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기간201407.11(금)~201407.13(일)3일간
위치강원도삼척시삼척항길196
행사장소강원도삼척시삼척항및이사부광장일원
연락처033-260-9301~2
2014삼척이사부독도축제는512년울릉도와독도를우리영토로만든신라장군이사부의해양개척역사와
진취적해양정신을기리고자해양문화의도시삼척에서펼치는역사문화축전으로독도수호와동해바다사랑의
한마당이자온국민이어우러지는열정의장이다.
행사기간201407.11(금)~201407.13(일)3일간
위치강원도삼척시삼척항길196
행사장소강원도삼척시삼척항및이사부광장일원
연락처033-260-9301~2
2014삼척이사부독도축제는512년울릉도와독도를우리영토로만든신라장군이사부의해양개척역사와
진취적해양정신을기리고자해양문화의도시삼척에서펼치는역사문화축전으로독도수호와동해바다사랑의
한마당이자온국민이어우러지는열정의장이다.
대통이가얼마전결혼스미싱(모바일청첩장)에호디게?당하고나니..
이런급보가전처럼예사로보여지질안습니다..
지금도여전히내폰번호로문자가발송돼는지모르겠어요..
암튼널리퍼나르셔서단한분의피해자도안생겼으면하는데동참해주십시요
휴대폰이아닌일반유선전화가많은지방에계시는
어르신들이특히이런정보에약하시니
안부겸..이런거조심하시라고말씀드려주세요.
8월15일대한민국대통령께서일본의못된것들중몇가지를지적했다.
위안부문제(성노예란표현을쓰자)도당연히거론했고,일왕(시대에뒤떨어진넘들)의
사과도집었다..일본..분명문제가많다..독일을본받아야하는데엉덩이에뿔난놈들이
다른길을택했기때문에..엉터리역사를가르켰다..그게이제서야문제를야기시키기시작한다..
엉터리역사를가르첫으니,근거없이독도가지네땅인줄알고빡빡우긴다..지네꺼라고..
위안부문제는아는게없으니,뒤틀린역사교육받은데로부정할뿐아니라대들기까지한다.
우리교포폭행은뭐고,대사관,영사관앞에서의시위는뭔가…
신사참배는어떻고??
역사를엉터리로가르키고배웠기때문이지만…
이런사태를보는..일본우파의만행을보는우리국민들은생각밖으로차분?한게이상하다..
우리나라엔일본대사관이없나??
왜대사관앞에서대모는안하지??
우리나라영사,대사는뭐하셔??소환안해??
우리나라에는우파가없기때문일까???
야당지도자들..엄청웃긴다…
대놓고일본을편드는인상을준다…
우리나라대통령이당연히할말을한건데…
일본과의외교를전혀모른다며쑤시고있다…
뭐..야당이국민들의뜻을모른적이한두번일까마는..
이번사테는무조건대통령에게힘을실어줘야하지않을까??
독도는우리땅!!!맞자나???
국제사법제판소가자는데..왜일본대사관앞은비어있는고야???
위안부문제는모르쇠..인정안하겟다는심뽀와…
보란듯이각료가1급전범이있는신사참배를하면서..
일왕한테사과하라고하니..그건또뭐냐????
일본은가라앉고있다..몇백년후면바닷속에잠겨있을꺼라서..
작은땅덩어리라도영토로갖고싶어..
독도가아쉽기도하겠지만..이건아니지..
중국과도싸우고..소련과도싸우고..
말로만이웃이라며착한대한민국을건드리고..잘하는짓꺼리?도아닌데…
이런사태를보는우리국민들은너무너무차분하다…
너무너무차분하다..
