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 백석 (월간 『현대시』.1990.5)

내고보시절의은사백석선생

-김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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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1934년부터이후

5년간영생고보를다녔다

그러니까그때내가3학년이었으니1936년봄

어느오후시간이었다고기억된다

수업시간사이에5분씩휴식시간이있어서

나는마침우리교실이있던2층창가에서운동장쪽을내려다보고있었다

그런데한양복차림의’모던보이'(당시에는멋쟁이신식청년을모두들이렇게불렀다)가

교문으로성큼성큼들어오고있었다

운동장을가로질러학교의현관으로서숨없이걸어들어오는그의옷차림은

일본식용어로’료마에’라고하는

두줄의단추가가지런히반짝이는곤색양복이었다

모발은모두뒤로넘어가도록빗어올린’올백’형에다

유난히광택이나는가죽구두는유행의첨단을망라한세련된멋쟁이의모습이었다

이런옷차림과멋스러운스타일은

당시인구가고작5만밖에안되는함흥에서는좀처럼보기힘든모습이었으므로

함께내려다보던4학년을조(乙組)의동급생들은창틀에매달려

일제히우우하는함성을그’모던보이’에게보내었던것이다

다음날아침

운동장에서는여느때와마찬가지로조회가열렸고

보통때와는다른것이새로부임한선생님한분을김관식교장선생님이

학우들에게소개를하는것이었다

새로부임한교사는다름아닌

우리가어제오후에운동장을가로질러오는모습을보았던바로

그’모던보이’였던것이다

선생님의성함은백석

2학년담임을맡게된그선생님은영어과목을담당하셨다

나이는스물다섯

일본동경의아오야마학원영문과출신이라고소개되었다

나중에들으니서울에서『사슴』이라는제목의시집을

이미발행한명망높은시인으로서

조선일보사의가자로도근무했던분이라고하였다

우리는그날부터백석선생이가르치는영어수업을받게되었다

그로부터사흘후였을것이다

백선생님은출석부를옆에낀채

맨앞줄의학생부터차례차례로50여명의학생을모조리얼굴만보며

이름을불러가는것이아닌가?

더욱놀라운것은선생님이부르시는이름들이

단하나도착오가없이정확한호명을하였다는것이었다

우리들은꼭무엇에홀린듯어리둥절하였다

선생님의그모습은당시우리들에게있어서는

거의신기(神技)라할만한것이었다

나이많은선생님들은이름을잘외우지못하시거나

부른다해도틀리는경우가많았는데

이새로부임해온젊은선생님이

불과사흘만에우리반학생들의이름을모조리다외우시다니

우리는그날부터백선생님의비상한기억력에

완전히포로가되어버렸다

아마도선생님은학생들과더친해지기위해서

명렬표를갖다놓고서열심히외우셨을것이다

이것은교사로서의그분의성실한자세를말해준다

교사로서의백선생님은학생들에게매우철저한분이셨다

매일숙제를내어주시는데

그날배운페이지에서절반을반드시암기하게하며

또그다음날백지에다외워서쓸수있도록하는것이었다

그것이생활영어를중시한것이라는사실은나중에알게되었지만

아무튼우리는이지긋지긋한숙제가싫어서모두들끙끙앓고있었다

선생님은영어교사에는어울리지않게도

우리학교축구부를지도하셨다

내가선생님과친해질수있었던것도바로축구부에서의활동때문이었다

나는문학보다도

축구가좋았고

또축구부에서는골키퍼를맡아서했다

선생님은우리들이훈련할때에반드시그라운드에들어와서

선수들과함께달리며이것저것을지도해주셨다

선생님의공차는실력은그다지수준급은아니었으나

공을따라서열심히뛰어다니며땀을뻘뻘흘리는모습은

한창젊은우리들을감동하게하였다

한참뛰어다니다숨이찰때면

늘그자리에머물러천천히걸음을옮기며심호흡을하는데

그럴대면꼭배우가무대위에서부리는몸짓처럼

어깨를으쓱하시는것이었다

가까이다가가서보면눈을지그시감고

코로바람을깊이마시면서두팔을뒤로잔뜩젖히는모습이

우리선수들눈에는이상한사람으로비치기도했다

때마침오월훈풍에뒷산언덕의아카시아꽃이바람에

그향내를가득실어보내왔다

하지만우리는운동에만골몰했지

꽃향기따위에는관심이없었다

그러나선생님은어딘지모르게시인다운데가있었다

특히눈을지그시감으며꽃향기에취할때면

‘아!시인이란바로저런모습을지닌사람인가보군’하고생각이될정도였다.

당시함흥시내에는백계(白系)러시아사람이와서경영하는

문방구겸서점이한군데있었는데

나는시내에놀러나갔다가

백석선생님이그상점을드나드시는것을가끔본적이있었다

소문에는선생님이그러시아사람에게러시아말을배운다고하였다

그해가을우리영생고보학생들은

만주시베리아등지로수학여행을다녀오게되었다

이때우리를인솔해갈분이백석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은기차안의어느러시아사람들에게

유창하게말을걸고대화를주고받았다

우리는그때깜짝놀랐다

선생님의외국어실력이정말보통이아니시었구나

아마도백선생님의어학실력은거의천부적인것이아니었던가한다


자야가추억하는백석–

막막한호지에혼자떨구어진

서울에꼭꼭숨은내가

그리움과외로움

서러움에울며불며지낸지

한두서너달쯤되었을까

어느날당신이보낸메신저보이가

친필메모를들고찾아왔다

우리는서로다시만난것만이천행이요

그저반갑고좋아서벅찬기분에휩싸여함께집으로들어섰다

역시제집주인이왔음인지통속같이

항상쓸쓸맞기만하던내청진동집은

갑자기집안전체가전등을켠듯화안하고

가득하여흐뭇해졌다

하룻밤을지새면서도당신은

내지난일의잘잘못에대한일체를모르는체했다

한마디의나무람도없이

도리어새가슴같이작아진소녀의타고남은간장을

샅샅이읽어챙긴듯

혹은인정에겨운오라비같이

우렁주는듯

묵묵히다독거리며

흥그러이감싸주는당신의

너그러운사랑에내머리는저절로수그러졌다

그리고당신은단하룻밤

이마를서로마주조아리다가

학교의출근때문에

다음날번개같이함흥천리길을되돌아갔다

가면서도한마디남기는말도없이

총총히당신은봉투한장을떨어뜨리고떠나면서

뒤를돌아다보고

또한참가다가

다시뒤를돌아보곤하였다

기어이당신의발걸음은

아득히멀어졌다

섭섭하고아쉬운마음

새삼그지없었다

누런미농지봉투를뜯어보니

당신이친필로쓰신한편의詩

나와나타샤와흰당나귀」가들어있었다

가난한내가
아름다운아름다운나타샤를사랑해서
오늘밤은푹푹눈이나린다

나타샤를사랑은하고
눈은푹푹날리고
나는혼자쓸쓸히앉어소주(燒酒)를마신다
소주(燒酒)를마시며생각한다
나타샤와나는
눈이푹푹쌓이는밤흰당나귀타고
산골로가자출출이우는깊은산골로가마가리에살자

눈은푹푹나리고
나는나타샤를생각하고
나타샤가아니올리없다
언제벌써내속에고조곤히와이야기한다
산골로가는것은세상한테지는것이아니다
세상같은건더러워버리는것이다

눈은푹푹나리고
아름다운나타샤는나를사랑하고
어데서흰당나귀도오늘밤이좋아서응앙응앙울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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