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화속으로’, ‘영화’ 보다 ‘뮤비’,

어렸을 때부터 한국전쟁에 관심이 많았다. 역사를 좋아했고, 다큐멘터리와 사극을 즐겨본 탓일 것이다. 그리고 1990년 한국전쟁 40주년으로 KBS 제작한 ‘한국전쟁’ 다큐멘터리 10부작은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내게 각인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 한국전쟁에 대한 아무 책이나 하나 읽고 내라는 故서동만 선생님의 숙제를 굳이 1700쪽짜리인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을 고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60년, 지상파에서는 ‘전우’와 ‘로드넘버원’이 방영 예정이다. 그보다 일주일쯤 앞서 개봉한 영화 ‘포화 속으로’. 약간 촌스러운 제목과 달리 김승우, 차승원, 권상우 등이 출연한 블록버스터이다. 시간 때우러 들어간 영화관에서 뜻밖에 개봉했기에 무슨 영화인지도 모른다는 후배를 선동해 표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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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후 포항에서 실제로 있었던 학도병들의 이야기라고 한다. 낙동강 전선 방어를 위해 후퇴한 국군 대신 인민군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영화 직후 생존자들의 증언도 이어지는 것을 보면 전원 전사한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리고 이들의 희생은 인민군의 전진을 11시간 저지시키는성과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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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에서는모두 전사한다. (최후의 결전 직전에 도망친 경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목숨만 잃은 것이 아니다. 영화가 끝나면 이들의 이름은 물론 캐릭터조차남지 않았다. 오장범(탑)과 구갑조(권상우), 그리고 동생을 죽여야 했던 누군가와인민군 포로가 되었던 또 한명 정도만 기억에 남는다. 왜? 영화를 영화가 아닌 뮤직비디오처럼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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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전쟁 영화의 서너배 이상 폭약을 썼다는 전투 장면은 분명 볼 만 하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광활한 공간에서 엄청난 엑스트라로 스케일을 보여줬다면, ‘포화 속으로’는 그보다 훨씬 작지만 착실하게 공간과 인물을 메워냈다. 문제는 처음부터 예상가능했던 줄거리가 정말 그대로 흘러가고, 학도병 71명을 다루면서 그 중 대여섯의 인간상과 사연들조차 엮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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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 속으로’에는 ‘이야기가 될 만한’ 조연들이 많다. 오장범과 함께 전투 경험을 가졌다는 이유로 소대장을 맡은 둘, 부상 때문에 괴로워하는 중학생 동생을 자기 손으로 사살한 학도병, 구갑조의 두 단짝, 무전병을 맡았다가 탱크에 뛰어드는 학생… 유기적으로 펼쳐졌어야 할 이들의 스토리는 전혀 소개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이 왜 학도병을 지원했는지, 최후통첩을 받은 후에 왜 도망가지 않고 남아서 죽음을 택하는지 전혀 공감할 수가 없다. 하다 못해 71명 중 초기 전투에서 사망한 십여명을 빼고 몇이나 남아서 싸우다가 죽어갔는지도알 수가 없다. "중대장, 다친 애들 몇 명 뺴고 몇 명 남았다"는 누군가의 대사 한 마디면 충분할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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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건조연들 뿐 아니라 주인공들의 캐릭터와 스토리도 흡입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 오장범이 왜 전쟁터에 나왔는지, 그의 어머니는 무슨 이유로 그렇게 의연하게 아들을 보내는지도 불분명하다. 대사 한 마디 없는 그의 어머니 모습은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기보다는 ‘미스코리아 출신 김성령이 어머니로 나오네’라는 생각만 가득하게 만든다. 분명 탑의 연기는 ‘아이리스’때보다친숙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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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포드 대학의 한미국인은 이 영화의 권상우를 보고 "한국의 제임스딘"이라고 말했단다. 나 역시 제임스 딘을 모르는 세대이므로 비교는 어렵지만… 같은 영화를 본 입장에서 그 말을 유추한다면, 제임스 딘도 연기파 배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계속 따로 놀던 구갑조가 갑자기 (착하게) 변심하는 이유를 권상우의 연기만으로는 도통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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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차승원의 연기마저 밋밋하다. 예고편만을 믿고 그의 진가를 기대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그가 굳이 상대가 학도병이라는 인물만으로 휴머니스트 행세를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주머니에서 꺼내 약 1.2초간 화면에 나왔던 사진에 그의 동생(혹은 형)이 교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일까? 뮤직비디오가 아닌 이상 그보다는 조금 더 설명을 해줘야 관객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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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의 ‘폭풍간지’ 김승우는 또 멋있게 나온다. 어쩌면 김승우의 ‘간지’는 뮤직비디오 스타일인 이영화와 가장 어울린다. 게다가 ‘착한 나라’이기까지 하다. 최소한 1개 대대~여단급일 차승원의 부대를 2개 분대 정도로 궤멸하는부분에서 절정을 이룬다.어차피 그럴 일이면 처음부터 1개 분대만 학도병들과 함께 있게 했으면 희생이 훨씬 줄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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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희의 출연은 카메오에 가깝다. 차라리 그녀를 학교에 남겨둬 그녀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갔으면 어떨까 싶다. 누나 입장에서 학도병들의 사연도 하나, 하나 듣고 전할 수 있었을 테고… 진부하지만 김승우나 차승원과의 삼각관계였다거나… 차라리 그랬다면 굳이 차승원이 포항으로 진격하고, 김승우가 무리해서 구원에 나서는 이유가 조금은 설득력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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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시종일관 뚝뚝 끊긴다. 개별 에피소드는 물론 에피소드 내의 씬과 씬도 앵글이 튄다. 애시당초 편집상은 포기한 것 같다. 시나리오가 처음부터 그랬을 리는 없고, 제작량에 비해 상영시간에 맞춰 줄이다가 보니까 생긴 일인 듯 싶다. 덕분에 스토리 몰입은 거의 불가능하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미국에 개봉될 때 제목이 ‘형제애’로 번역되었다는 소식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한국전쟁의 전후 사정을 알고, 어느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그 영화는 형제 간의 사랑만을 그린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참상을 상상조차 못하는 미국인들로서는 ‘형제애’ 이외의 키워드를 그 영화에서 찾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JSA’나 ‘실미도’처럼 캐릭터와 스토리 중심이 아니라 스케일과 이미지 위주의 영화였으니까 ^^

‘포화 속으로’도 비슷하다. 영화의 컨텐츠와 가공 기술은 우수하다. 하지만 ‘맛’과 ‘냄새’가 없다. 스타일만 기억되는 뮤직비디오처럼… 다음주부터 TV에서 만날’전우’와 ‘로드넘버원’은 좀 다르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1 Comment

  1. 유머와 여행

    2010년 6월 20일 at 1:28 오후

    그렇군요.. 우선 한번 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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