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기형도-
사랑을잃고나는쓰네
잘있거라,짧았던밤들아
창밖을떠돌던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모르던촛불들아,잘있거라
공포를기다리던흰종이들아
망설임을대신하던눈물들아
잘있거라,더이상내것이아닌열망들아
장님처럼나이제더듬거리며문을잠그네
가엾은내사랑빈집에갇혔네
햇빛은분가루처럼흩날리고
쉽사리키가변하는그림자들은
한장열풍에말려둥글게휘어지는구나
아무때나손을흔드는
미루나무얕은그늘속을첨벙이며
2시반시외버스도떠난지오래인데
아까부터서울집툇마루에앉은여자
외상값처럼밀려드는대낮
신작로위에는흙먼지,더러운비닐들
빈들판에꽂혀있는저희미한연기들은
어느쓸쓸한풀잎의자손들일까
밤마다숱한나무젓가락들은두쪽으로갈라지고
사내들은화투패마냥모여들어또그렇게
어디론가뿔뿔이흩어져간다
여자가속옷을헹구는시냇가엔
하룻밤새없어져버린풀꽃들
다시흘러들어온것들의인사人事
흐린알전구아래엉망으로취한군인은
몇해전누이얼굴을알아보지못하고,여자는
자신의생을계산하지못한다
몇번인가아이를지울때그랬듯이
습관적으로주르르눈물을흘릴뿐
끌어안은무릎사이에서
추억은내용물없이떠오르고
소읍小邑은무서우리만치고요하다,누구일까
세숫대야속에삶은달걀처럼잠긴얼굴은
봄날이가면그뿐
숙취는몇장지전속에서구겨지는데
몇개의언덕을넘어야저흙먼지들은
굳은땅속으로하나둘섞여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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