우리모두이번일은"대통령께서참잘하신겁니다"
”경상도경주땅對馬島를생각한다”
700년전부터우리땅
萬戶벼슬하사받은대마도주
이종무의대마도정벌내막
이승만의영유권주장
일본역사교과서왜곡파동이일면서한국은마땅히일본에대항할것이없다.오히려일본은그들의교과서에서독도를그들의영토라고주장하고있다.우리는독도에대해서만염려할뿐대마도가우리땅이라는데대해서는전혀생각하지못하고있다.구한말우리가쇄국정책을펼치는사이일본은재빨리대마도를삼켜버렸다.이에대해이승만대통령은대마도반환을주장했는데….지금은대마도반환의불씨를지펴야할때다.
신영길<한국장서가협회회장>
대마도는남북으로72km,동서로16km인길쭉한모습의두개섬이다.총면적은714㎢에이른다.이섬은일본보다는한국에가깝다.한국남단에서는53km,일본규슈(九州)에서는147km떨어져있다.대마도는섬이라기보다는‘바다에떠있는산’이라는표현이더어울린다.특히남섬은375.5m의원견산(遠見山)을필두로,328.6m의홍엽산(紅葉山),158.2m의백악산(白嶽山)등이있어,온섬이숲으로덮인듯한느낌을준다.이렇게산림이많다보니농사는해안지대일부계곡에서만가능해식량의자급자족이원천적으로불가능했다.
따라서유사이래어업을주업으로삼고,잡은어물을배에싣고한반도로가,물물교환하는형태로호구지책을삼아왔다.대마도에관한가장오래된기록을담고있는책은‘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왜인전(倭人傳)인데여기에는다음과같은내용이나온다.
“대마국은구야(狗耶·가야)에서강건너1000여리에떨어진곳에있다.그곳을다스리는우두머리인대관(大官)은비구(卑狗)라하고,부관(副官)은비노모리(卑奴毋離)라고한다.대마도는망망대해에떠있는절해의고도다.넓이는대략400여리에이른다.토지는척박하고산세는험준하며,깊은숲이우거져있다.길은매우좁아짐승이나겨우다닐수있을정도다.사람은1000여호가마을을이뤄살고있다.그러나좋은농토가없어,해산물을거둬자활(自活)하고있다.식량은선박을이용해한반도의해안에서구하고있다.”
‘慶尙道에속한對馬島’
대마도는고려때부터우리의속령이었다.‘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고려문종36년(1083)부터공민왕17년(1368)사이대마도에서사신을보내방물(方物)을바친기록이있다.‘해행총재(海行摠載)’는조선초신숙주(申叔舟)등17명의관리가통신사로일본에다니면서남긴기록물이다.이기록에따르면“삼국시대에이미일본에사는왜인(倭人)들은대마도를외국으로보았고,대마도사람들은스스로반(半)조선인으로불렀다”는기록이있다.
대마도가우리의영토였다는사실은여러문헌에서발견된다.세종원년(1419년)조선정부는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이종무(李從茂)로하여금대마도를정벌케했다.그리고세종9년(1427)7월17일병조판서조말생(趙末生,1370~1447)명의로항복하라는문서를보냈는데,이문서에는“대마도는경상도계림(鷄林·경주)에예속된곳이라,본디우리영토다.여러문헌에도그렇다고되어있다(對馬島隸於慶尙道之鷄林本是我國之地載在文籍昭然可考)”고적었다.‘양계강역도(兩界疆域圖)’기서(記書)에도“영남지대마도(嶺南之對馬島·대마도는영남에속한다)”라는표현이있으니대마도는우리영토였음이분명하다.
세종24년(1442)신숙주(1417~1475)는통신사의서장관으로일본에가대마도에서계해약조(癸亥約條)를체결하고돌아왔다.그리고성종2년(1471)‘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저술했는데,이는15세기의대마도를연구하는기본문헌중의하나다.이책에실려있는대마도에관한내용을요약하면이렇다.
