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슬픈 백석

백화(白華)

-백석-

산골집은대들보도기둥도문살도자작나무다

밤이면캥캥여우가우는산(山)도자작나무다

그맛있는메밀국수를삶는장작도자작나무다

그리고감로(甘露)같이단샘이솟는박우물도자작나무다

산(山)너머는평안도(平安道)땅도뵈인다는이산(山)골은온통자작나무다

김영한님(자야)은일찍부친을여의고

할머니와홀어머니슬하에서성장했습니다.

금광을하다파산한친척때문에권번기생생활을시작한김한영님은
시인백석의연인`자야(子夜)’로도널리알려져있습니다.

백석(1938)이함께만주로떠나자고제의했으나

혼자서울로돌아왔다고되어있습니다.

같은해에조선일보기자로다시서울로뒤따라온백석과재회하고
청진동에다살림을차렸구요.

다음해인1939년백석이만주의신찡으로떠나게되면서이별했습니다.

1935년조선어학회회원이던해관

신윤국선생의후원으로일본에가서공부하던중
해관의투옥소식을듣고면회차귀국하여함흥에일시머물렀다들른곳이함흥관입니다.

1936년함흥영생고보영어교사이던

청년시인백석.

1936년함흥영생고보영어교사이던청년시인백석과뜨거운사랑에빠진것은
어찌보면운명의만남한줄기같습니다.

(저는운명이란한줄기가아닌여러줄인데그중한줄기로인생을산다생각하거든요)

아녕(자야)은1953년중앙대학교영어영문학과를만학으로졸업했습니다.
영문학을택한이유는백석이영문학을전공한것과도조금영향이있을듯.

1989(88년?)년백석시인에대한회고기록
‘백석,내가슴속에지워지지않는이름’
을창작과비평에발표했습니다.

백석의북한내흐름이알려진것은소설가송준이중국과일본을
돌아다니며백석가족에게소식을들을수있는것이결정적계기입니다.

김영한대원각쥔도백석과의헤어짐이

못이룬사랑의에너지로승화시켜

세상을사는원동력이되었습니다.

어찌되었건남북분단사로증발했던백석이이제는
조지훈,김소월,윤동주,서정주시인등많은이들과어깨를나란히하는
대시인으로올라와있음을보고아녕(자야)은하늘꽃나라에서자기일처럼기뻐하겠죠.

백석의시에서사랑에대한후회나자기핍박이나타나는것을보면
그이도아마만주유랑시절이나해방전후에갈등을겪은것으로보입니다.

백석을현재의이위치에올려놓는데

김한영여사와백석문학상입니다.

우리현대시문학사의한획을그은

백석(白石)시인의문학정신을기리는백석문학상.

자야(子夜,金英韓)여사가내놓은2억원의기금으로

1997년10월에백석문학상을제정하였습니다.

매년4월을기준으로

2년내에출간된뛰어난시집에시상합니다.

백석이’사슴’이란시집을낼당시

말한필이오원이었는데
백석의시집’사슴’이이원이었다고합니다.

100부한정판매를하였는데

시인윤동주는이책의필사본을항상가지고다녔답니다.

백석의시’흰바람벽이있어’와동주의시’별헤는밤’을살펴보면
윤동주시인이백석을얼마나좋아했는지짐작할수있습니다.

백석이학교다니던시절의교장(오산중)이었던고당조만식이
당시정주에서하숙을치고있는백석의집에서하숙을했다고전합니다.

북방에서

-백석-

아득한옛날에나는떠났다
부여(扶餘)를숙신(肅愼)을발해(勃海)를여진(女眞)을요
(遼)를금(金)을
흥안령(興安嶺)을음산(陰山)을아무우르를숭가리를
범과사슴과너구리를배반하고
송어와메기와개구리를속이고나는떠났다

나는그때
자작나무와이깔나무의슬퍼하든것을기억한다

갈대와장풍의붙드든말도잊지않었다
오로촌이멧돌을잡어나를잔치해보내든것도
쏠론이십리길을따러나와울든것도잊지않었다

나는그때
아무이기지못할슬픔도시름도없이
다만게을리먼앞대로떠나나왔다
그리하여따사한햇귀에서하이얀옷을입고

매끄러운밥을먹고단샘을마시고낮잠을잦다
밤에는먼개소리에놀라나고
아침에는지나가는사람마다에게절을하면서도
나는나의부끄러움을알지못했다

그동안돌비는깨어지고많은은금보화는땅에묻히고

가마귀도긴족보를이루었는데
이리하야또한아득한새옛날이비롯하는때
이제는참으로이기지못할슬픔과시름에쫓겨
나는나의옛하늘로땅으로-나의태반(胎盤)으로돌아왔으나

이미해는늙고달은파리하고

바람은미치고보래구름만

혼자넋없이떠도는데

아,나의조상은,

형제는,일가친척은,정다운이웃은,

그리운것은,사랑하는것은,우러르는것은,나의자랑은,

나의힘은없다

바람과물과세월과같이지나가고없다

1953년중앙대학교영어영문학과를만학으로졸업한자야.

    말년에김일성뺏찌를달고

    아,슬픈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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