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글씨

나의주민등록증에는분홍색의작은표식이하나있습니다.

5년전부터붙어다니는분홍글씨.

[각막기증]이라는분홍글씨입니다.

당신께서봉사처를찾아지체부자유아들을씻기고먹이고

빨래하고늦게돌아오셨다는마음글을읽은연후에

두서없이바쁘게만살아온제근래의나날들을반성하였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나만잘살면뭐하는겨]라고주창하시던옳곧은양반의

책을읽었던그신선한충격의독후감정이새록했습니다.

연전에엄니께서백내장수술을종합병원에서받으셨습니다.

형제들이돌아가면서침대맡에서밤샘을하곤했습니다.

병원이란곳이멀쩡한사람도들어가면환자가된다는것을

그때어렴풋하게나마체득하였더랬습니다.

침대옆바닥간이침대에서잠을자야하는지경에처하고보니

온삭신이쑤시고

엎어지고제껴져도도통수면을취할수가없었습니다.

한밤중에주기적으로들어오는간호사들과

고통으로밤을지새우는

옆침상의낮은신음소리와

복도의수선스러움에번번히밤잠을설치고

이튿날서점에서책을고르지도못하고

서고의책더미사이에앉아토막잠을자곤했습니다.

그때수술로눈을가리신

엄니의두눈의갑갑함을헤아려볼

요량으로두눈을가리고

병원복도며화장실이며휴게실을

한밤중에더듬대며다녀봤습니다.

숨이막혔습니다.

온세상이검은벽그자체였습니다.

잠시의한시적인눈가림이라는희망적인생각이없이

영원한암흑천지간에내가살아가야한다면

그절망과고통은누구라서혜량키나하시겠습니까?

그산같이무너지며덮쳐오는절망감을감당할재간이

내게있어줄런지요?

자신없는일입니다.

그날로저는장기기증을하기로마음을먹었습니다.

일단은부분장기를택하였습니다.

각막기증단체에서서류를보내오고

엄숙한마음으로법적인서류절차를마쳤습니다.

이제내눈은내눈만이아닙니다.더욱잘건사를해야할

법적인책임이내게부여된것이지요.

내사후에도나는다른사람의눈이되어

이아름다운세상을더바라보게되었으니

이얼마나덤으로얻은행복이며

찬란한광명으로다가오는행운이아니던지요.


일전에안해와굳은약조를하였습니다.

우리부부의사후에모든장기를기증하자고말입니다.

다른위급한생명들에희망이고삶이고환희를안겨주고

그러고도남은내육신일랑은화장을하여

우리둘이그렇게도좋아하는비들목산벚골짜기에뿌리고

또한줌의재는댓골저수지에흩뿌려서

저아름다운댓골저수지를부유하며

물색이바뀌는계절마다의풍광을바라보며살자고..

자식들에게유언으로남기기로굳고굳은약조를하였습니다.

이세상에왔다가저세상으로돌아가는길위에서

뒤도안돌아보고휘이휘이가고싶지만은않았습니다.

그길위에서살아온지난한평생도돌아보고

아름다운풍경속에도앉아보고

명경같은수면위를두둥실떠다니며

이세상이아름다운소풍길였다고

천상병님의싯구절을읊조리면서

그길위에서

오래오래발길을머무르고싶었습니다.

봉사처를방문하시고고단한몸으로돌아오셨다는

당신의글한줄이

엊그제부터내내

밭고랑에서호미로밭을매면서도

지금교무실에앉아업무를보면서도..

묵직한화두로다가앉아

느슨했던내마음밭을새삼스레일궈놓으십니다그려.

글을마치면서주민등록증을꺼내

내마음에새겨진

분홍글씨를다시들여다봅니다.

어차피인생길은홀로가는길

종국에는혼자넘어가는고독한길

나만잘살면뭐합니까.

당신의그아름다운삶에

매양이좋은날로만가득하시길바랍니다.

그간격조하였던몇날이지나

다시금비들목골짜기에서팔짱을끼고걸었듯

대전의어느한갓진길을걸어볼그날을기다립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그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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