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제2TV 미니시리즈 ‘결혼 못하는 남자’가 10회를 마쳤다. 이변이 없는 한 16회로 끝난다고 볼 때 반환점을 돈 셈이다. 비록 ‘선덕여왕’에 밀려 한 자릿수 시청률에 그치고 있지만 상당한 수작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지진희가 있다.
잘 생겼지만 조금 부담스러운, ‘줄리앙’적 미남이 대세인 요즘 ‘아그리파’적인 그의 얼굴은 다소 느끼하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한 그의 연기력을 볼 기회는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지진희는 ‘대장금’에서 장금이의 남자일 뿐이었고, ‘스포트라이트’에서 손예진을 사랑하는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하고 현실에 존재할 수 없을 만큼 잘 생기고, 깔끔하며 날씬한 캡이었다.
그랬던 지진희가 ‘공인된 연기파 배우’ 김명민이 연기했던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건우와 비슷한 역할로 등장했다. 전문직, 독신남, 비사교성… 캐릭터의 공통점도 많지만, 드라마의 원톱이라는 점이 무엇보다도 닮았다. 김명민 원톱은 몰라도 지진희 원톱이라?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선덕여왕’에 밀리니까 패전처리용이리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까지, 비록 점수 차이는 크지만 지진희는 경기를 잘 끌어왔다, 더 이상의 불펜 투수를 소모하지 않고 ^^
어떤 문화평론가는 두 드라마를 비교하면서 지진희에게 김명민만큼의 카리스마가 없기 때문에 ‘결못남’이 ‘베바’처럼 각광받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 비교는 공정하지 않다. 우선두 드라마는 셋팅 자체가 다르다. ‘베바’가 블록버스터는 아니지만, 비교적 규모있는 오케스트라를 배경으로 하는 반면 ‘결못남’은 철저한 소품 드라마다.
다음으로 지진희가 연기하는 조재희는 김명민이 보여줬던 강건우와 닮은 만큼 다른 캐릭터이다.지진희는 직설적일 뿐이지만, 강건우는 독설가이다. 지진희는 상대에게 ‘똥덩어리’ 따위의 모욕을 주지는 않는다. 또 지진희는 건축 설계 말고도 할 줄 아는 게 많다. 요리도 잘 하고, 집안 살림도 잘 꾸린다. 김명민은 취향이 세련되었지만 직접 와인 스크류 한번돌린 적이 없다.따라서 조재희와 강건우의 단순 비교는 매우 곤란하다.지진희는 ‘결못남’의 조재희가 가져야 하는 세상이 궁금하면서도 두려워해 망설이는 특유의 표정과 말투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기대 이상이 아니라 과연 누가 또 이만큼 할 수 있었을까 할 정도이다.
굳이 ‘결못남’이 ‘베바’보다 아쉬운 점을 꼽는다면 ‘감동’이다. 물론 ‘결못남’ 자체가 ‘감동’보다는 ‘웃음’을 위한 드라마임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감동’이 없는 ‘웃음’은 지속되기 어렵다. 특히 조재희라는 특이한 캐릭터가 원톱으로 나서서 끌어간다면, 그 캐릭터의 매력은 회가 거듭될 수록 반감될 수밖에 없다. 피로 증세가 온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결못남’에서 조재희가 가졌던 엉뚱한 반전의 효과는 5,6회를 지나며 급감했고, 8회에서는 이 ‘나쁜 남자’가 ‘고음불가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사실 조재희는 강건우에 비해인생역정이 없기 때문에 ‘감동’ 자체를 기대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베바’가 가져왔던 감동은 강건우의 것만이 아니었다. 두루미의 이지아, 또다른 강건우인 장근석,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스토리 하나, 하나가 살아 있었기에 가능했다. 강건우의캐릭터 임팩트가 약해질 때 쯤이지아와 장근석이 부각됐고, 이들의 삼각관계가 꼬이게 될 때 이순재,송옥숙, 박철민 등의 비중이 올라갔다. ‘베바’가 18회를 긴장감 있게 끌고 갈 수 있었던 것은 김명민의 개인기도 컸지만, 이들이 착실하게 받쳐줬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결못남’의 지진희는 많이 외로워 보인다. 엄정화는 분명히 자기 몫을 하는 배우지만 캐릭터 자체가 큰 매력이 없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기대를 걸었던김소은은 예상보다 비중도 작은 데다가 아직 그 이상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되어 보인다. 최근 배우 중에 매우 예쁘고 사랑스러운 외모지만 누가 해도 그 만큼은 해 줄 것 같다. 양정아, 유아인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이들의 연기력이 문제라기보다는 드라마 자체가 지나치게 지진희-엄정화 위주로 돌아간다는 지적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이제 6회 남았다. ‘결못남’이 일본판의 아류로 끝나지 않으려면, 지난해 ‘온에어’에서 김하늘을 재발견했던 것처럼 지진희의 재발견으로라도 기억되고 싶다면… 주변 인물들에게 시간을 더 주어야 한다. 양정아가 더 나서거나 김소은이 좀 더 얽혀들어야 한다. 이중, 삼중의 러브 라인을 그리라는 게 아니라 지진희를 제외하고 평면적이거나 너무나 투명해 속이 뻔히 보이는다른 캐릭터들이 좀 더 입체적으로 살아나야 한다. 그리 된다면 ‘결못남’은 단순히 ‘초식남 신드롬’을 되새기게 한 작품이 아니라 ‘연기자’ 지진희를 발굴한, 차세대 ‘TV 탤런트’ 김소은의 첫 주조연작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p.s. 아무리 봐도 김소은은 참 ‘매력적으로’ 예쁘다. 그냥 예쁘거나 매력있는 배우들은 참 많은데 둘 다 가진 경우는 드물었는데… 난 이번에도 김소은을 ‘꽃남’이 아닌 ‘천추태후’에서 처음 발견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취향이 참 ^^
노석조
2009년 7월 18일 at 12:42 오후
어진선배안녕하세요 ;;
글 잘 보고 갑니다.
밥
2009년 7월 18일 at 2:47 오후
원작이 아베히로시를 위한 & 아베히로시에 의한 드라마였기때문에.. 지진희가 아베히로시를 지워내고 새 인물을 만들어내기에는 역량이 딸리기는 할껍니다. 일본판을 몇해전에 아주 재밌게 봤던 기억을 잊고 이번 리메이크판을 대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습니다만. 솔직히 일본판과 완전 똑같은 내용이 나올때는 손발이 오그라들고, 일본판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올때는 재미가 없습니다. (예를들면 위에 말씀하신 세레나데씬..) 문제는 어쩌면.. 우리나라 드라마가 너무 긴것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일본처럼 11부나 12부에 끝내면 (그것도 회당 시간이 첫회와 마지막회를 빼면 50분을 넘지않죠) 더 완성도 있어질지도 모르는데.. 엿가락처럼 늘이고만 있으니.. 하긴 드라마를 12부작으로 바꾸면 한해에 편성하는 드라마를 늘여야할테고.. 그럼 결국 비용이 커지겠죠.. 그러고보면 프로그램의 완성도는 결국 오까네의 문제인지도.. ㅎㅎ
한라산
2009년 7월 20일 at 12:48 오전
드라마 분석하신 분이나 댓글 다신 분들이 전문가시구먼요. 재밌게 잘보고 갑니다. 저도 이제 자세히 한번 봐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