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일반국제정치학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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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 배회하는 동아시아, 망령에 사로잡힌 한국


“전쟁의 유령이 동아시아를 배회하고 있다.” 키신저 전 美 국무장관의 이 발언은 동아시아의 전운(戰雲)을 기정사실화했다. 지난 1월, 다보스 포럼에서 일본 아베 총리가 최근 中日 갈등을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영국과 독일에 비유했을 때만 해도 식상한 도발에 불과했다. 하지만 ‘닥터 둠’으로 불리는 루비니 교수까지 “1914년 아 무도 전쟁을 예측하지 못한 것처럼 중일 충돌이 올해의 ‘블랙 스완’(예외적으로 발생하는 대사건)”이라고 언급하자 상황은 완전히 반전됐다. 정녕 동아시아에서 전쟁은 불가피한가? 그렇다면 한국의 대응 방안은 무엇일까?

유감스럽게도 국내외 어디에서도 응답은 없다. 동아시아의 당사국이고, 역사적으로 중일 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한국은 나름의 목소리조차 희미한 것. 이론적으로 예방전쟁, 봉쇄, 개입과 확장, 편승, 헷징(hedging) 등이 제안되지만, 모두 강대국만이 실천 가능한 수단으로서 우리에게는 현실성이 없다. 지난 세기 망국과 동족상잔의 역사를 겪었으면서도 한국은 아직도 극소수 서구 열강의 국제정치이론의 망령에만 사로잡혀 셈이다.

강대국이 아닌 보통국가를 위한 ‘일반’ 국제정치학

동주 이용희의 『일반국제정치학 상』을 반세기만에 다시 펴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 50년 전 그는 서구 유럽의 국제정치이론은 다수 비유럽 국가에게는 보편성이 없다고 판단, 그들에게 적용 가능한 ‘일반’ 국제정치이론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또 유럽 근대국가의 후속 모델로 연방·연합 형태를 제시, 21세기 유럽연합(EU)의 탄생을 20년 앞서 예언하기도 했다. 더불어 토종 정치학자로서 유학파에 맞서 서울대 외교학과를 창설하고, 대통령 특별보좌관과 국토통일원 장관으로서 현실 정치에도 참여한 미국식 인앤아웃(in and out) 시스템의 원조였다.

동주는 이 책에서 국제정치의 ‘권역(圈域)’ 개념을 제시한다. 역사적으로 국가는 달라도 특정한 행위의 명분이 유지되고 정당화되는 국제질서 차원의 공간이 존재해왔고, 이는 기독교·회교·유교 문화권과 대체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17세기 외교사절의 접견 의례가 유럽은 경례(敬禮)로 충분했지만, 중국에서는 고두(叩頭)여야만 했던 것도 마찬가지. 아울러 한 권역의 개념과 제도가 다른 권역으로 전파될 때 수용과 변용, 그리고 저항의 양상을 거친다고 지적했다. 19세기 동아시아 질서 변동기에 한중일 3국에서 공히 나타난 문명개화, 동도서기, 위정척사의 움직임은 각각 대응된다. 이 전파 과정의 차이는 동일한 자유, 평등, 인권 등의 개념과 민주주의, 시장경제 등의 제도가 서로 다르게 자리를 잡는 원인이 되었다.

가로쓰기와 한글판으로 다시 만나는 1세대 국제정치학자

『일반국제정치학 상』이 처음 출판된 1962년 이후 한국은 분명 달라졌다. 전쟁의 폐허에서 꿀꿀이죽을 먹던 아이들은 자라서 국제연합과 세계은행의 수장이 되었다. 그 자녀들은 ‘말춤’으로 빌보드 차트를 흔들고, 빙판의 여왕으로 등극하며 세계를 홀리기도 했다. 그러나 외교관을 새롭게 양성한다던 국립외교원 커리큘럼은 외교안보연구원 시절과 달라진 게 없다. 김정은이 세습해 장성택이 처형된 북한에 대한 분석도 일본 매체와 해외 싱크탱크에 의존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동주의 초혼(招魂)은 더욱 유의미하다. 단순히 ‘우리’가 아닌 다수 보통국가들의 국제정치이론을 탐구하는 전공자, 국제문제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 국제기구 공무원을 지망하는 학생들까지, 한글세대의 접근을 가로막았던 초판의 세로쓰기와 국한문 혼용이 2014년판 『일반국제정치학 상』에서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보다 편안하게 물어보자, 진정 중일 전쟁이 벌어지는지, 통일은 대박이 맞는지… 그리고 들어보자, 키신저나 루비니, 혹은 구미 열강의 망령이 아닌 1세대 한국 국제정치학자의 2014년판 응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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