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쪽지’를 읽고

‘남겨진 쪽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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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교정의 성탄절 장식이 모두 끝나서 카메라를 들고 밤풍경을 몇 장 찍었다. 언제나 늘 그렇듯이 오늘 밤도 이제 겨우 3시가 조금 지난 시간인데 아직도 잠 못 들고 고통 속에서 하얗게 밤을 지새우는 병실이 다섯 곳이 보인다. 건너편 강의동에는 의학과 4학년의 의사고시와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의학과 학생들의 기말고사 준비로 불빛이 환하다. 아마도 내년 초가 되어야 학생들은 잠시 방학을 즐길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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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요일부터 ‘남겨진 쪽지’를 읽고 며칠 동안 글쓰기를 시작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주변의 세모의 풍경과 책 속의 시간이 너무도 비슷해서 어쩔 수 없이 감상적이 되고 책 속의 엘레나와 그레이시 그리고 부모인 키스와 브룩 데저리크의 감정과 슬픔 그리고 고뇌와 좌절이 가슴을 파고들어서 어느덧 눈물이 볼을 타고 내린다. 사실 이미 한국에도 3명 또는 5명 중에 한명이 암에 걸린다고 하니까 주변의 친지나 가족들 중에서 암으로 고생하시는 분을 간호해보지 않은 분은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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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의학과 1학년 봄 학기가 시작된 지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새벽에 주인집 할머니가 문을 두드려서 잠을 깨웠다. 방금 시골에서 부친께서 서거하셨다는 전갈이었다. 나는 긴 하루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계란 두 개를 깨서 컵에 담아 마시려고 하다가 다시 책상위에 올려놓고 고향을 향해 재배를 하면서 비로소 선친께서 별세하셨다는 것을 실감했다. 의예과 2학년의 주당 44시간의 강의와 매주 4일 정도는 시험으로 밤을 새워야하는 지독한 한 학기를 마치고 시골에 내려갔을 때 가친께서 황달이 의심되어서 검사를 한 결과가 의외로 나와서 서울 강북 삼성병원(구 고려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한 결과 담관암으로 간과 대동맥으로의 전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치료를 포기하고 시골로 내려와서 주로 통증치료를 근간으로 한 고식적인 치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약 3개월간의 경험이 다시 또렷이 되살아나서 책을 읽는 사이사이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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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편으로는 엘레나가 미만성뇌간신경교종이 발병해서 겪게 되는 증상들이 뇌간의 해부학적인 구조를 알고 있는 나에게는 너무도 구체적으로 다가와서 더욱 고통스러웠으며 또한 항암화학 요법과 방사선 치료로 겪게 되는 고통과 증상의 호전과 악화가 반복되면서 겪게 되는 엘레나와 가족들의 희비와 끝을 알 수 없는 좌절에 낙담하게 된다.

68일째 일기에서 키스는 임상시험 자료를 뒤지며 ‘임상종양학’ 책을 구해서 딸의 종양에 대하여 정보를 얻고 나름대로의 이해를 하려고 시도하면서 “이해되는 내용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내용도 있다. 어떤 부분은 논리적인 같은데 다른 부분은 허점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암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전혀 교육받지 못한 문외한이다. 암에 대한 전문가들이 고심하는 문제를 내가 이해한다거나 수정해 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라고 고백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암환자나 그 가족들이 겪게 되는 고뇌와 딜레마를 너무도 잘 지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암환자에 대한 판단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사실상 종양을 이해하려면 인체의 발생과 성장 그리고 환자의 환경과 생활습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고려가 요구되기 때문이며 종양은 어린 아이들이 키가 크고 체중이 늘어나는 과정과 같으나 단지 그 성장이 조절되지 않는다는 점만이 다르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종양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아는 것처럼 종양은 어느 날 갑자기 발병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에서 진단을 받기까지, 소아암의 경우에서처럼 주로 선천적인 경우에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리는 만성질환이다.

또한 초기에 진단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위암이나 간암 폐암 자궁경부암 유방암 갑상선암 등의 국소적인 암도 사실은 혈액이나 임파선을 타고 원격으로 미세전이가 되었다고 판단하여야 하므로 전신질환으로 분류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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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몸은 약 100조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하루사이에 적어도 5천억 개의 세포가 파괴되고 그 재료는 다른 새로운 세포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상인들에게도 최소한 5백만 개 정도의 세포분열의 조절에 장애가 있거나 DNA의 손상이 발생한 세포들이 만들어지나 건강한 성인의 경우 면역감시에 의해 선별되어서 파괴된다. 우리들이 심각한 스트레스에 노출되거나 과로하는 경우에 체내에서 다량의 부신피질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이러한 경우에 면역감시 체계에 허점이 생겨서 비정상적인 세포가 계속 분열해서 점점 더 조절이 되지 않는 세포로 변성되어서 그 크기가 10억 개의 덩어리가 되면 직경 약 1 cm 크기의 종양이 되는데 이 정도의 크기가 되어야 방사선과학에서 암으로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즉 궁극적으로 암은 면역학적인 질환이며 이러한 암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재발이 빈번한 이유도 바로 10억 개의 이하의 소수의 암세포가 전신에 퍼져있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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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화학요법제 즉 항암제는 그 기원이 2차 세계대전중 화학전에서 사용된 겨자탄 신경가스(nitrogen mustards) 물질로서 1942년 미 국방부(U.S. Department of Defence)에 의하여 항암치료제로 사용하기위한 컨소시엄을 구성하면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항암화학용법제의 단점은 체내의 모든 세포의 분열을 무작위로 억제하여서 골수, 모낭 그리고 소화기의 상피의 증식억제에 의한 혈액학적인 장애와 감염, 탈모, 구토와 설사 등의 소화기 장애를 유발한다는 점이다. 나는 항암제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회복이 불가능한 말기 종양환자에게 이러한 항암제의 투여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환자의 예후를 판단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고 또한 무엇보다 환자 자신의 판단과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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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일째 일기에서 키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빠는 자식을 보호하고 구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한편으로는 내가 이런 일을 미리 대비하고 더 많이 노력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든다. 지켜준다는 말에는 단순히 위협에 맞서 싸우는 것만이 아니라 예방한다는 의미도 포함돼 있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나는 이미 실패했다. 다시 또 실패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엘레나의 경우에는 태어난 이후에 후천적으로 발병하였기 보다는 유전자의 이상에 의한 선천성 장애일 가능성이 많지만 그 외 대부분의 성인에서 발생하는 암은 모두 환경과 생활습관에서 기인할 가능성이 많으므로 우리들은 암의 예방에 더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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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엘레나가 다량의 스테로이드 투약으로 발생한 얼굴이 달덩이처럼 부어가는 쿠싱증후군(Cushing’s syndrome)을 앓으면서 얼마나 고통을 받았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마지막으로 데저리크 부부에게 위안이 될 비밀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엘레나의 영혼이 진정으로 원하고 데저리크 부부와 그레이시가 진정으로 바란다면 언젠가 엘레나는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가족들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나 태어나서는 자기가 엘레나였다는 것을 망각하게 되겠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끌림과 알듯 말듯 한 미소 속에서 그들이 이전에도 만났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왜냐하면 나는 돌아가신 선친을 지금 만나고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12/14/‘09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