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뉴스부에서 작성했는데,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어서 킬… 사실 스스로도 좀 그랬는데, 어쩌면 그래서 다행스러웠던 기사 ^^ 하지만 개인적 차원에서 과거를 회상(?)해 볼 수 있었다는 ㅎㅎ
1988년 가을과 겨울은 청문회의 계절이었다. 그 해는 여소야대의 13대 총선, 24회 서울 올림픽 등 굵직한 뉴스가 많았지만 가장 국민의 시선을 사로잡고,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10월의 언론 청문회, 11월의 5공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였다. 그때 국민들의 의혹과 울분을 속이 시원하게 대변, 이른바 ‘청문회 스타’로 불렸던 국회의원들은 20년이 지난 지금 어떤 모습일까?
당시 청문회가 낳은 최고의 스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통일민주당 초선의원(부산 동구)이었던 그는 1988년 11월 2일 시작된 5공 청문회에서 장세동, 허삼수 증인 심문에서 날카로운 질문과 논리적인 반박으로 눈길을 끌었고, 1989년 12월 31일 국회 증언에 나선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져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특히 정치 자금을 건네준 모 기업 대표에게 “권력을 가진 군부에는 수십 억을 주면서, 내 돈 벌어주다가 죽은 노동자에게는 몇 천 만원을 갖고 싸우느냐?”고 다그쳐 한동안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었다.
이후 낙선과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 당선(서울 종로), 해양수산부 장관 등의 다양한 정치 역정을 거친 노 전 대통령은 16대 대통령을 역임한 후 지금은 낙향해 있다. 하지만 그의 청문회 스타로서의 이미지는 여전해 얼마 전 쇠고기 파동과 관련, 정부 관계자를 압박한 모 국회의원이 일부 네티즌들에게 ‘제2의 노무현’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같은 통일민주당의 김동주(경남 양산) 의원의 인기도 이에 못지 않았다. 12대 신민당 열풍 속에 국회에 입문한 그 역시 5공 청문회에서 맹활약했다. 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다르게 추궁보다는 그는 출석한 증인들을 일갈, 국민들이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대신해 준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91년, 수서 비리 사건으로 구속되어 사람들에게 잊혀졌던 김 전 의원은 98년 부산 해운대ㆍ기장을 보궐선거에서 자민련 공천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그 후 민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을 거쳐 현재 새양산업발전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참여정부의 이해찬 전 총리는 광주 청문회에서 주목을 받았다. 13대 서울 관악을에서 당선, 등원한 그는 11월 18일 시작된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 조사를 위한 청문회에서 치밀한 자료 준비와 정제된 질문으로 증인들을 몰아붙였고, 나중에 유시민 전 장관이 당시 이 전 총리의 보좌관이었던 것이 알려져 화제가 되었었다. 그러나 군의 무장간첩 사살 사진을 광주 시민 학살 사진으로 제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 때부터 17대까지 관악을 지역구에서만 5선을 한 이해찬 전 총리는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직을 수행하면서 지난 17대 열린우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 했다. 올해 4월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자신이 만든 연구단체 ‘광장’에 머물러 온 그는, 지난 10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치를 꼭 정당에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국회의원은 다섯 번이나 했기 때문에 더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조심스런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직접 질의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이기택(통일민주당, 부산 해운대) 5공 청문회 위원장 과 문동환(평화민주당, 비례대표) 광주 청문회 위원장도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온화한 인상이면서도 엄격하고 단호하게 진행하는 이위원장과 어눌한 듯 하면서도 할 말은 하는 문위원장의 모습이 대비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6선이었던 이위원장은 1990년 3당 합당에 반발, 소위 ‘꼬마 민주당’을 창당해 다시 한번 이목을 집중시켰었다. 14대까지 모두 일곱 번 국회의원을 역임한 이기택 전 의원은 현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 부의장을 맡고 있다.
문익환 목사의 동생이기도 한 문동환 위원장 역시 유신시절 목사로서 YH 사건으로 투옥되는 등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1988년 정계에 입문했다.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의 권유로 위원장을 맡았다는 그는 청문회 출석을 거부하는 최규하 전 대통령을 집으로 직접 찾아가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보여 주었다. 지난 10월 한겨례에 기고한 글에서 “광주 청문회는 비록 용두사미격으로 끝났지만, 모든 국민들이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정도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1992년의 대통령 선거를 끝으로 정계를 은퇴한 그는 아내 문혜림(미국명 페이 핀치백)씨와 미국 뉴저지주 블룸필드에서 살면서 초청과 특강이 있을 때마다 한국을 찾고 있다.
20년 전 TV로 생중계되었던 청문회에서 이들 스타 의원들은 국민들의 마음을 충분히 대변, 열광하게 했다. 당시 청문회는 국민의 5공 청산 요구를 고조시켰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11월 23일 백담사행과 그 측근들의 구속을 이끌어냈다. 그 20년 전 화려하게 등장했던 ‘청문회 스타’ 의원들은 이후 대통령, 총리, 장관 등 다양한 위치에서 한국 정치의 마디 마디를 채우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