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슬픈 백석
-백석- 산골집은대들보도기둥도문살도자작나무다 밤이면캥캥여우가우는산(山)도자작나무다 그맛있는메밀국수를삶는장작도자작나무다 그리고감로(甘露)같이단샘이솟는박우물도자작나무다 산(山)너머는평안도(平安道)땅도뵈인다는이산(山)골은온통자작나무다
시인백석의연인`자야(子夜)’로도널리알려져있습니다.
청진동에다살림을차렸구요.
다음해인1939년백석이만주의신찡으로떠나게되면서이별했습니다.
해관의투옥소식을듣고면회차귀국하여함흥에일시머물렀다들른곳이함흥관입니다.
어찌보면운명의만남한줄기같습니다.
아녕(자야)은1953년중앙대학교영어영문학과를만학으로졸업했습니다.
영문학을택한이유는백석이영문학을전공한것과도조금영향이있을듯.
‘백석,내가슴속에지워지지않는이름’을창작과비평에발표했습니다.
돌아다니며백석가족에게소식을들을수있는것이결정적계기입니다.
어찌되었건남북분단사로증발했던백석이이제는
조지훈,김소월,윤동주,서정주시인등많은이들과어깨를나란히하는
대시인으로올라와있음을보고아녕(자야)은하늘꽃나라에서자기일처럼기뻐하겠죠.
백석의시에서사랑에대한후회나자기핍박이나타나는것을보면
그이도아마만주유랑시절이나해방전후에갈등을겪은것으로보입니다.
자야(子夜,金英韓)여사가내놓은2억원의기금으로
백석의시집’사슴’이이원이었다고합니다.
100부한정판매를하였는데
윤동주시인이백석을얼마나좋아했는지짐작할수있습니다.
백석이학교다니던시절의교장(오산중)이었던고당조만식이
당시정주에서하숙을치고있는백석의집에서하숙을했다고전합니다.
부여(扶餘)를숙신(肅愼)을발해(勃海)를여진(女眞)을요
(遼)를금(金)을
흥안령(興安嶺)을음산(陰山)을아무우르를숭가리를
범과사슴과너구리를배반하고
송어와메기와개구리를속이고나는떠났다
나는그때
자작나무와이깔나무의슬퍼하든것을기억한다
오로촌이멧돌을잡어나를잔치해보내든것도
쏠론이십리길을따러나와울든것도잊지않었다
나는그때
아무이기지못할슬픔도시름도없이
다만게을리먼앞대로떠나나왔다
그리하여따사한햇귀에서하이얀옷을입고
밤에는먼개소리에놀라나고
아침에는지나가는사람마다에게절을하면서도
나는나의부끄러움을알지못했다
그동안돌비는깨어지고많은은금보화는땅에묻히고
이리하야또한아득한새옛날이비롯하는때
이제는참으로이기지못할슬픔과시름에쫓겨
나는나의옛하늘로땅으로-나의태반(胎盤)으로돌아왔으나
이미해는늙고달은파리하고
아,나의조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