“군(郡)은8개이고사람은모두바닷가포구에서살고있다.대마도의포구는82개나된다.남북은3일이면다돌아볼수있고동서횡단은하루나반나절이면족하다.바다와접한사면은모두돌산이고땅은척박하다.백성은가난해서소금을굽거나물고기를잡거나해산물을잡아,팔아서살고있다.종(宗)씨가대대로도주(島主)가되는데,풍속은신을숭상하여집집마다소찬(素饌)을차려놓고제사를지낸다.대마도는해동여러섬의요충지이므로조선을왕래하고자하는자는반드시본도(대마도)의거주자에한하고도주의문인[渡航證]을받아야조선에올수있게했다.”
조선초기에편찬된‘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대마도는원래경상도계림(鷄林)에속하였다”는기록이있다.세종(재위1419~1450년)의‘유대마도서(諭對馬島書)’에도대마도는경상도계림에예속된본시우리영토라는내용이있다.
대마도왜구들의해적행위
임진왜란이끝난다음인숙종45년(1719),신유한(申維翰)은통신사의제술관(製述官·기록을담당하는관리)으로일본을다녀와‘해유록(海遊錄)’을남겼다.‘해유록’은여러통신사의일본기행문가운데서도수작으로꼽히는데,여기에나오는대마도부분은다음과같다.
“대마주(對馬州)의별명은방진(芳津)이라고도한다.토지는척박해서채백물(百物·100백가지産物)도생산되지않는다.산에는밭이없고들에는도랑이없고,터안에는채전(菜田·채소밭)이없다.오로지고기를잡고해초를캐서팔아생계를유지하는데,대마도인들은서쪽으로는(조선의)초량(草梁·지금의부산광역시동구초량동)에모이고,북으로는일본의오사카(大阪)와당시왜국의수도인나라(奈良)에통한다.동으로는나가사키(長崎)에서장사하니,바다가운데의한도회(都會)와같다.”
이때대마주인들은지금의중국강소성(江蘇省)의소주(蘇州)사람이나절강성(浙江省)의항주(杭州)인,복건성(福建省)사람,그리고당시에는‘류큐(琉球)’로불렀던지금의오키나와(沖繩)인,또아란타(阿蘭陀)사람들과해상교역을벌였다.그로인해대마도에는주기(珠璣·보석)와서각(犀角·무소뿔),짐승의이빨가루,후추,사탕,소목(蘇木·한약재),비단등이폭주하였다.대마주인들은이러한물품을전매하여번돈으로의복과식량을마련하고생활필수품도구입했다.그러나도주의통제력이약해지면,대마도인들은필사적인해적행위를하는왜구(倭寇)로표변해생계를유지하였다.
대마도는고려말이래왜구의본거지였다.대마도왜구에관한기록은‘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記)에처음나온다.신라본기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7년(408)춘2월조(條)에는이런내용이있다.“왜인이대마도에영(營)을설치하고병기와군량을저축하여우리를습격하려고꾀하고있다.”신라본기에서처음나온왜구에관한기록은조선왕조실록에서도빈번히나온다.그만큼한반도와대마도는밀접했던것이다.
한반도와일본열도를잇는교량
대마도는지정학적으로한반도의영향을받을수밖에없는곳이다.선사시대부터한반도동남쪽해안에서실종된물건은해류를따라자연스럽게대마도로흘러들었다.남해를흐르는해류가한반도동남쪽과대마도를이어준‘다리’였던것이다.이러한해류때문에한반도의문화는대마도를거쳐일본으로건너갔다.
일본의논농사(稻作)는야요이(彌生)시대한반도에서전래했다는것이정설이다.그러나도작은단순한기술만으로는전파되지않는다.도작기술을가진사람들이집단으로이주해야만전해질수가있다.도작문화가전파됐다는것은고대한반도에살던사람들이대마도를거쳐규슈지역으로집단이주했음을보여주는증거다.
대마도는고대이래근세에이르기까지한반도와일본열도를이어주는중계지였다.
