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통 먹거리 8가지가 ‘맛의 방주(Ark of Taste)’에 승선했다. 맛의 방주는 이탈리아에 본부를 두고 150여 개국 10만여 회원이 활동하는 국제 비영리기구 ‘슬로푸드 국제본부’가 잊혀지고 멸종할 위기에 처한 전세계 각 지역의 토종 음식·종자를 찾아 목록을 만들고 관심과 소비를 이끌어내기 위한 사업이다. 각국 위원회가 추천하는 전통 먹거리를 후보목록에 올린 뒤, 20일간 공개 검증을 거쳐 맛의 방주 목록에 공식 등재한다.
슬로푸드 한국위원회 역할을 하고 있는 슬로푸드문화원이 후보로 올린 한국 토종 먹거리 5가지가 지난 8월 처음으로 등재됐고, 오는 3일 먹거리 3가지가 추가 등재된다. 이들 8가지 먹거리는 6일까지 열리는 ‘남양주 슬로푸드국제대회’에 전시된다.
맛의 방주에는 마다가스카르 안다시베 붉은쌀, 과테말라 후에후에테난고 하이랜드 커피, 일본 이구미 섬 천일염, 이탈리아 그라냐노 파스타 등 76개국 1211종의 음식이 현재 등재돼 있다. 등재된 먹거리 중 일부는 ‘프레시디아(Presidia)’로 다시 지정해 재정·기술 지원도 하고 있다.
태안 자염
자염(煮鹽)이란 가마솥에 끓여서 만든 소금이란 뜻이다. 바닷물을 염전에 끌어들여 바람과 햇빛에 말려 소금을 얻는 천일염이 생산되기 전 한반도에서 전통적으로 소금을 생산하는 방식이었다. 지역에 따라 ‘활염’ ‘육염’이라고도 불렀다. 갯벌의 흙을 갈아 햇볕에 말리면 물이 증발하면서 흙의 염도가 높아진다. 이 흙을 갯벌에 판 구덩이에 채워놓는다. 바닷물이 다시 들어왔을 때 흙을 통과한 바닷물은 염도가 12~17도로 높아진다. 이 물을 10시간 정도 은근한 불에 끓여 소금을 얻는다. 일반 소금(정제염)이나 천일염보다 짠맛과 쓴맛이 덜하고 구수한 맛이 나며, 입자고 희고 곱다. 1950년대 보다 효율적인 천일염전이 일반화되면서 생산이 중단됐다가, 최근 충남 태안 마금리와 전북 고창 사등마을에서 복원됐다.
장흥 돈차
동글납작하고 가운데 구멍이 있는 모양이 엽전처럼 생겼다. 청태전(靑苔錢)이라고도 하는데, 찻잎을 쪄서 찧을 때 파래(청태)처럼 푸른빛을 띄기 때문이다. 장흥 등 한반도 남해안에 자생하는 찻잎 5월경 채취해 하루쯤 햇볕에 건조시킨 뒤 가마솥에 찌고 절구에 빻아 대나무 틀에 넣어 동그란 덩이차로 빚는다. 햇볕에 건조시켜 가운데 구멍을 뚫는다. 여러 개를 볏짚에 꿰 처마 밑 등 비가 들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일주일~열흘 건조·발효시킨다. 6개월에서 길게는 20년까지도 숙성시킨다. 덩이차를 약한 불에 구운 뒤 물에 넣고 팔팔 끓이거나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 마신다. 해독·해열·변비예방 등의 효과가 있어 약으로 먹거나 한약재와 함께 우려 마시기도 했다.
제주 흑우
재래 한우의 일종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안악 3호분)에 누렁소, 칡소와 함께 등장할 정도로 한반도에서 오래 사육해왔다. 온몸이 검은 털로 뒤덮였다. 일반 한우(누렁소)보다 덩치가 작고 성격이 온순하다. 질병에 대한 저항성이 한우 중 가장 강하다고 평가된다. 일제강점기 한우 수탈로 그 숫자가 크게 줄어들어 멸종 위기에 처했으나, 제주특별자치도가 보존과 증식 사업을 벌여 현재는 1500여 두가 사육되고 있다. 지난 2004년 국제식량농업기구(FAO)에 제주 지역재래가축으로 등재됐고, 지난 7월에는 천연기념물 546호로 지정됐다. 소고기의 감칠맛을 내는 성분인 올레인산 함량이 다른 한우 품종보다도 높은 것으로 밝혀지는 등 최근 가치가 더욱 부각되고 있다.
