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예정] 외교 의례로서의 叩頭: 17-18세기 영국과 조선의 同床異夢

12월 12-13일에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열리는 한국국제정치학회 연례학술회의 대학원생 패널에서 발표 예정인 논문 ^^ 2년 전 한 수업의 term-paper였는데, 10월에 거의 손을 보지 못 하고 제출했었다. 발표 기회의 행운은 잡았지만, 13일 오전에 발표 가능한 천운까지 따를지는 ㅋㅋ 그 이름도 유명한 경찰 기자 생활이 오늘 오후부터 시작이니까~

1643년 조선의 인조, 1792년 영국의 매카트니 사절단은청과 삼배구고두를 놓고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결국 인조는 이를 했고, 매카트니 일행은 하지 않았다. (중국 기록에는 매카트니도 고두를 했다고 나온지만…) 결과만 보았을 때에는 이질 문명권 사이의 문화 갈등으로만 보이지만, 그이유는 서로 달랐다. 조선은청에게 할 수 없다는것이지만, 영국은 고두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갈등은 인간,국가, 체제(월츠의 삼단계에서 차용)에서 벌어졌다. 서구의 시각에서 무엇보다도 고두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였다. 온 몸을 땅에 대고, 머리를 세가볍게 찧기 때문이다. 또국가간의 평등 정신을 훼손했다. 당시 서구 근대 국가 체제에서 국가원수에 대한 의례는허리를 굽혀인사하는 것으로충분했다. 아울러 서구 문명권을 대표한다고 믿었던 영국에게 동아질서 국제질서의 맹주인 청은 ‘종이 호랑이’에 가까웠다.따라서 ‘타자’의 예인 고두를 ‘자기화’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조선은 청이 야만인 만주족이고, 중화인 명을 무너뜨린 왕조였기에 고두를 행할 수 없었다. ‘삼전도의 굴욕’ 이전에 고두를 하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략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남한산성 앞에서의 치욕은 야만족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고두였기에 용납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후 백여년 동안 청을 통해 서구 문물이 수입되고, 북학파 등이 청의 개방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난다. 결국 ‘문화적 중심성’을 갖춘다면 천하질서에서는 누구나 중화가 될 수 있고, 그렇다면 고두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매카트니는 고두를 하지 않고 청 황제를 알현한 최초의 서양 외교사절이다.동양에 대한 서양의 물리적 우세가 확정되는 것은 1848년 아편 전쟁이지만, 어쩌면 문화적 우열은 이 때 이미 갈린 셈이다. 그가 고두를 했다는 중국 기록은 어쩐지 자기 기만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마 매카트니는 자신의 언행이 이후 세계사에 미칠 영향까지 염두에 두고있었던 것 같다. 역사의 나침반은 종종의외의 시공간에서, 뜻밖의 인물이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오늘경찰 기자라는 낯선 일을 시작하는 내가 매카트니의 당시 마음이 궁금해지는 것도 같은 까닭이다. 미지의 세계로 한 걸음씩 옮겨 놓는 두려움이 분명 그에게도 있었을 테니까… 눈까지 내려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뒷사람에게 남는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한 가지 위안은, 내가 하기에 따라서 뒤이어 오는 사람의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질 수도 있다는 것 ^^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중요한 선례가될 수 있음을 깨달았던 매카트니의 통찰력이 지금 내게 절실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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