삼국통일을달성해가던시절신라는왜에대해군사적으로우위에있었다.이를보여주는증거가대마도에있는천연요새가네다성(金田城)이다.서기663년백제부흥군을후원하려고온일본군이백강전(白江戰·백마강전투)에서전멸했다.그러자일본은665년대마(對馬)와이키(壹岐)·규슈·봉화(烽火)에변방수비대인‘방인(防人)’을두었다.그리고이듬해백제에서망명해온달솔(達率·백제의벼슬이름)억례복류(憶禮福留)와사비복부(四比福夫)를규슈대재부(大宰府)로파견해,대야(大野)와연(椽)에두개의성을쌓게했다.
그리고2년후대마도천해만(淺海灣)에가네다성을쌓았다.가네다성은백제산성의모습을그대로본떠만들어졌다.한반도를향하고있는표고(標高)274m의바위산을이용해지어진이산성은그야말로천연요새다.가네다성이완성됨으로써대마도는신라군의공격에대비한최전방방어선이되었다.
‘고려사’를보면고려문종3년(1059)대마도로표류해온고려인을고려로압송했다는기록이있다.이와같은기록은그후에도거듭된다.문종36년(1082)에는대마도에서사신을파견해,방물을바쳤다는기록도있다.
고려공민왕때萬戶벼슬내려
고려와대마도가정식으로관계를맺은것은공민왕17년(1368)이다.이때대마도주는고려로부터만호(萬戶)벼슬을받은처지에서사신을파견했고,고려는강구사(講究使)이하생(李夏生)을대마도로파견하였다.같은해11월대마도만호숭종경(崇宗慶)이보낸사신이고려에왔기에고려정부는쌀1000석을하사했다는기록이있다.
대마도주는고려의지방무관직인만호벼슬을받았고쌀까지얻어가는처지였던것이다.
일본헤이안(平安)시대부터가마쿠라(鎌倉)시대초까지대마도의실권자는아비류(阿比留)집안이었는데,1246년부터는종(宗·처음에는惟宗)집안으로교체되었다.그러니까고려문종으로부터만호벼슬을받은이는아비류집안이고,공민왕으로부터만호직함을받은것은종(宗)집안인것이다.
고려말부터대마도와일본근처에있는이키시마(壹岐島)·송포(松浦)등지에서발호한왜구가한반도남해안을약탈하고때로는육지깊숙이침입하였다.이에대해고려는대마도주종(宗)씨와규슈의탐제(探題)이마가와(今川)·오우치(大內)등호족에게사신을보내,왜구를금압(禁壓)하고고려와는평화적으로교역할것을요구하였다.
고려말왜구가횡행하게된근본원인은1218년과1274년두차례에걸친여원군(麗元軍)의일본원정이있은후,일본과고려·중국의통교가단절되었기때문이다.이시기일본은남북조(南北朝)의쟁란(爭亂)에빠져있어,규슈와대마도등에는중앙의통제력이미치지못했다.이곳에사는변방민들은부족한주·부식을획득하기위해왜구로나선것이다.더욱이대마도주종정무(宗貞茂)가죽고뒤를이어그의아들정성(貞盛)이집권했는데종정성은너무어려왜구를통제하지못했다.
이러한왜구의발호에대해고려조정과조선조정은회유와무력응징으로대응했다.조선왕조는왜구근절에훨씬능동적이었다.이를위해조선은‘이선치선이무제도(以善治善以武帝·착하게행동하면좋게다스리고,도적질을하면무력으로다스린다)’의대책을내놓았다.조선태조5년(1396)대마도인구륙(六)이선박60척과왜인수백명을이끌고투항하자,조선조정은구륙에게‘선략장군용양순위사행사직겸해도관민만호(宣略將軍龍巡衛司行司直兼海道管民萬戶)의관직을제수했다.이듬해구륙이등륙(藤六)으로이름을바꾸자,다시종4품인‘선략장군행중랑장(宣略將軍行中郞將)’이란관직을제수했다.
