고있는스테레오뷰사진이다.구한말에잠시제작된이스테레오뷰사진은특수한장치로보면입체로볼수있도록만든사진이다.뒤쪽에당시군악대건물인듯한건축물과한옥들이보인다.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는조선세조때원각사의창건내력을적은비석으로현재서울시종로구탑골공원에있다.높이4.9m,너비1.3m로1471년(성종2)에건립되었다.비의앞면은김수온(金守溫)·성임(成任),뒷면의추기는서거정(徐居正)·정난종(鄭蘭宗)이각각짓고썼다.대리석제의비는마모가심하여글씨를알아볼수없는데,다행히비문의내용이《속동문선(續東文選)》에실려있다.반구형의이수는비신과한돌로보주를받든형상의쌍룡이조각되었다.이수아래쪽에는<대원각사지비(大圓覺寺之碑)>라는전액을강희맹(姜希孟)의글씨로새겼다.귀부는둔중한몸체로기하무늬를새겼으며연잎모양의비좌(碑座)와물고기비늘을조각한꼬리와다리가특이하다.전체적인조형은당비(唐碑)의형식을따라복고적이나조각이번잡하고사실적표현이미숙하다.

시역의고민(弑逆의苦憫)

1955년학예사에서펴낸안두희(安斗熙)의수기이다.l949년6월26일12시45분.백범김구선생을암살한안두희의흉탄은아직도이나라민족정기의암울한그늘로우리민족의앞길을가로막고있다.
누가이수기를다읽을수있을까?아무리자신의심경을드러내려한다지만한글자읽을때마다솟구치는분노는,오히려오늘을사는나자신에대한미움과연민으로다가오는듯하다.아니,오늘의우리는지금도김구선생님을죽이고있는것은아닐까?민족의진정한통일과자주독립을이끄는자가지금이땅에있는가?
안두희‘최후의응징자’는박기서(朴琦緖·49)씨.버스운전기사였던그는96년10월23일인천신흥동안씨의집을찾아가이른바‘정의봉’으로안씨의머리를내리쳐응징처단했다.그러나지금우리는모두안두희같은모습으로살아가고있는것같아안타까울뿐이다.

냇가의아이들스테레오뷰사진

1904년외국인의눈에비친서울근교냇가풍경사진이다.흰저고리의아이들과멀리창틀의종이를씻고있는사람들의모습이보인다.

냇가의아이들스테레오뷰사진

1904년외국인의눈에비친서울근교냇가풍경사진이다.흰저고리의아이들과멀리창틀의종이를씻고있는사람들의모습이보인다.


1930년대전기난로


전기스토브

1930년대전기난로와스토브

일제식민지시대사용되었던전기난로와스토브이다.조선총독부고위관리가사용했던전기도구들로추정되며일본에서제작된것이다.디자인이독특하고정교하다.

밭가는농부스트레오뷰사진

1901년’흰옷입은한국의농부’라는제목으로미국Keystone사에서제작한사진이다.흰바지저고리에상투를틀고쟁기로밭을가는우리의친구황소,이렇게천년을살아왔던것인데근대화의한순간,과거로부터의시간과공간을이어오던그삶의모습모든것이인간의문명이라는이름으로사라져갔다.

의병장의칼

두꺼운가죽띠에아직도퍼렇게살아있는무명의외침이들리는듯하다.창의병(倡義兵)은이름없는사람들의투혼으로이렇게흔적만전해질뿐이다.

한국전쟁중포격사진

기와집이보이는뒷밭에서7명의UN병사들이방금포를발사하고귀를막고있는6.25전쟁의생생한장면이다.당시20대의젊은이들,지금살아있다면70대의노인이되었을것이다.이사진은43×35㎝의대형원판사진으로미국ebay사로부터구입한사진이다.

황성신문1899년4월5일자

1898년(광무2)9월5일에창간된일간신문으로남궁억(南宮檍),나수연(羅壽淵),장지연(張志淵),박은식(朴殷植),유근(柳瑾)등이주2회간이던《대한황성신문》의판권을인수하여《황성신문》으로개제하고일간신문으로창간한것이다.
국한문혼용의이신문은애국적논필로풍운의한말정국을매섭게비판하였다.1905년(광무9)을사조약을맞아사장장지연의유명한<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장지연이구금되고,신문도정간당하였다가수개월만에복간되었다.이신문은고종황제로부터재정적지원을받기도하였으며,독자도중류층이상에두었는데,일본의국권침탈로1910년8월30일《한성신문》으로개제하여발행하다가동년9월14일제3470호로폐간되었다.

