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과 하피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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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과 성장기 (1762~1782)

 다산은 1762년(영조 38년) 6월 16일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4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 : 1730~1792)이며,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 1587~1671)의 후손이며 조선시대 유명한 서화가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이다. 다산의 자는 미용(美庸), 용보(頌甫), 귀농(歸農)이고, 호는 삼미자(三眉子), 사암(俟庵), 열수(洌水), 다산 (茶山), 자하도인(紫霞道人), 태수(苔?), 문암일인(門巖逸人) 등이며, 고향집의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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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주위에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7세때 지은 ‘산’이라는 시가 이를 입증해 준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소산폐대산 원근지부동 :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부친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분수에 밝으니 장차 크면 틀림없이 역법과 산수에 능통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15세에 풍산 홍씨와 결혼을 하였고, 16세에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 : 1681~1763)의 저서를 접하고 실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2. 정치 참여의 시기 (1783~1800)

 다산은 22세 때인 1783년(정조 7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경의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때 정조의 눈에 뛰어 총애를 받았다.

 28세 때인 1789년(정조 13년)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살이를 시작한 이후 경기도 암행어사, 동부승지, 병조참의, 우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이즈음 그는 ‘성설(城說)’과 ‘기중도설(起重圖說)’을 지어 수원화성을 쌓는데 유형거(遊衡車 : 돌·목재 따위를 실어나르는 수레)와 거중기(擧重機 :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데 사용하던 재래식 기계)를 만들어서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이로써 많은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목민관(牧民官 : 지방행정의 수장)의 의무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천주교와 만남도 그의 삶에 큰 비난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23세 때 천주교를 처음으로 접했다. 이후 그는 한때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심취하기도 하였으나 성균관에서 학업에 정진하느라고 곧 손을 떼었다. 그는 천주교 신앙과 서양과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기도 하였으니 또한 갖은 시련과 좌절을 맞보기도 하였다.

3. 강진 유배 생활의 시기 (1801~1818)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은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辛酉邪獄 : 1801년(순조 1년) 천주교도를 박해한 사건)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이때 다산의 셋째 형 정약종은 옥사하고 둘째 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현재 경상북도 포항)로 유배되었다. 곧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사건이 일어나서 서울로 다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처음에 주막집에 거주하다가, 1803년 백련사 산책길에서 혜장선사를 만나 교분을 맺었으며, 1805년 혜장선사의 주선으로 고성사로 옮겨 ‘보은산방(寶恩山房)’이라 이름하고 거처하게 되었다. 1808년 윤단의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이사하였으며 이후 생활의 안정을 얻게 되어 고통스러운 유배생활을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으로 승화시키게 되었다. 500여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의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다산초당이 우리나라 실학을 집대성한 장소이다. 한편 동암과 서암 두 초막을 짓고 제자 18명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 백서(帛書) : 크기는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흰 명주천에 작은 붓글씨로 쓰여졌고 모두 1백22행, 1만 3천3백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백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서, 첫째는 신유박해 중 순교한 주 신부 외 30여 명의 빛나는 사적을 열거하고, 둘째는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 간의 골육 상잔(骨肉相殘)의 당쟁이었음을 피력하고, 세 번째로는 조선 교회의 회생과 교우들의 학살에 대한 대비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내용이다.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원래 근 1백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 오래 된 문서를 정리하 면서 우연히 발견돼 마침내 뮈텔 주교에게 보내졌고,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기념품으로 봉정했다.

4. 고향에 돌아와 생활한 시기 (1819~1836)

 57세 되던 해인 1818년(순조 18년)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저술을 계속하였다. 이때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欽欽新書)’, ‘아언각비(雅言覺非)’ 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또한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 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북한강을 유람하여 여유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신작, 김매순, 홍석주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심신을 추스리며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고향으로 돌아온 지 18년 만에 1836년(헌종 2년) 7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 자택인 여유당 뒷산에 묻혔다. 1910년(순종 4년)에 문도(文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하피첩

며 칠전 바람 한 점 없이 날마다 비가 온다 장마가 온다 하면서도 비가 오지 않는 어느 무더운 날 국립 박물관에서 7억 5천만 원에 사서“부모의 향기로운 은덕”이라는 제목의 특별전이 있는 진품 하 피 첩을 보러 국립 박물관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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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필적의 하피첩은 부성애를 볼 수 있는 글입니다(하 피 첩 노을 (하) 치마 (피) 문서 (첩) 노을빛 치마로 만든 소책자) 보물 1683-2호로 전남 강진 유배지에 부인이 보낸 노을 빛의 붉은빛의 치마에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글을 적은 서첩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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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피“란 중국 당나라 때부터 신부가 입던 예복을 뜻한다.