태조6년(1397)에왜구의한우두머리인임온(林溫)이병선24척을이끌고투항하자,선략장군(宣略將軍)을제수했다.이일을계기로망사문(望沙門)·곤시문(昆時門)·사문오라(沙門吾羅)·삼보라평(三寶羅平)·현준(玄准)등대마도에거주하는많은왜구두목이투항해관직을받았다.이러한투항자중에는평원해(平原海)·등차랑(藤次郞)·간지사야문(看智沙也文)처럼의술이나조선술·제련술이뛰어난자도있었다.
이종무의기해東征으로屬領化
조선의3대임금태종(재위1401~1418년)은왜구에대해강경책을펼쳤다.그는왕위를세종에게양위했으나,군사권은장악하고세종원년(1419)6월17일,왜구의근거지인대마도정벌을단행했다[己革征].이에따라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이종무(李從茂,1360~1425)가병선227척과장병1만7385명을인솔해,왜구의근거지인대마도의천해만과오자키(尾崎)·후나고시(船越)·진나(仁位)를공격했다.
이종무군을태운선단이대마도에접근했을때,대마도인들은자신들의왜구선단이약탈품을싣고돌아오는줄알고,영접하러나왔다고한다.대마도에상륙한이종무군은적선129척을나포하고왜구가사는집1939호를불질러태워버렸다.생포한왜구는12명이었고참수(斬首)한왜구는114명이었다.내친김에이종무군은왜구들이심어놓은곡식도베어버려,요행히산속으로도망친자들도굶게만들었다.
이종무군이감행한기해동정(己革征)으로인해대마도주와대마도민들은경제적으로큰타격을입었다.조선은대마도가아닌다른곳에서오는왜인들에게교역을허가했으나,대마도인들의도래는허용치않았다.그러자그해9월20일에대마도주종정성(宗貞盛)이항복[降]한다는외교문서를든사자를보내왔으나,조선은응답하지도않았다.세종2년(1420)윤정월10일대마도주는다시사자를보내,“대마도는조선을주군으로하며,그주명(州名)을지정받고자한다.동시에조선조정에서주군인(州郡印)을사여(賜與)해달라”고요청해왔다.
동년동월23일조선은대외적으로는외무장관일을맡는예조판서허조(許稠,1369~1439)를통해대마도를다시경상도에예속시키고,그군관에대한관례대로관인(官印)을사여하였다.그후에도속령(屬領)상태는오랫동안지속되었다.세종25년(1443)에계해조약(癸亥條約)이체결되어대마도주는1년에50척의세견선(歲遣船)과200석의세사미(歲賜米)를특전으로받게되었다.세견선외에도특송선(特送船)이란명목으로제한없이무역선을보내게되었다.
그런데중종5년(1510)삼포왜란(三浦倭亂)이일어났다.이왜란은부산첨사이우회(李友會)가부산에거주하는왜인의수를제한하고,웅천(熊川)현감은왜인이식리(殖利)하는것을금하자,이에자극받은왜인들이대마도도주종성순(宗盛順)의군사300명을거느리고쳐들어와부산첨사를죽이고웅천을점령한사건이다.이에조선은왜인을평정하고삼포를폐쇄하자왜인들은대마도로도주하였다.
삼포는중종7년(1512)에임신조약(壬申條約)으로다시열렸는데,이때세견선과하사미를반으로줄였다.중종39년(1544)에는사량왜변(蛇梁倭變)이일어나교역이일시단절되었다.그러다명종2년(1547)정미조약(丁未條約)을맺어,이미반으로줄어든세견선25척을대선(大船)9척,중선(中船)8척,소선(小船)8척으로한다고못박아한층엄격히통제했다.
