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다들어렵다고합니다.주식가격이폭락했고,달러환율은오르고요.
건설업체들이줄줄이부도가나고있습니다.
주가폭락으로재정난에몰린경영자들이자살하기도합니다.
며칠전특급호텔서일하는후배는자기호텔투숙객이자살하는사건이있었다고하더군요.
안재환이나최진실의자살도이모든흐름의신호탄이아니었나하는생각이들더군요.
내가자라나는동안,우리나라는눈부시게발전하고부유해졌지만,
돈이란그런것같습니다.상대적인빈곤,심리적인빈곤이더한것같아요.
내가가진돈을다잃고나니까..친구들이걱정한것의첫번째가이런면입니다.
돈부족한것모르고살던네가어찌생활고에허덕이겠니?
그러니남들보다훨씬더견디기힘들것이란말이었죠.
사실은그게아닌데..내추억속에선늘가난했고,배고픈적도많아요.
밥을굶을정도의형편은아니었지만,
어린시절가출해서3일을쫄쫄굶고,길에떨어진국수쪼가리를줏어먹은적이있습니다.
요즘이야예전의저처럼배를곯는아이들이야없겠지만,
그저좋은음식을먹느냐라면이나1000원짜리김밥으로끼니를때우느냐하는차이.
상대적인빈곤감,박탈감이더큰것같습니다.
아무리불경기가와도끄떡없는사람들이존재하구요.
명품으로휘감은사람들도여전히많고,
그렇다고부자들을시샘하거나부럽거나하지도않아요.
이건내성격인데,있으면나누고,없으면얻고,
가난하다는건나누어줄것이적어아쉽다고느끼긴하지만크게불편하진않습니다.
몸이나마음이가난할때더생각나는곳이이곳입니다.
내추억이깃든곳이기도하구요.
명동에가면값싸고맛있는막국수집이있다!
1978년,명동에서도외진명동성당후문쪽골목에문을연집입니다.
그당시는명동제일백화점(지금은M타운이라고이름이바뀐것같아요)2층에
조명가게들이있었구요.거기에제가자주가던프랑스문화원에서자주마주치던
이황림감독(당시엔경업이형이렇게불렀어요)
‘영상연구회’란독립영화동아리가있었는데,그동아리를만든분이세요.
회장이서강대철학과를다니던김현주씨(프랑스파리에서오래거주하고계시고..)
같이서강대에재학중이던이황림씨랑두분절친한친구사이로영상연구회를만들었는데,
‘헐리우드키드’의작가안정효씨도멤버셨던걸로..
화가김점선씨랑영화평론하는한옥희씨도한때멤버였어요.
하긴다들’영화’라는매체에매료되었던사람들입니다.
전가끔기웃거리는정도,그냥’막내,꼬맹이’라고불렸구요.
사실영화만들돈도없는사람들이라..모임은지지부진했지만,
프랑스문화원에서자주마주치던인연으로형이조명가게를냈다는소식에놀러갔더니
이선배님이맛난것사준다고데려간곳이이집입니다.
그때막문을열었던막국수집.정말로작은가게에간이의자.것도자리가없어
가게안이나밖에선채로국수를먹던사람들모습이지금도눈에선합니다.
그때가격이150원이었습니다.아마그무렵명동에서제일싼국수였던것같구요.
그래도참맛나게먹었습니다.
된장을살짝푼다시국물에콩나물과김가루를고명으로얹어주고,
고추장다데기양념을곁들여줍니다.
30년을한곳에서막국수를팔았더니,요즘은일부러먼곳에서찾아오는손님도많다는주인아주머니.
-저아주머니사진한장찍을게요.했더니
얼른립스틱새로바르고포즈를잡아주십니다.참곱고편안한인상이시지요!
-오랜만에왔어요.하는제게외국서왔냐고하셨어요.일본서온사람같다구요.
아님그림그리는사람이예요?하고묻습니다.
하긴30년전은명동이문화의거리였으니까요.명동화랑도있고,국립극장도명동에있었고,
오랜단골들중에외국으로이민나간사람들이많은데..
남미같은곳으로이민가신분들중에
트렁크를든채로공항에바로이가게로오시는분도있답니다.
고국에돌아와맨먼저먹고싶은것이이집막국수라니!
아주머님이랑한참추억이깃든이야기들을나누었습니다.
다들호주머니가비고배고팠던시절이라..국수값못내고도망가는사람들도많았고,
가장인상에남는것은데이트중인젊은남녀가들어와국수를먹었는데,
둘다돈이하나도없었다는것.서로상대방이계산할줄알았던거죠.
아이들일곱명이몰려와국수를먹고는제일어린남자아이하나남겨두고다도망친일도
있었다더군요.돈은없는데국수는먹고싶고..
친구들중제일어리고착해보이는아이면야단을덜맞을거라는계산이었겠죠.
아주머니는아이들행동이어이없어웃고말았다고하시네요.
내가처음먹을때150원이었던국수가작년에가봤더니3000원으로올랐습니다.
국수양도두배가되었답니다.10년전쯤에1500원을내고먹었던기억이나네요.
이집이예전만큼은손님이북적대지는않아도(점심시간에붐비는건여전하답니다.)
또지방이나외국에서까지이국수맛을못잊고추억의맛집을찾아오는손님들이많고요.
나처럼명동이란지명과함께저절로이국수집이떠오르는분들도많으실것같습니다.
*가게의절반이주방이라테이블은하나도없습니다.벽을따라좁은간이식탁이붙어있어요.
*이건작년겨울후지디카로찍어둔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