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역으로 인터뷰를 하러 갔다가 잠시 코엑스몰에 들렀다. 서점에 가기에는 시간이 빠듯해서 그 옆 에반레코드의 클래식음반 코너에 들어가 정말 오랜만에 CD를 하나 샀다. 임동혁의 피아노 음반 2장을 산 이후 거의 4~5년만이 아닌가 싶다.
차에서 부모님과 들으면 좋을 것 같아 샀는데… 지금 확인해 보니 2005년에 나온, ‘백만년 된’ CD이다. 어쩌다 이 음반이 ‘비교적’ 새롭게 느껴졌는지 ㅠㅠ 나름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는데 말이다.
코엑스몰이 생긴 것은 2000년, 아마 에반 레코드도 비슷한 시기부터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이름이 달랐던 것 같기도…) 이 곳에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클래식 음악실이 따로 있었다. 강남역 타워레코드나 신촌 신나라(?) 레코드, 교보 핫트랙 등도 클래식 코너는 따로 있지만, 밀폐된 별도의 룸이 마련된 경우는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 근데 이 곳은 유리로 차단된 20여평의 방에 한쪽에는 공연 실황을 틀어주고, 다른 한쪽에는 빵빵한 스피커로 클래식 음악을 들려줬다.
전문가들은 어찌 평가할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 클래식 음반의 전성기는 1990년대 말이었다. 90년대 초 ‘신이 내린 목소리’ 조수미가 일으킨 바람은 신영옥, 홍혜경의 소프라노를 주목하게 했고, TV ‘열린음악회’ 덕분에 바리톤 김동규가 스타로 떠올랐다. 여기에 장영주, 장한나까지 출연하면서 지금 보면 ‘거품’이었던 경제적 풍요와 맞물렸다.
당시 클래식 붐이 하나의 허영이자 사치에 가까웠다는 증거는 지금이나 그 때나 클래식 CD 값이 15000원 안팎이라는 것이다. 10년 동안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데… 물론 음반 시장 침체로 오르지 않은 탓도 있지만, 당시 CD 한 장 사는 것은 꽤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었다. 특히 학생 입장에서는 ^^
그러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걸까? 3년여 만에 들어선 에반레코드의 클래식룸은 예전의 그곳이 아니었다. 벽면 가득했던 CD장은 뭉텅 뭉텅 이가 빠졌고, 매장의 1/3 이상이 DVD가 차지하고 있었다. 한쪽 벽면을 가득채웠던 한국인 음악가의 음반들은 장영주, 정경화등의 흔적만 남았고,언젠가 돈을 모아서 사려던 안네 소피 무터의 전집도 사라졌다.
매장 내 ‘주문하신 음반은꼭 구해 드립니다’라는 문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미리갖다 놓기보다는 주문 판매 방식으로 바뀐 듯 했다. 내가 매장 이곳 저곳을 둘러보는 동안 40대 초반의 남성 둘이 들어와 10여장의 CD를 주인에게 받아가는 모습이단적이예였다. 아련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카라얀, 번슈타인 등 지휘자의 포스터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서글펐던 것은 폴 포츠 음반이었다. 나름 대중성이 있는 음반이었을 텐데 CD 한 구석에 ‘구입하시는 분들께 미노디셰프 피자 시식권을 드립니다’라고 써 있었다. 마케팅의 한계를, 프로모션의 금기를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클래식 음반 코너에식당 피자 시식권 안내문은 어쩐지 안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시내 몇 군데 클래식 음반 전문점이 있다고 한다. 아직 가 보지는 못 했다.하지만 10년 전 그 존재만으로, 그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고 뭔가 만족스러웠던 에반레코드 클래식룸의변화는 안타깝고 슬프다. 비록 그옛날의 나와 우리 사회 모두 허영과 과대망상에빠져있었다고 해도…
waga
2009년 11월 1일 at 5:13 오전
맞습니다, 신나라나 evan 모두 클래식부문에서는 몰락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품격높은 클래식음반을 즐비하게 전시.판매하고 있는 곳이 있읍니다 바로압구정 로데오거리의 풍월당입니다.
성실남
2009년 11월 1일 at 9:03 오전
에반레코드 클래식룸의 몇몇 단편적인 변화를 클래식 저변의 침체로 판단하시는 것 같아요. 직접 CD를 보면서 고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겐 그곳은 여전히 아늑하고 훌륭한 클래식음반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DVD 연주 실황도 감상할 수 있는 곳이구요. 90년대말의 한국의 클래식붐은 몇몇 유명음악인들에 대한 신드롬이었다고 봅니다. 광고를 보고 한국의 유명 클래식음악인의 CD를 한두번 사는 사람들보다, 혼자 공부하고 찾아가면서 자기기준으로 CD를 사는 사람들이 진정한 클래식 팬층이 아닐까요? 지금이 음악산업적인 측면에서 침체기인 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클래식음악 자체의 몰락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클래식 저변이 빈약했고 제생각엔 작년의 <베토벤바이러스> 드라마 등 여러 환경적 요인으로 지금정도가 서서히 클래식 팬층이 두터워져가는 시기라고 봅니다. 풍요로운 삶과 문화생활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10년전보다 많아졌다고 생각되고 연주회, DVD 등 클래식 감상 환경은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까요. 클래식은 인간 삶의 본질적인 감정을 이끌어내는 음악이고 따라서 듣는 사람의 감정적 성숙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장르보다는 듣는 사람의 끈기가 있어야 그 맛을 더욱 깊게 알게 되는 음악인 것 같구요. 경제적인 이유나 일시적인 붐으로 클래식 팬층이 크게 변동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지금보다 좀더 마음의 여유를 갖을 수 있게 된다면 클래식에 대한 귀도 좀 더 열리지 않을까요? 에반레코드 클래식룸, 교보문고 광화문점 핫트랙스 클래식코너, 강남구 신사동 풍월당은 지금 우리나라의 클래식 팬들에겐 보석같은 장소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