제주 푸른콩장
제주도에서만 자라는 토종 대두(大豆)인 푸른콩으로 담근 된장·간장·누룩장·막장 등 장류(醬類)가 맛의 방주에 등재됐다. 제주에선 푸른콩을 ‘푸린독새기콩’이라고 부른다. 제주 사투리로 ‘푸린’은 ‘푸른’, ‘독새기’는 ‘닭의 새끼’ 즉 달걀을 뜻한다. 달걀 껍질을 까보면 흰자 속에 노른자가 비치며 푸르스름하게 보이는데, 콩 색깔이 이와 같다는 의미다. 제주도에서는 푸른콩을 ‘장콩’이라고 불렀다. 장 담그기 가장 적당한 콩으로 본 것이다. 삶으면 다른 콩보다 단맛이 강하고 차지다. 밑동이 다른 품종보다 굵고 키가 커서 기계 수확이 어렵고 손이 많이 간다. 늘 지켜보다가 영글면 바로 수확하지 않으면 콩깍지가 터져버린다. 수확시기가 늦어 태풍 피해에 쉬 노출되고, 동절기 작물 재배도 불리하다. 뛰어난 맛에도 불구하고 생산량이 줄고 있는 이유다.
진주 앉은뱅이밀
키가 50~80㎝로 작아서 ‘땅밀’ ‘난장이밀’ 등으로 불리기도 했던 우리나라 토종 밀이다. 바람에 영향을 덜 받고 병충해에 강한데다 한반도 기후에 이상적으로 적응한 밀 품종이라고 평가 받는다. 1984년 정부 밀수매가 없어지며 국내 밀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앉은뱅이밀도 멸종 위기를 맞았다. 1991년 우리밀살리기 운동이 시작됐으나, 앉은뱅이밀은 키가 작아 콤바인 수확이 어렵고 수확량이 적다는 이유로 공장 가공이 쉬운 개량종 ‘금강밀’ 위주로 재배가 이뤄졌다. 농협이나 지자체가 실시한 밀 수매에서도 앉은뱅이밀은 외면받았다. 경남 진주시 금곡면에서 어렵게 명맥을 이어오다가, 칼국수·수제비 등 한국 전통음식에 가장 어울리는 밀이라고 입소문이 났고, 우리밀로 빵을 만들려는 빵집이 생겨나면서 소비가 늘고 있다.
연산 오계
오계(烏鷄)는 뼈와 깃털, 피부(껍질), 살, 발톱, 부리, 눈까지 온통 검은빛이다. 오골계(烏骨鷄)는 뼈만 검거나 일부 부위만 검다는 점에서 오계와 다르다. 발가락이 4개에 다리에 잔털이 없어야 순종으로 평가받는다. 오래 전부터 보신·약용으로 길렀다. 동의보감에는 ‘뼈와 털이 모두 검은 오계가 가장 좋다’ ‘중풍에 특효를 보인다’고 적혀있다. 고려 말 신돈은 오계와 백마(白馬)를 먹고 정력을 보충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숙종이 중병을 앓다 오계를 먹고 건강을 회복한 뒤로 충청지방 특산품으로 해마다 진상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야생성이 강해 일반 닭처럼 좁은 우리에서 키우면 스트레스를 받거나 서로 싸우다 죽기 일쑤인 등 사육이 까다롭다. 충남 논산 연산면 지산농원에서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울릉도 칡소
동요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에도 나오는 한국 고유 품종이다. 정지용의 시 ‘향수’에 등장하는 ‘얼룩배기 황소’도 이 칡소이다. 검은 무늬와 누런 무늬가 번갈아 나타난다. 줄무늬가 호랑이 같다 하여 ‘범소’나 ‘얼룩소’라고도 불렀다. 황소(누렁소)만 빼고 칡소·흑우 등 토종 한우를 보기 어렵게 된 건 일제 축산정책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일본 소는 검정소, 한국 소는 누렁소’라는 정책에 따라 황소를 제외한 나머지 품종은 대부분 도축됐다. 해방 후에도 황소 위주의 한우개량 사업에 밀려 찬밥 신세였고, 한우와 젖소의 교잡종이란 오해로 천대받기도 했다. 강원도 산골 일부 농가에서 명맥을 간신히 이어오다, 육질과 맛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부각되면서 울릉군이 적극적으로 복원·사육 사업을 벌이고 있다.
울릉도 섬말나리
섬말나리는 울릉도 그늘진 숲 완만한 경사면에 널리 자생한 백합과 식물이다. 울릉도에 정착한 사람들은 자생하는 섬말나리의 뿌리를 캐먹는 등 구황식물로 활용했다. 어린 순을 삶아서 나물로 먹기도 했다. 과거 섬말나리 자생지역이 ‘나리분지’ ‘나리골’이라 불릴 정도로 군락을 이루며 번성했으나, 불법채취와 들쥐 등에 의한 피해로 개체수가 크게 감소해 1997년 산림청이 희귀 및 멸종위기식물 37호로 지정했고, 민·관·학 공동 복원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울릉군은 전통음식 복원 차원에서 섬말나리를 넣은 산채비빔밥 등 음식 개발을 추진 중이다.
/10월1일자 신문에 쓴 기사의 원본입니다. 신문 지면이 좁아서 기사량을 절반 가량 줄여야 했고, 그래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기사를 본 주변분들 반응이 "이런 음식이 있었나?" "아는 게 하나도 없네?"가 많았습니다. 진짜 왜 우리는 잊고 있었을까요. 구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