부인의외출-스테레오뷰사진

1904년가마를타고외출을하는양반댁마님을외국인이촬영한스테레오뷰사진이다.갓을쓰고수염을기르고흰바지저고리에짚신을신은하인의모습과부인의표정이이채롭다.


이왕전하(李王殿下)와전하비(殿下妃)


이왕세자(李王世子)은(垠)과왕세자비(王世子妃)이본궁방자(梨本宮方子)


영흥선원전(永興璿源殿)


덕수궁대한문(德壽宮大漢門)


동경조거판어전(東京鳥居坂御殿)


창덕궁인정전(昌德宮仁政殿)

이왕가기념사진첩(李王家記念寫眞帖)

1919년일본동경반도신문사(東京半島新聞社)에서발행한조선이왕가기념사진첩이다.서언(敍言)에서태조와세종의큰덕을칭송하고,고종황제가동양대세에의해일한합병한후훙거하여유감이라하고,약력과장례광경을부록으로수록하고있다.위자료는목차에나오는사진으로태조대왕단(旦=이성계)과고종황제희(熙),이왕전하척과이왕세자전하은(垠)의약력을기록한뒤사진을싣고있다.

근정전근위병의스테레오뷰사진

1903년미국그레이브가찍은근정전의청동향로와근위병의모습이다.외세의눈에비친망국의현장으로바닥에는잡초가무성하고,화면에는시름이가득하다.

구한말훈련대

구한말대한제국훈련대병사들의집총훈련광경사진으로미국언더우드사에서제작한스테레오뷰사진이다.궁궐안에자리한시위대(侍衛隊)병사들로보인다.
1897년에성립된대한제국은서구열강의침탈에맞서기위해자체적인국방강화의필요성을인식하여새롭게군복식을제정하고,외국에서신식화기와장비를도입하여신식군대를양성하기시작하였다.그러나대한제국의이러한시도도열강들의침략을막아내기에는역부족이었다.대한제국의시위대는1897년1월1개대대로창설되어각개훈련,소총조작법,제식훈련,총기분해결합,사격술등러시아식의군사훈련을실시하였다.1898년5월시위연대로,1902년10월에는2개연대로증편되었으나1905년4월다시시위보병1개연대로감축되었고,1907년에는1개대대만을남기고모두해산되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4년부터국권피탈때까지발간되었던일간신문이다.1904년2월에일어난노일전쟁(露日戰爭)을취재하기위해한국에왔던영국인배설(裵說:ErnestThomasBethell)이양기탁(梁起鐸)등민족진영인사들의도움을받아7월18일에창간하였다.《대한매일신보》가창간되던무렵은일본측이한국언론에대해검열을실시하고직접적인탄압을가하기시작한때였다.그러나《대한매일신보》는발행인이영국인이었기때문에주한일본헌병사령부의검열을받지않고민족진영의대변자역할을할수있었다.사세(社勢)가확장되고독자수도늘어나면서,통감부(統監府)가설치된이후에는민족진영의가장영향력있는대표적인언론기관이되었다.창간당시에는타블로이드판(版)6페이지로서그중에서2페이지가한글전용이었고,4페이지는영문판이었다.창간다음해인1905년8월11일부터는영문판과국한문신문을따로분리하여두가지신문을발간하였다.영문판의제호는《TheKoreaDailyNews》였고,창간당시는순한글로만들었던!국문판은국한문을혼용하여발간하였다.그러나국한문판을이해하지못하는독자들을대상으로하는한글전용신문의필요성을다시느끼게되어1907년5월23일부터는따로한글판을창간하여대한매일신보사(社)는국한문·한글·영문판3종의신문을발행하였으며,발행부수도세신문을합쳐1만부를넘어당시로서는최대의신문이되었다.논설진으로는양기탁외에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등이있었다.이와같이큰영향력을가진신문이일제의한국침략정책을정면으로반박하고나서자일제는이신문에대해여러가지탄압을가하게되었다.일본측은외교경로를통해소송을제기하여발행인배설은1907년과1908년2차례에걸쳐재판에회부되었고,양기탁도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을횡령했다는혐의로체포되어재판에회부되었으나무죄로석방되었다.배설은이러한탄압과싸우는가운데1908년5월27일부터발행인명의를영국인만함(萬咸:AlfredMarnham)으로바꾸었다.그러나1909년5월1일배설이죽고난후,1910년6월1일부터는발행인이이장훈(李章薰)으로바뀌었고,국권피탈이되면서조선총독!부의기관지로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