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랑집

가즈랑집

-백석-

승냥이가새끼를치는전에는쇠메든도적이났다는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고개밑의

산너머마을서도야지를잃는밤짐승을쫓는깽제미소리가무서웁게들려오는집

닭개짐승을못놓는

멧도야지와이웃사촌을지나는집

예순이넘은아들없는가즈랑집할머니는중같이정해서할머니가마을을

가면긴담뱃대에독하다는막써레기를몇대라도붙이라고하며

간밤에섬돌아래승냥이가왔었다는이야기

어느메산골에선간곰이아이를본다는이야기

나는돌나물김치에백설기를먹으며

옛말의구신집에있는듯이

가즈랑집할머니

내가날때죽은누이도날때

무명필에이름을써서백지달아서구신간시렁의당즈깨에넣어대감님께

수영을들였다는가즈랑집할머니

언제나병을앓을때면

신장님단련이라고하는가즈랑집할머니

구신의딸이라고생각하면슬퍼졌다

토끼도살이오른다는때아르대즘퍼리에서제비꼬리마타리쇠조지가지

취고비고사리두릅순회순산나물을하는가즈랑집할머니를따르며

나는벌써달디단물구지우림둥굴레우림을생각하고

아직멀은도토리묵도토리범벅까지도그리워한다

뒤울안살구나무아래서광살구를찾다가

살구벼락을맞고울다가웃는나를보고

밑구멍에털이몇자나났나보자고한것은가즈랑집할머니다

찰복숭아를먹다가씨를삼키고는죽는것만같아하루종일놀지도못하고

밥도안먹은것도

가즈랑집에마을을가서


당세먹은강아지같이좋아라고집오래를설레다가였다

白石(백석·1912∼1963年)

이천재시인의이름을기억하는대중은거의없다.그의시를읽은사람은더더구나드물다.소수의문예연구자들만이그의이름을기억할뿐이다.식민지시대의이뛰어난서정시인은남쪽에서는잊혀졌고,북쪽에서는문인인명록에서조차삭제된채고독과질곡의시간들속에서그의이름은화석이되었다.

눈이내린다.북방산간지방의눈은한번내리기시작하면좀처럼그치질않는다.몇날며칠을연이어내린눈은사람키를넘어버리고,길들을지워버린다.먹이를찾아내려왔던산토끼들이눈구덩이에갇혀있는일도흔하다.국수집도겸하고있는산간지방의旅人宿(여인숙).윗목에는메밀가루포대가그득히쌓여있고,여기저기굴러다니는목침들은새까마니때가올라있다.

「박을삶는집/할아버지와손자가오른지붕위에한울빛이진초록이다/우물의물이쓸것만같다//마을에서는삼굿을하는날/건넌마을서사람이물에빠져죽었다는소문이왔다//노란싸릿잎이한불깔린토방에햇츨방석을깔고/나는호박떡을맛있게도먹었다//어치라는산새는벌배먹어고흡다는골에서돌배먹고앓던배를아이들은열배먹고나았다고하였다」(「여우난골」)여우우는소리가차가운산간의겨울하늘을훑고지나갔다.사나이는불현듯어린시절을떠올린다.방꾼이아래윗마을로방을외치고지나가고어둠을향해짖는마을개들의소리가빈하늘을공허하게흔들었다.

낮에새잡이그물에걸린꿩을삶고,아버지는산너머국수집에밤참국수를받으러갔다.아이는할머니의돋보기를쓰고앉아산너머마을에서가축을노리고내려오는산짐승들을쫓으러울려대는꽹과리소리에가만히귀를기울였다.백석이태어나고자란마을은여우난골로불리었다.명절날이면인근의친인척들이몰려왔고,아이들은아이들대로신이났다.집안은근동에서몰려온친척들로북적댔다.노인들이그득히모여있는방에선새옷내음이났고,집안팎에는인절미송구떡콩가루찰떡이며나물볶는냄새가진동했다.

백석은1912년7월1일평안북도정주군갈산면익성동1013호에서부친인水原(수원)白氏(백씨)時璞(시박)과모친丹楊(단양)李氏(이씨)鳳宇(봉우)사이의장남으로태어났다.그의본명은백기행.부친은개화한인물로당시에는드물었던사진기술을가지고있던이였다.백석은五山高普(오산고보)를나왔는데,특별히문학과영어에소질을보였다.백석은오산고보를졸업했으나집안사정으로대학에진학하지못하고,고향에서책이나읽으며소일하고있었다.이듬해조선일보신춘문예에당선한백석은조선일보사진반장으로재직하던부친의권유로계초방응모의장학금을받아도쿄의명문대학인청산학원(靑山學院)으로유학을떠났다.청산학원영어사범과를우등으로졸업하고조선일보사의교정부에입사했다.

1937년겨울,함흥영생고보영어선생이었던백석은함경도산간오지에홀로와詩稿(시고)들을정리하고있었다.바로전해백석은시집「사슴」을출간한뒤문단으로부터호평을받았다.「사슴」은대학졸업후신문사에입사한뒤신문사일과틈틈이번역일을하며준비했던백석의초기작33편의시들을담은처녀시집이다.청년의가슴에는시에대한열망으로가득차있었다.두해나다니던조선일보사교정직을작파해버리고,함흥으로올라온것도본격적으로시를쓰기위해서였다.