‘대국휼소국’의관계
이현종(李鉉淙)이편찬한‘조선전기대일교섭사’(1964년한국연구원간행)에따르면대마도의유력자중에는조선의관직을받은‘수직왜인(受職倭人)’과특별히세견선이나세사미를배당받는자들이있었다.이키시마(壹岐島)에있는수직왜인은3명인데,대마도의수직왜인은17명이나된다.대마도인들은조선조정으로부터받은교지(敎旨)를대개‘고신(告身)’이라고한다.대마도에서는오자키의소다(早田)집안,지다류(志多留)의다게다(武田)집안,이나(伊奈)의쇼야(小野)집안에서이러한고신이전해오고있다.
고신을받은대마도인들은1년에한번조선에도래하여,관직에상당한예우를받고특별한이득을얻어갔다.조선초기일본에서조선으로들어오는세약선(歲約船)·수직인선(受職人船)·수국서인선(受國書人船)의수가204척이었는데,그중에서대마도배는절반에육박하는124척이었다.
그럭저럭유지되던조선과대마도의관계는선조25년(1592)에일어난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인해결정적으로단절되었다.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침략군은대마도의대포(大浦)에집결한후조선을침공하였다.7년간의임진왜란이끝나자대마도주종의지(宗義智)는대마도의생사가걸린조선과의교역을재개하기위해필사적으로노력했다.
이에대해조선은부정적이었으나,종의지는광해군원년(1609)기유조약(己酉條約)을체결하는데성공했다.이후대마도는조선과일본의도쿠가와(德川)막부사이에서줄타기교린우호관계에들어갔다.대마도인들은초량(草梁·부산)에새로왜관을설치해,문화·경제적이윤을얻게되었다.
대마도고문서목록서문에따르면조선과대마도의관계는표면상으로는조선의교린정책에의한것이다.그러나실상은수직왜인은조선정부로부터물품을받는처지였으므로대마도는‘진상(進上)’,조선은‘회사(回賜)’하는것이교류의기본형태였다.조선과대마도는결코대등한관계가아니었다.조선으로보면조선이대마도를‘대국휼소국(大國恤小國·큰나라가작은나라를규휼하는것)’또는‘조공회사(朝貢回賜)’하는정책을폈던것이다.
조선민족은대륙문화의계승자로서대체로도서(島嶼)를경시하였다.조선인들은대마도를척박한섬으로만보았다.이러한땅은반역음모지(叛逆陰謀地)가될염려가있어거주하는것을싫어했다.그와반대로일본본토에서는범법자와범죄자가대마도로흘러들었다.이들로인해대마도는해적소굴이되었다.이들이조선의해안지대를수시로침범해약탈하자조선은강부(降附·항복하여굴복하다)를권고하기도하고,토벌(討伐)을수행하기도하였던것이다.
이승만대통령의대마도반환요구
1859년3월31일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으로개항한일본은,미국과영국의유도에의해국내정세가크게변했다.이에따라조선과대마도의관계도일변하였다.도쿠가와막부는대마도가대행하고있던조선과의외교와무역을직접관장하려했다.1868년1월3일도쿠가와막부의조번체제(朝藩體制)가붕괴하고왕정복고·왕위친정체제를구축하려는정변이일어났다.
이로써웅번(雄藩)들은판권봉환(版權奉還·왕정으로복귀함에따라각번의영주들의영역권을천황에게바치는것)에들어가,도쿠가와막부의제15대장군인도쿠가와시게노부(德川慶喜,1837~1913년)도정권을개혁조정에반환하게되었다.1871년8월29일에는폐번치현(廢藩置縣·막부시절의번을없애고근대적지방행정기관인현을두는것)을실시했다.이로인해외번부용(外藩附庸)의대마도주종의달(宗義達,1847~1902)도대마도를판적봉환하게되었다.이일을계기로종의달은조신(朝臣)과근위소장(近衛小將)이라칭하고이스하라(嚴原)번지사(藩知事)가되었다.그러나1877년대마도는나가사키현에편입되면서,현에속한지방행정지로격하되었다.
