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성곽의돌담이얼마나아름다운지,잠시차를길옆에세워두고후닥창의문을둘러보기로했다.
이돌담만보고도내가슴이마구뛴다.욕심같아서는성곽돌담전부를열심히찍어보고싶은데,어느날인가는…
현판창의문이란글자위에새겨진것이뱀일까?줌렌즈와시간적여유가있다면확인할수도있었을텐데..아쉽다.
잘다듬어진이좁은길이야말로선조들이창의문을지나도성안으로들어가는옛길이아니었을까?오래전수원의서울농대를찾아가식물전문가를인터뷰한적이있다.성함이랑왜갔었는지도잊었지만,그분말씀중에길가에자라는나무와풀을보면길의나이를알수있고,식물의종류와풀이자라는위치로옛길도찾을수있다고했다.식물하나도무심히자라는것이아니란것.길에도나이가있다는것.초소옆의좁은돌길을보며이대화를떠올린다.
성곽은차도로끊어졌다가건너편으로이어지고있다.이걸복원할수는없는걸까?하긴차가다녀야할길이니..
오래된돌들.오후햇살을받는성벽의색이따뜻하고부드럽다.세상무엇보다아름다운것이시간과자연이만들어낸이런귀한색감.그런데잘린성곽위의철조망이라니…저기에다꼭설치해야만하는것일까?
누각안에서바라본풍경
역광이라누각의지붕선만보이는데,이누각외의윗길은촬영제재를받았다.군사경계지역이란다.
창의문(彰義門)
서울종로구청운동에있는문(門).
북문(北門)또는자하문(紫霞門)으로도불린다.1396년(태조5)서울성곽을쌓을때세운사소문(四小門)의하나로창건되어창의문이란문명(門名)을얻었다.북한(北漢)·양주(楊州)방면으로통하는교통로였으나1416년(태종16)풍수지리설을주장하는자들이이곳의통행이왕조에불리하다하여폐문(閉門)한채일반의통행이금지되었다가1506년(중종1)에다시열어놓았다.1623년인조반정(仁祖反正)때는능양군(陵陽君:인조)을비롯한의군(義軍)들이이문을부수고궁안에들어가반정에성공한유서깊은곳이기도하다.
문루(門樓)는임진왜란때불타없어진것을1740년(영조16)다시세우고다락안에인조반정공신들의이름을판에새겨걸었다.1958년크게보수하였으며,정면4칸,측면2칸의우진각기와지붕으로서울사소문중에서유일하게완전히남아있는문이다.-[출처]두산백과
창의문을속칭자하문(紫霞門)이라한것은창의문이자핫골인지금의청운동에있으므로해서생긴속칭이다.청운동일대는골이깊고수석이맑고아름다워서개성의자하동과같다고하여자핫골이라하였다.
자하문모래가깨끗하고아름다워찾는사람이많았는데사천(沙川)이라불리던냇가는바위산으로이루어진삼각산과백악산사이를흐르는개울로장마에깍여내려오는모래가많았다.때문에사람들은모래내(沙川)라고불렀다.
또한자하문고개에서바라보는도성은장관이었다고한다.경회루가우뚝솟아있고멀리숭례문이시야에들어오고좌백악우인왕을끼고목멱산(현남산)을바라보면별천지에온느낌에잠시쉬었다가가는사람들이많았다고한다.-지식검색
안내소창을두드려문이름을확인하다.자하문이라고생각했기때문이다.작은창으로안내인은내다보지도않은채그저옆의안내판을읽어보라고한다.나도비슷한과천향교안내인으로근무해보았기에조금섭섭했다.
찾아오는분들한분한분안내하고내가향교에대해아는것은가능한다설명해드리고향교란곳에관심과애정을가지도록애를썼었는데..우리는이런몸을녹일초소조차없이추위에무방비생태였었는데…하긴날이몹시추웠으니까,또요즘은문화해설가는따로있으니까안내소를지키기만하는분이었겠지.
산을다니다보니사진에도취미를갖게된막내가창의문을카메라에담는모습.
방콕에서오래거주하다보니태국사람이다된동생은창의문앞의눈과기념사진을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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