「가난한내가/아름다운나타샤를사랑해서/오늘밤은푹푹눈이나린다//나타샤를사랑은하고/눈은푹푹날리고/나는혼자쓸쓸히앉어燒酒(소주)를마신다/소주를마시며생각한다/나타샤와나는/눈이푹푹쌓이는밤흰당나귀타고/산골로가자출출이우는깊은산골로가마가리에살자//눈은푹푹나리고/나는나타샤를생각하고/나타샤가아니올리없다/언제벌써내속에고조곤히와이야기한다/산골로가는것은세상한테지는것이아니다/세상같은건더러워버리는것이다」(「나와나타샤와흰당나귀」)백석은산골로가는것은세상한테지는것이아니다,라고했다.그는삶을「가난하고외롭고높고쓸쓸」한것이라고생각했지만,프랑시스잠과陶淵明(도연명)과라이너마리아릴케를떠올리며눈덮인함경도산간지방의고적한여인숙에서「함주시초」를비롯하여여러시편들을썼다.

가슴한편은허전했다.두해전친구허준의결혼피로연에서잠깐만났던이화고녀학생이던「蘭(란)」이란처녀며,지난가을영생고보선생들과의회식자리에만난「子夜(자야)며,영생고보학내분규로퇴학당한애제자고순덕의얼굴이착잡하게스쳐갔다.소뿔등잔에아주까리기름을먹은심지불꽃이춤을출때그의그림자도바람벽에서춤을추었다.

1939년.29세때백석은영생고보를사직하고다시서울로내려와조선일보사에재입사했다.그무렵조선일보사사진반장으로있던부친은신문사를그만두었다.조선일보동료기자신현중에게이끌려란의집을방문했던것도그무렵이다.란을만나는순간백석의심장은터질듯쿵쾅거렸고,혈관은펄떡거렸다.백석은자신의마음을온통사로잡은통영출신의미인란에게끝내좋아한다는말을하지못했다.좋아한다고고백하기는커녕재입사한지열달만에조선일보사를그만두고만주로떠나버렸다.백석은친구소설가허준과화가정현웅에게「만주라는넓은벌판에서시일백편을건져오리라」고했다.1940년1월만주신경에도착한백석은우선집을얻었다.신경시東三馬路(동삼마로)시영주택35번지黃氏方(황씨방)이그곳이다.곧이어친구들의도움을얻어만주국경제부에자리를얻었다.나중에일본인들의횡포에못이겨그자리를그만둘때까지그는詩作(시작)과직장일에충실했다.

친구와함께살았던황씨방은토굴이나같은집이어서주말마다신경근교의러시아인촌으로방을얻으러돌아다녔다.그때북만주산간오지의원시부족들과도친교를맺었고,밤이면시일백편을건지기위해시작에몰입했다.30세의백석은이미한반도에서가장뛰어난서정시인으로서의입지를굳힌「그드물다는굳고정한갈매나무」와같은시인이었다.그의시들은발표될때마다화제였고,그의시가실린잡지들은책방에나오기무섭게팔려나갔다.

백석의명편「南新義州(남신의주)柳洞(유동)朴時逢方(박시봉방)」을실었던「학풍」1948년10월호후기에서는「밤하늘의별처럼많은시인들은과연얼마나이고고한시인에육박할수있으며,또능가할수있었더냐」라고백석을극찬했다.그의시는아름다운북방언어의보고이다.마가리개니빠디잠풍몽둥발이벌배열배매감탕토방돌아릇간홍게등텅납새무이징게국가즈랑집깽제미물구지우림둥글레우림광살구모랭이노나리꾼청밀냅일눈곱새담앙궁고뿔갑피기게사니울파주나주볕땃불밭최뚝마톺양지귀…하며,고조곤히지중지중쇠리쇠리하야씨굴씨굴째듯하니자즈러붙어벅작궁고아내고너들씨는데오구작작살틀하던임내내는이즈막하야깨웃듬이홰즛하니…와같은이제는들을수없는,그리고낯설어소통이되지않을북방정서가깊이배인말들.백석의현저한토속어지향의시세계는한국인의얼과혼을황홀할정도로빼어나게담아내고있는것이다.

그러나,일제의식민지지배가강화되면서백석은한곳에정주하지못하고여기저기를떠돌았다.「어느사이에나는아내도없고,또,/아내와같이살던집도없어지고/그리고살뜰한부모며동생들과도멀리떨어져서,/그어느바람세인쓸쓸한거리끝에헤매이었다」(「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몇번의결혼과실패,방랑…일제의수탈로거덜나버린참담한민족현실앞에서절망한시인은서서히꺾이어갔다.「이미해는늙고달은파리하고바람은미치고보래구름만혼자넋없이떠」돌았다(「북방에서」).백석은만주국경제부자리를그만둔뒤낙향하여농사를짓다가,안동세관의세무공무원으로,다시월북하는등「보래구름」처럼떠돌다가평양에정착한다.광복후북쪽에남은백석은고당조만식선생의통역을맡는등의사회활동을하며,러시아작품들을번역하는일에몰두했다.그러나,격동하는시대는그를가만두지않았다.북한의어느문학단체에도가입하지않은그는연금,집필금지등의수난을감수해야만했다.그이후북한문인인명록에서조차이름이삭제되고,그의삶의궤적은증발해버린다.1930년대의가장뛰어난시인중의한사람이었던백석은북한에서금지되고,남한에서는기피된채잊혀져갔다.1963년,52세로그가사망했다는소식이일본에알려졌을뿐이다.

<장석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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