고려공민왕17년(1368)대마도주가고려의만호벼슬을가진사신(使臣)으로파견된이래대마도는600여년간조선과대국휼소국(大國恤小國)또는조공회사(朝貢回賜)의관계를맺어온속방(屬邦)이었다.그러다일본신제국주의의마수에걸려일본에귀속되었다.당시조선조정은1863년12월13일즉위한고종을대신해대원군이섭정을하고있을때였다.1865년부터조선은임진왜란때타버린경복궁을중수하는데진력하였다.그전해인1864년4월22일에는전국서원의향현사(鄕賢祠·향교와사당)를철폐하고,척사조치를내리는등쇄국봉건체제를강화하였다.
이러한와중인1868년12월19일,일본정부는일본이왕정체제로복귀해새로운정부가수립되었음을조선에통고하였다.이에대해조선조정은서계(書契·조선과일본을왕래하던문서)문구가불손하다며접수를거절하였다.그러다1875년8월20일강화도에서운양호사건이발발하고이듬해인1876년2월2일조선은일본과치욕적인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체결하였다.
병자수호조약이체결된후임오군란→갑신정변→청일전쟁→명성황후시해→노일전쟁→을사늑결(을사보호조약)→경술병탄(한일합방)→3·1독립선언→1945년8월15일광복으로숨가쁜현대사가이어진다.이런현대사속에우리는대마도를까맣게잊어버렸다.
광복후대마도가우리의영토라고처음주장한사람은초대부산수산대학장을역임한정문기(鄭文基,1898~1996)박사다.정박사는‘대마도의조선환속과동양평화의영속성’이라는논문에서대마도를조선으로환속하는것이동양평화의영속성을기하는길이라고주장하였다.미군정시기인1948년2월17일에열린제204차입법의원본회의에서입법의원허간용(許侃龍·서북도관선의원)외62명은대마도를조선영토로복귀시킬것을대일강화조약에넣자는결의안을제출하였다.그러나이결의안은정부를만들기위한기초작업폭주로연기되다회기가종결됨으로써실현되지못했다.
대마도반환불씨지펴야
대한민국초대대통령이승만(李承晩·1875~1965)은정부출범직후인1948년8월18일전격적으로‘대마도반환요구’를발표하였다.그러자일본에서는요시다시게루(吉田茂)총리이하온내각이발칵뒤집히며반발하였다.그런데도이대통령은아랑곳하지않고9월9일재차대마도반환을요구하며대마도속령에관한성명을발표하였다.1949년1월6일일본에대해배상을요구한이대통령은이틀후인1월8일,대일강화회의참가계획을발표하면서또한번대마도반환을주장했다.국회에서도앞으로열릴대일강화회의에서대마도반환을관철시킬것을촉구하는건의안이제출되었다.
이에대해일본의요시다총리는연합군최고사령부(SCAP)최고사령관인맥아더원수에게이대통령의요구를막아줄것을요청하였다.연합군최고사령부는이대통령의대마도반환요구를전후미국중심의동아시아질서를구축하는데방해되는언사로받아들이고이대통령의발언을제지했다.그후이대통령은공식적으로나문서상으로는대마도반환을요구하지않았다.그러나외교사절을만날때마다대마도영유권을역설하였다.이승만대통령의대마도반환요구는역사적인근거를깔고있는올바른발언이었다.
대마도는치욕의역사속에서도대의를지키기위해죽음으로항거한면암최익현(崔益鉉)선생의혼이깃들인섬이다.올해4월부산부경대학교(구부산수산대)강남주총장은대마도에서입시설명회를갖고“대마도사람들의마음속에는150km쯤떨어져있는일본보다는53km만떨어져있는한국을더우호적으로생각하는정서가깔려있을것”이라고말한바있다.강총장이대마도에서입시설명회를갖고이러한발언을한것은깊이음미해볼만한일이다.
구한말국제정세에우둔했던우리는쇄국정책을선택해,대마도가일본의억압속에일본영토로귀속된사실도몰랐다.그러나지금은다르다.이제우리는과거의기록을토대로당당히대마도에대한영유권을따져볼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