정약용이 긴 세월 동안 천주교 박해로 유배지에서 떠도는 동안 부인 홍 씨가 밑반찬이나 옷가지를 싸서 보내면서 시집올 때 입고 온 빛바랜 명주 치마 한 벌을 함께 보내었고 정약용은 헤진 곳을 피해 마름질해 세 개의 서첩으로 꾸미어 처세술, 학문하는 자의 효도법 등 두 아들과 손자들의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갔으면 하는 다산의 가르침과 사랑을 이 하피첩에 절절히 담아낸 글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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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처 기폐군: 병든 아내가 혜진 치마를 보내며

천리 탁심소: 천리 먼 길 애틋한 정을 담았네

세구 홍기퇴: 흘러간 세월에 붉은빛 다 바래서

창연 염쇠모: 만년에 슬픔을 가늘 수가 없구나

재성 소서첩: 마름질로 작은 소첩을 만들다

요사 계자구: 아들을 일깨우는 글을 적다

서기염이친 : 부디 어버이의 마음을 잘 헤아려

종신전페부 : 평생토록 가슴에 새기려무나

네이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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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권의 소책자에 믿음과 사랑의 표현으로 남긴 교훈의 말로 만들었다 함은 참으로 존경스럽고 본받아 가야 할 부성이라 생각해 보았다

이 하피첩이 발견된 것도 기이하게도 한 재활용 수거용 수래에서 어떤 이의 눈에

보인 것을 예사롭지 않게 보고 그 사람과 거래를 하여 샀다는 보는 눈이 뜨여

있던 사람의 발견으로 보물 같은 유물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다

(한 권은 없어지고 세 권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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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이토록 종교의 믿음을 편안하고 자유로이 할 수 있음이

모두가 선인들 다져놓은 박해와 노고의 힘에 원천을 다시 깨닫고 한량없는 감사를 하게 하는 것이었다.

아스팔트 길에서 되쏘는 열기가 만만치 않은 더운 날이였음에도 덥기를 느끼기보다 가슴에 더 따뜻함 과 뿌듯함을 담아온 하루라 하겠다.

 

 

 

4 Comments

  1. 김진우

    2016년 6월 30일 at 1:45 오전

    하피첩(霞帔帖)의 사연을 보면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내고 있는 남편에게
    시집 올 때 입고 온 치마 저고리를 보낼 생각을 했으니 말입니다.

    장롱에 넣어 둔 옷이 색이 바랠 정도였으니
    까마득한 옛날인데, 그 그리움의 애절함을
    천마디 말보다 더 절실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받아서
    딸에게 그림을, 아들에게는 좌우명을 주었으니
    두분 다 정말 대단합니다.

    인생은 그렇게 슬프면서도 간간이 행복을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더위에 건강 유의 하세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 enjel02

      2016년 6월 30일 at 2:33 오전

      장부로써 굳건한 신념의 믿음과 살아가는 동안에
      어쩔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부부가 느끼고 바람이 통하는
      애절한 정이나 자식에 사랑 교훈의 바탕이 되는
      그 자상함에 가슴이 찡하게 울리는 것 같았어요
      정겨운 글 남겨주심 감사합니다

  2. 산고수장

    2016년 6월 30일 at 6:27 오전

    다산 선생에 관한글은 좀 많이
    읽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하며 지납니다.
    저도 다산 아내 치마에 관한글을 여기서 쓴적이 있습니다.
    애절한 부부애, 끔직한 자식사랑, 지식인들이 살아가는 법, 등을
    잘 일깨워어 주었지요.
    좋은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자주 들리지는 못하지만 한달에 한번씩은 들리겠습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하세요.

    • enjel02

      2016년 6월 30일 at 9:16 오전

      산고수장 님 반갑고 고맙습니다
      그러셨군요 블로그 오래되지 않아서 못 보았나 봐요
      요즘 살아가는 삶보다는 특별한 삶 그러나 사람 살아가는데
      마음은 모두 같을 거라 생각합니다 느낀 바가 많았답니다
      여름 날씨에 건강하시고 좋은 글 많이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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