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간 시인들 – 감포 대왕암

감은사지를둘러보고감포를향하는버스안에서일행중감태준시인이농담을하신다.

"감포는우리씨족이살고있는집성촌입니다.가보시면아시겠지만,감포이발관,감포방앗간,감포다방,감포슈퍼..죄다’감’氏들이예요."

감태준시인의씨족들이모여살고있다는감포바다를향해선시인들.

감포바다의갈매기들도역시감氏겠지?감포갈매기들!

동해바다를바라보며,그보다는문무왕릉를보고만파식적의소리를듣기위해서감포로온것인데..

이시대의만파식적은어떤것일까?삼국유사를읽으면서내가가장궁금했던것이만파식적이었는데..

삼국을통일한문무대왕께서나라의우환이생기면불으라고명하셨던그신기의피리.연평도가포격당했을때불었어야했던피리말이다.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에전하는일종의가로피리이다.《삼국유사(事)》에의하면신라제31대신문왕(王)은아버지문무왕(王)을위하여동해변에감은사(寺)를지어추모하였는데,죽어서해룡(龍)이된문무왕과천신(神)이된김유신(信)이합심하여용을시켜동해(海)중의한섬에대나무를보냈다.이대나무는낮이면갈라져둘이되고,밤이면합하여하나가되는지라왕은이기이한소식을듣고현장에거동(動)하였다.

이때나타난용에게왕이대나무의이치를물으니,용은“비유하건대한손으로는어느소리도낼수없지만두손이마주치면능히소리가나는지라,이대도역시합한후에야소리가나는것이요…또한대왕은이성음(音)의이치로천하의보배가될것이다…”라고예언하고사라졌다.왕이곧이대나무를베어서피리를만들어부니,나라의모든걱정·근심이해결되었다한다.그리하여이피리를국보로삼았는데,효소왕(王)때분실하였다가우연한기적으로다시찾게된후이름을만만파파식적(笛)이라고쳤다고한다.대금(大笒)의기원을이만파식적에두는사람도있으나,이미이전에삼죽(竹)이있었음이밝혀졌다.이설화에는신라가삼국통일이후,흩어져있던백제와고구려유민의민심을통합해나라의안정을꾀하려했던호국사상이담겨져있다.

[출처]만파식적[萬波息笛]|네이버백과사전

왼편으로보이는것이대왕암이다.감포앞바다의그야말로지척의거리에있다.문무대왕은잦은왜적의침입을경계하고통일신라의안정을위해죽어서도나라를지키겠다는정신을바다위에다심어놓았다.저작은바위에유골이없다한들무슨상관인가?바다를묘지로삼은그호국정신이동해바다보다넓고크다.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사적제158호.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한다.삼국통일을완수한문무왕(文武王)은통일후불안정안국가의안위를위해죽어서도국가를지킬뜻을가졌다.그리하여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유언으로,자신의시신(屍身)을불식(佛式)에따라고문(庫門)밖에서화장하여유골을동해에묻으면,용이되어국가를평안하게지키도록(護國大龍)하겠다고하였다.이에따라유해를육지에서화장하여동해의대왕암일대에뿌리고대석(大石)에장례를치렀다.사람들은왕의유언을믿어그대석을대왕암이라고불렀다.

대왕암은육지에서불과200여미터떨어진가까운바다에있다.큰바위가주변을둘러싸고있고,중앙에약간의넓은공간이있는데,이공간에대석을이동하여배치한것으로보인다.중앙의대왕암주변을큰바위(화강암)가둘러싸고있는데,네방향으로물길이나있어주변바위는네부분으로구분되어있다.자연적으로물길이나있는상태이나약간의인공을가하여튀어나온부분을떼어내어물길이난가운데공간을약간가다듬은흔적이발견되었다.-네이버백과사전

서해바다에도대왕암이있어야했을까?대왕암이자리한동해의감포는참평화롭고한적했다.

우리일행들에게최고의문화해설사역할을해주신김성춘선배님과박건한시인.감포에왔으니기념으로바닷내음물씬나는파래를안주삼아태화막걸리한잔씩하다.버스안에서도황룡사의저녁놀이어떤지,밤의첨성대가어떤지,문화유산을발굴하기전에보존부터신경써야한다는것.발굴이란미명하에문화재가훼손되는일이없어야한다는이야기를무척진지하게하셨다.

깊은가을겨울달밤이나새벽녁홀로경주의유적지를거닐며옛신라인들과마음의대화를나누었을김성춘시인의모습이머릿속에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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